131화 기공식 갔다 오는 날 (3)
(131)
두 명의 이혼 남녀를 태운 차는 계속 빗속을 달렸다.
강시혁은 기분 같아서는 서울 도착 후 둘이 생맥주라도 마시고 싶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둘은 서로 아픔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영진 상무는 자기와 신분의 차이가 너무도 많이 났다.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맥주 한잔하자고 해서 냉큼 따라올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많이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자기는 아무 때고 후배나 친구들과 허술한 생맥주집이라도 찾아가 닭다리를 뜯어도 된다. 이영진 상무 차를 운전하는 김 기사를 불러내 돼지 머리고기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셔도 된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는 달랐다.
자기 스트레스를 함부로 풀 수 있는 사람이 못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시혁이 다시 질문했다.
“상무님은 이렇게 비 오는 날 잠이 안 오거나 하면 어떻게 보내시나요?”
“음악을 듣지요. 그리고 독서를 합니다. 우리 집 2층엔 모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332권이 다 있습니다.”
“헉, 그렇습니까?”
강시혁은 하마터면 부럽네요 라는 소리가 나올 뻔하였다.
“경영학 책도 많이 보지만 문학서도 많이 봅니다. 그 안에 인생이 있기 때문이죠.”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얼굴도 아름답지만 교양인이라 정말 여신처럼 보였다.
“그럼 올해도 많은 책을 읽으셨겠네요.”
“글쎄요. 한 10권 읽었나? 시간이 없어서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강 대리님은 올해 독서 많이 하셨죠? K대학 영문과를 나오셨으니 그쪽 관련 책을 많이 읽으셨겠네요.”
“올해는 딱 한권만 읽었습니다. 같은 책을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세 번이나요? 무슨 책을 세 번이나?”
“전기 기능사 문제집입니다.”
“호호. 강 대리님은 참 열심히 사시는 분 같네요. 그래서 전기기능사 시험에 합격은 하셨나요?”
“합격했습니다. 자격증 수당 10만원이 나온다고 해서 다른 일 제쳐놓고 공부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강 대리님이 의지가 굳세고 대단하신 분이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절말 대단하시네요. 인문대학을 나오신 분들이 기능사 자격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정을 해주어야 할 것 같네요.”
“상무님이 인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죽어라 하고 공부해서 딴 자격증 수당이 10만원이랍니다. 홍 사장님이 상무님과 결혼 후 받기로 한 삼방전기 주식도 한 주당 10만원이죠. 홍 사장님은 이걸 10만주나 받을 뻔했지요. 이게 바로 금수저와 흙수저 차이랍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뒷좌석에 앉은 이영진 상무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강 대리님은.... 조각배를 타고 넓은 바다를 향해 끝없이 노를 저어가는 사람 같네요.”
"위태롭게 보인다는 것도 저는 압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끝없이 항해를 하는 수밖에요. 음악 틀어드릴까요?“
“네.”
강시혁은 스틱스(Styx)의 Come Sail Away를 들려주었다. ‘항해를 떠나요’ 라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우리나라 록밴드 들국화가 공연을 할 때 자주 들려주던 음악이었다. 전설의 록밴드 들국화의 음악은 대부분 띵곡들이 많았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항해를 하고 있어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삶에 맞서는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나는 선장이 되지요.]
이영진 상무는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었다.
이제 차는 톨게이트를 지나 양재동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해안에서 갑판을 오르면서 내일을 찾아갈 거예요.
나는 노력할 거예요. 나는 계속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런데 이영진 상무는 후렴구인 Come Sail Away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분명히 입술이 움직이는걸 보니 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영진 상무도 스틱스의 음악을 아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이 음악을 아시는군요.”
“알죠. 지금 영빈관으로 쓰고 있는 할머님 댁 2층에서 이 곡을 피아노로 쳐보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보았는데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차창 밖을 쳐다보며 잠시 추억에 젖은 듯하였다.
강시혁이 앞을 응시한 채 말했다.
“영빈관 2층에 상무님의 피아노가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도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한가한날 치러 오세요.”
이 말에 이영진 상무가 활짝 웃는 낯으로 말했다.
“원래 그 피아노는 영빈관에 외국의 VIP손님이 오시면 치기로 했는데.... 아직 그럴 기회가 없었네요.”
