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기공식 갔다 오는 날 (2)
(130)
사회자가 다음 순서를 안내하였다.
“다음은 공사 개요에 대한 보고가 있겠습니다.”
화이바를 쓴 사람이 긴 막대기를 들고 나왔다. 건설 본부장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대형 상황판 앞에서 막대기를 집어가며 공사 현황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공사가 끝나면 근사한 생활관이 세워져 면학 분위가 한층 살아난다는 설명을 하였다.
이어서 커팅식이 있었다.
머리가 벗겨진 대학교 총장이 이영진 상무의 팔을 잡고 중앙으로 나오고 그 양옆으로 각 기관장들이 섰다.
서장은 왼쪽 중간 정도에 서있었다.
행사 도우미들이 쟁반에 담은 가위를 가져왔다.
강시혁은 선그라스를 쓴 채 언제나 이영진 상무의 삼보 떨어진 곳에서 경호를 했다.
사회자가 커팅을 외치자 일제히 앞에 있는 줄을 커팅 했다.
커팅을 하자 뒤에서 폭죽 소리가 나며 오색 연기가 솟아 올라왔다. 행사 진행요원들이 터트린 것이었다.
일반 참관자들이 박수를 쳤다. 강시혁도 이영진 상무 뒤에서 박수를 쳤다.
이어 사회자가 행사의 마지막 순서인 개토식이 있다고 하였다.
대학교 기획 행정처장이 살살 웃으며 이영진 상무에게 삽을 갖다 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건설 공사에서 돈을 가장 많이 낸 곳은 삼방그룹이었다. 그러니 삼방그룹의 딸에게 잘 보이려고 눈웃음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리가 없기 망정이지 꼬리라도 있다면 이영진 상무 앞에서 살살 꼬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개토식에 참석한 기관장들도 모두 삽을 들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대학교 총장과 이영진 상무가 삽에 흙을 떠서 뿌렸다.
이어서 다른 기관장들도 흙을 뿌렸다. 행사 진행요원들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기공식은 다 끝났다.
총장이 흰 장갑을 벗으며 다시 한 번 이영진 상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악수를 하였다.
기획 행정처장이 또 살살 웃으며 이영진 상무에게 접근했다.
“오신 분들을 위해서 조촐한 뷔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고맙지만 저는 이만 서울에 올라가야 합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습니다.”
“식사를 못하시고 올라가셔서 서운한데요?”
“저 없더라도 많이들 드세요.”
이영진 상무가 총장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들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강시혁은 쏜살같이 벤츠로 뛰어가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이영진 상무가 오자 정중히 뒷문을 열어주며 절도있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해주었다.
강시혁은 비상 깜박이를 넣었다. 그리고 서서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행사 진행요원들이 일제히 이영진 상무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영진 상무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벤츠가 대학 정문에 이르자 강시혁이 비상등을 껐다.
그리고 룸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이영진 상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서울로 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영진 상무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약속은 없어요. 뷔페식당에 가면 또 여러 기관장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번거로울 것 같아 핑계를 댄 것입니다. 서울엔 천천히 올라가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남들은 뷔페 먹는데 우리도 식사를 안 할 수가 없죠. 올라가시다가 동탄이나 용인 쯤에서 식사를 하고 올라가죠.“
“알겠습니다.”
“용인은 차가 밀릴지 모르니까 동탄으로 들어가세요. 신도시라 깨끗한 고급 식당들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기분이 좋았다. 잘 하면 이영진 상무와 겸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도 미술관 관장처럼 선민의식이 있다면 따로 따로 밥을 먹자고 할지 몰랐다.
보통 회장이나 사장을 모시는 기사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오야지가 손님들과 식사를 하면 같이 끼지 못했다. 홀에서 따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차가 안성 인터체인지를 지났다.
기공식 때는 해가 빛났지만 지금은 구름이 많이 끼어 날씨가 많이 흐려진 것 같았다.
강시혁이 운전을 하면서 물었다.
“동탄에 잘 아는 식당이 있습니까?”
“아는 식당은 없고.... 찾아봐야겠네요.”
“그럼 저기 졸음 운전자를 위한 간이 정류장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맛집 검색을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강시혁이 간이 정류장에 차를 세우고 스마트폰으로 동탄 맛집을 검색했다.
“유명한 갈비집과 한정식 집이 있다는데 어떨까요?”
“룸이 있는 집을 한번 검색해 보겠습니까? 호텔 식당도 좋습니다.”
“호텔 식당요?“
역시 이영진 상무는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긴 고급 밍크코트를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사람 많은 식당에 들어가면 모두 쳐다볼 것이다. 더구나 그가 이영진 상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많은 사람이 쳐다볼 것 같았다. 그러면 불편해 지는 것이다.
또 쳐다보는 사람 중에 또라이 같은 사람이 있어서 같이 사진이라도 찍자고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정말 난처한 것이 된다.
“호텔 식당이 있긴 한 것 같습니다. 동탄 스타즈 프리미어 호텔 20층에 고급 식당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정식이 아니고 참치회가 나오는 집 같습니다. 오마카세 맛집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좋아요. 그리 가세요.”
“룸이 있어 프라이빗한 모임에 좋은 장소란 소개도 있네요.”
“룸이 있으면 좋습니다. 일반인과 차단이 되니까요.”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를 태우고 동탄의 호텔로 갔다.
호텔은 크지 않지만 신축건물이라 깨끗해 보였다.
이영진 상무와 강시혁은 마스크를 쓴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강시혁이 룸을 달라고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이라 룸에 자리가 있었다.
이영진 상무가 룸에 앉았다. 강사혁은 앉지 않았다.
강시혁은 서서 메뉴판을 이영진 상무에게 주었다. 이영진 상무가 메뉴판을 훑어보고 말했다.
“점심을 먹는 거니까 생선회를 주문하기가 좀 그러네요. 런치세트로 하죠. 특치라시즈시가 있으니 이걸로 하죠.”
강시혁은 오마카세란 말은 들어보았는데 특치라시즈시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무언가 하고 눈만 껌벅였다.
그러다가 강시혁도 메뉴판을 보고 말했다.
“저는 스다치 우동으로 하겠습니다. 홀에서 식사를 하겠습니다.”
이 말에 이영진 상무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왜 따로 식사하시죠?”
“아무래도 상무님과 겸상하여 식사하기가......저는 운전기사 겸 경호원으로 따라온 사람입니다.”
“강 대리님은 기사가 아니에요. 비서실 대리잖아요.”
“그래도.....”
강시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영진 상무가 몸을 뒤로 저치며 말했다.
“저는 삼방그룹 대리들과 잘 어울려요. 해마다 신임 대리들은 용인 연수원에서 교육이 있는 것 아시죠? 그럼 저는 마지막 날 꼭 가서 함께 식사도 하고 배구도하고 캠프 화이어에 참석도 해요. 그런데 강 대리님은 자꾸 저를 멀리하려고 하시네요.”
“아무래도 상무님은 어려워서......”
“제가 어렵다니요? 나이로 보면 강 대리님 여동생 정도 하잖아요. 그리고 일본 출장 갔을 때도 같이 식사 많이 했잖아요.”
“그때는 박 변호사도 있고 통역도 있어서 자연스러웠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여기서 같이 식사를 하겠습니다.”
“그럼 특치라시즈시로 2인분 시키세요.”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룸을 나와 종업원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치라시즈시가 무언가 검색을 해보았다. 밥 위에 고급 초밥재료 같은 것을 흩뿌리듯이 올린 음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갓 지은 생선 솥밥이 나오고 사시미 같은 것도 나왔다.
종업원이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커플로 알았던 것 같았다.
“와인 주문은 안하시는지요?”
종업원 말에 이영진 상무는 맥주를 한 병 주문했다.
강시혁은 조심스럽게 밥을 먹었다. 이영진 상무도 오물거리며 잘도 먹었다. 두 청춘 남녀가 만나 같이 식사하면 즐겁기만 할 텐데 강시혁은 계속 긴장한 상태로 밥을 먹었다. 찌든 생활을 오래한 흙수저라 표시가 났다.
제 아무리 강시혁이 바벨 운동을 하여 가슴 근육을 키우고 머리를 깍두기 식으로 깎았지만 돈 많은 사람이나 권력 앞에는 자연히 움츠려들었다.
강시혁은 두 손으로 이영진 상무에게 맥주를 따라주었다.
“반잔만 할게요.”
“저는 운전을 하기 때문에 술은 안하겠습니다.”
“그럼 삼분의 일만 하세요.”
이영진 상무가 컵에 삼분의 일 정도 맥주를 강시혁에게 따라 주었다.
하지만 강시혁은 한모금만 마시고 더 이상 마시지는 않았다.