“저는 날마다 그 피아노를 닦습니다. 윤이 나도록 닦습니다. 언젠가 오실 주인을 위해서지요.”
“호호, 고맙네요. 영남이는 요즘도 드럼 치러 자주 오나요?”
“가끔 옵니다. 영남 씨는 음악 쪽으로 밀어주었으면 지금쯤 상당히 대성했을 제목입니다.”
“그 말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음악이라면 펄쩍 뛰는 분이라서....”
강시혁은 산돼지처럼 생긴 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영남이 시끄러운 록밴드의 드럼을 친다면 당장에 드럼을 부셔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영남은 확실히 재벌 집안의 이단아였다.
“영남 씨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도 음악을 할 때는 신 지핀 사람처럼 합니다.”
“소질을 살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영남이가 영빈관에 가서 드럼을 친 후부터는 얼굴도 좋아지고 약도 안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좋아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또 강 대리님이 영남이와 가끔 말 상대도 해주어 사고의 폭도 더 넓어진 것 같습니다. 강 대리님의 노력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 만해도 영남이는 많은 것을 배우겠지요.”
“하하, 저에게 뭐 배울게 있나요? 참 영남 씨가 일본의 재즈 음악가 사카모토 쯔요시 씨를 찾아달라고 해서 교바시 보디가드에서 찾아주었습니다. 보아하니 앞으로 교류가 있을 듯합니다.”
“사카모토 쯔요시 씨라고요? 세계적 재즈 음악가인 에디 히긴스로부터 특별 지도를 받은 사람인데요?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일본의 작은 지방도시의 클럽에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영남이가 그분을 초청하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그분 약에 절어있기는 해도 피아노 치는 솜씨는 일품입니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차가 이태원에 도착했다.
집 앞에 이르자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오늘 XX대학교 기공식에 강 대리님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특히 차 안에서 나눈 대화 덕분에 지루한줄 모르고 다녀왔네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무님.”
강시혁은 먼저 차에서 내려 뒷 트렁크의 우산을 꺼냈다. 골프장에서 쓰는 큰 우산이었다.
비가 많이 오므로 우산을 받쳐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영진 상무에게 다가갔다.
한 우산아래 둘이 같이 서있으니까 정말 연인 같았다.
이영진 상무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은은히 여성용 향수 냄새도 풍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강시혁은 우산을 이영진 상무 쪽에 많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자기는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저런! 비를 다 맞았네요. 더 가까이 오세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이영진 상무의 몸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는 더 진하게 풍겼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하얀 목덜미를 볼 때마다 현기증을 느꼈다.
강시혁이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지하실 자기 방으로 왔다. 냉장고의 문을 열고 캔 맥주를 꺼내왔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 있는 단무지도 꺼내왔다.
강시혁은 빗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빗소리를 더 듣기 위해서 지하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셨다. 헤어질 때 본 이영진 상무의 해맑은 얼굴과 싱그러운 냄새를 상기하며 마셨다.
[이영진 상무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겠지? 2층 서재에 올라가 혹시 와인이나 양주라도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혹시....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에 이영진 상무가 지금 자기처럼 자기를 생각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다.
일요일엔 잠만 잤다.
이영남이 왔다. 문만 열어주고 다시 잠을 잤다.
간간히 이영남의 드럼 치는 소리만 꿈결에서 들리는 듯했다.
얼마나 잤을까? 이상한 벌레가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이영남의 개갤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영남이 마당에 있는 마른풀을 가져와 잠자고 있는 이영남의 코를 간질은 것이었다.
“킥킥! 왜 자꾸 잠만 자?”
“요즘 피곤해서 그래. 울산도 갔다 왔고 기공식도 갔다 와서 그래.”
“돈은 20억 다 보냈어. 이자는 정확히 내일서부터 계산하면 돼. 3년물 국고채 이자주면 돼.”
강시혁은 후다닥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갔다.
통장엔 20억이 들어와 있었다. 몇 번 나누어서 들어왔다.
그런데 처음 5억이 입금되었을 때는 벌벌 떨리더니 오늘은 덤덤했다. 한번 면역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았다.
[이 돈을 가지고 내가 잠적한다면 어떻게 될까?]
강시혁은 평생 가도 이 20억이란 돈은 만져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대리 연봉 절반인 3천만 원을 매년 모은다고 해도 20년이 지나야 6억 밖에 모으지 못한다. 흙수저 월급쟁이들의 한계였다.
이렇게 되면 강남 진출은 시방삼세가 지나가도 안 될 것 같고 강북의 소형아파트를 겨우 장만할까 하는 돈이었다.
[20억 가지고 잠적할 수는 없지. 내 인생을 망칠 수는 없지. 한 200억이라도 된다면 모르지만!]
이영남이 편지 봉투를 하나 내밀며 말했다.
“형, 내일 이 편지 좀 부쳐줄래? 일본의 사카모토 쯔요시 씨에게 보내는 편지야. 내일 내가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래.”
“그러지. 요 위에 이태원 우체국이 있으니 슈퍼 갈 때 부치고 오지. 그런데 전화가 안 되나?”
“전화를 안 받아.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완전히 은둔 생활을 하나봐.”
“이 편지는 사카모토 씨 초정장인가?”
“그런 셈이지. 아마 내가 보내는 이 편지를 받으면 반가워 할 거야. 우리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음악적 동반자거든.”
“사카모토씨가 한국에 오면 이영진 상무도 인사소개 시켜줘야겠네.”
“인사? 영진이 누나도 사카모토 씨를 잘 알아. 영진 누나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카모토 씨도 미국에 있었거든.”
“그래?“
“영진이 누나는 사카모토 씨가 연주하는 클럽에 출근하다시피 했는데 뭘.”
“사카모토 씨가 한국에 오면 이 영빈관에서 연주회 한번 할까? 회장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헤헤. 실은 나도 그 생각을 했어. 사카모토 씨, 영진이 누나, 나, 그리고 형, 이렇게 넷이 임시 밴드라도 조직해 연주회를 할까 생각했어.”
“어어. 나는 안 돼. 나는 프로가 아니잖아.”
“반주만 하는 건데 뭘. 그럼 클럽에 있는 진형이 형도 오라고 해서 같이하면 되겠지.”
“아주 회장님을 초청하면 어떨까?”
“아버지를?”
“이번 크리스마스 날에 부모님을 위한 연주회를 마련했다고 하지. 큰어머니도 오리고 하시고, 금산 아줌마와 회장님 댁 가정부 아줌마들도 초청하면 더 좋겠지.”
“그건...... 내가 하면 안 될 거야. 영진이 누나가 말하면 아마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네.”
“나도 기회 있으면 영진 상무에게 말씀드려볼게.”
이영남은 다시 드럼을 치러가고 강시혁은 관리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장명건설의 주가 움직임을 보았다. 그리고 장명건설을 분석한 유튜브도 보았다.
유튜브에선 애널리스트라는 사람이 나와서 장명건설에 대한 주가 분석을 했다.
조용히 유튜브에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이 회사는 대주주가 삼방건설로 된 후 주가가 빠지기 만 했습니다. 장명건설 노조원들이 모회사인 삼방건설 수준의 급여를 요구하고 장기 농성중이라 주가가 바닥에서 횡보하고 있습니다. 투자하시는 분들은 농성이 끝나고 거래량이 늘어날 시점이면 매집해도 되겠습니다.]
유튜브에 광고가나오자 기다렸다가 다시 보았다.
[현재 주가가 12,000원에서 횡보하고 있는데 16,000원 오면 일단 매도하시고 손절은 1만 원 선이 무너지면 하시기 바랍니다.]
강시혁은 유튜브를 끄면서 말했다.
“제기랄! 이런 소리는 누군 못해? 애널리스트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뻔해! 너희들이 홍 사장 가압류 거는 것은 모르겠지? 그런 걸 잘 알아야지. 이 놈들아!“
강시혁은 1층과 2층으로 올라갔다.
피아노가 있는 방에 가서 피아노를 닦았다. 정말 내일이라도 이영진 상무가 피아노를 치러온다면 청결은 유지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술품이 보관된 방문을 열어보았다.
지난번에 신종화가 대작 두 점을 가져가서 그런지 방이 휑한 것 같았다.
“참, 신종화는 사표 쓴 것 어떻게 되었지? 관장이 사표 수리를 안 할 거라고 했지만 내가 바쁘다보니 확인을 못해봤네.”
그러다가 신종화가 가져간 미술품 대작을 생각하고 무언가 흠칫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낸 신종화가 대작 두 점을 들고 튀었다면?]
강시혁은 옴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