둘은 계속 말없이 밥만 먹었다.
신분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사람끼리 마주앉아 식사를 하니 그런 것 같았다. 이영진 상무도 특별하게 강시혁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는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실 때 이영진 상무가 법인카드를 강시혁에게 주면서 말했다.
“계산은 강 대리님이 하세요. 원래 이런 일은 비서실에서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싱긋 웃었다. 웃는 모습이 참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강시혁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계산하고 오겠습니다.”
식대는 10만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강시혁은 재벌들은 평상시 이렇게 먹는구나 하였다. 아니 여기는 수도권이라 이정도 하지만 서울의 고급 요리집은 아마 점심 한 끼에 둘이 먹으면 20만원이 나오는 것 아닌가 했다. 서울의 재벌들만 다니는 요리집은 어떤 집일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확실히 재벌 뒤를 따라다니면 이렇게 먹는 것도 잘 먹네.]
식사를 다하고 나올 때 세프가 강시혁에게 말했다.
“저녁에 한번 오시면 잘해드리겠습니다.”
사는 곳이 서울 이태원인 강시혁은 웃기만 했다.
셰프가 한마디 더했다.
“같이 오신 분이 아주 미인이시네요. 매스컴에서 본 듯한 얼굴인데 연예인이시죠?”
이 말에도 강시혁은 웃기만 했다.
하늘이 잿빛으로 변한걸 보니 빗방울이라도 떨어질 듯한 날씨였다.
강시혁은 퇴근시간 전에 서둘러 서울에 가야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차가 동탄에서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왔다.
서울이 가까워지니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신갈 부근에 오자 빗줄기가 굵어지고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차가 더 밀리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룸미러를 쳐다보며 말했다.
“댁으로 바로 가실 거죠? 상무님!”
“예, 집으로 바로 갈 거예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네요.”
“차가 좀 막히는 것 같은데 음악이라도 틀까요?”
“예, 좋아요. 강 대리님이 기타를 치신다는 이야기는 영남이 한테 들었어요.”
“이제 기초를 배우고 있습니다. 음악은 이영남 씨가 잘하죠. 저는 소질이 없습니다.”
“강 대리님은 다 좋은데 너무 겸손한 게 탈이에요.”
강시혁이 음악을 틀었다.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카멜의 Stationary Traveller 란 곡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카멜의 Stationary Traveller 이군요. 지금 분위기에 딱 맞는 곡이네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카멜의 기타 소리는 더욱 슬피 우는 소리를 냈다.
음악이 다 끝나서 강시혁이 다른 곡을 틀려고 하자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강 대리님은 왜 이혼하셨나요?”
“예? 저요? 돈 때문이죠.”
“돈이 없으면 그렇게 갈라서야 하는 건가요?”
“돈이 없으면 괴로우니까요. 당장도 괴롭고 또 장래에 대한 희망이 꺾이기 때문이겠죠.”
“빚이 많았던가요?”
“한 1억 정도 됐습니다.”
“많은 금액은 아니군요.“
“서민에겐 많은 돈이었죠.”
“부인을.... 사랑하셨었나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상무님은 홍 사장님을 사랑하셨는지요?”
이 말에 이영진 상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강요에 만난 지 며칠 만에 애정 없이 결혼을 했으니까요.“
“저는 강요에 의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지요? 집안의 강요가 아니라면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같은 직장에서 술 한 잔 먹다보니 나도 모르게 일탈(逸脫)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도 찼기 때문에 결혼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의 연애기간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좋아하는 여성이 나타난다면 결혼을 하시겠군요.”
“5년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5년 후요? 그건 또 왜죠?”
“빚을 갚아야 하니까요.”
“세상에!”
“제가 신용회복위원회 위원한테 들은 것이 있습니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들의 70% 이상은 1억 미만의 빚으로 그렇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평생 그 1억 미만의 빚을 갚지 못해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다고 들었습니다.”
강시혁은 이 말을 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당신에게는 이해가 안가겠지요. 1억이라면 당신들에게는 껌 값이겠지만 우리들 서민에겐 아니랍니다. 평생을 갚아야 하는 돈 일지도 모른답니다.]
이영진 상무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힘내세요. 강 대리님은 곧 빚을 갚고 사랑하는 좋은 여자가 생길 거예요.”
“상무님도 훌륭한 배우자가 나타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고마워요. 강 대리님.“
비는 계속 차창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