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가압류 철회 (3)
(125)
강시혁이 유길준 대리를 만났다. 명함을 받기 위해서였다.
유길준 대리가 인쇄된 명함 두통을 내밀었다.
“200장입니다. 나중에 떨어지면 이야기 하세요.”
강시혁이 새로 나온 명함을 보았다.
삼방그룹 로고가 뚜렷하게 박혀있었고 비서실 대리 강시혁의 이름도 뚜렷했다.
정직원에다가 대리 직함을 달았으니 이제 동창들 세계에서 명함을 뿌릴 만도 하게 되었다.
강시혁은 좋아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거두어들였다.
[표정관리를 해야지. 함부로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안 되겠지.]
유길준 대리는 사원증까지 주었다. 목에 걸고 다니는 사원증이었다.
“본사 건물에 들어올 때나 구내식당 이용할 때나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비서실 확대간부회의 참석 때는 항상 착용해야 합니다.”
강시혁이 꿈에 그리던 사원증이었다. 이걸 목에 걸고 인증샷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다.
강시혁은 삼방그룹 비서실 내에서 공채를 통하여 들어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사원증에 대한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좀 든 여직원이 지나가다가 강시혁을 발견했다. 전에 한번 인사를 했던 여직원이었다.
“어머! 강 대리님 들어오셨네. 날짜 안 잡으실 거예요?”
“예? 자, 잡아야지요.”
“날짜 안 잡으면 우리가 영빈관 쳐들어간다고 했죠? 이태원에 계시니까 이태원 쪽에 좋은 데가 많잖아요.”
“그, 그러지요.”
“삼방전자 비서로 있는 최하나씨 알죠?”
“최하나씨요?”
[그 인공미인을 말하는 거구나!]
“날짜 잡으면 최하나씨도 참석한다고 했어요. 우리 비서실 소속은 아니지만 걔도 강 대리님에게 관심이 많나 봐요.”
[나에게 관심이 많다고? 환장하겠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앞에 있는 여직원이나 삼방전자의 여비서는 모두 스카이 대학 출신에 어학도 뛰어난 사람들이다. 인물도 좋았고 힘들다는 공채 시험을 통하여 들어온 인재들이다.
중소기업에서 오다가다 만났던 심은혜와는 가방끈에서부터 큰 차이가 났다.
이런 여자들이 강시혁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황송해야 할 텐데 강시혁은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누가 관심을 가지면 부담만 되고 귀찮기만 하였다.
강시혁은 그냥 어색한 미소만 날려주었다.
강시혁은 비서실에 들어왔으니 임창영 과장과 최 이사를 만나볼까 하였다.
임창영 과장은 외근중이라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최 이사는 손님이 와서 이야기 중이었다. 그래서 사원증과 명함만 챙겨서 법무팀으로 갔다.
법무팀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 법무팀 직원들이 또 어디서 왔냐고 꼬치꼬치 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유길준 대리가 준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이 빌딩 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원증을 걸고 다니므로 자기도 그렇게 했다.
법무팀은 직원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일하는 모습으로 보아 얌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 같기도 하였다.
맨 끝에 앉은 직원에게 물었다.
“팀장님 계십니까?”
“네, 들어가 보세요.”
직원은 강시혁이 목에 건 사원증을 보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팀장은 금테 안경을 낀 사람으로 상당히 젊어보였다.
팀장이면 부장 급 정도로 알았는데 강시혁보다 불과 몇 살 많지 않은 과장급 정도로 보였다.
[변호사 출신인 것 같네.]
강시혁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팀장님이십니까? 비서실 강시혁 대리입니다.”
“당신이 강시혁 씨요?”
팀장은 대뜸 강시혁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자기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강시혁입니다.”
“당신이 일본 야쿠자들과 싸웠다는 그 유명한 강 반장, 아니 강시혁 대리요?”
“싸운 건 맞지만 유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예? 말씀을 듣다니요?”
“서초동 법무법인의 박일규 변호사와 내가 사법연수원 동기요.”
“아, 그렇습니까?”
박 변호사는 바로 강시혁과 같이 이혼 협의 때문에 일본에 출장을 갔던 사람이었다.
박 변호사가 아마 자기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시혁은 박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가 대리 운전을 할 때였다.
그때 강남의 여수횟집이라는 곳에서 의정부 녹양동을 거쳐 백석읍까지 대리운전을 해주었었다.
강시혁은 박 변호사가 자기 또래인줄 알았다.
하지만 박 변호사는 강시혁보다 서너 살 많았다. 박 변호사는 교수 아들이고 서울대를 나와 일찍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런지 얼굴이 동안이었다. 팀장 역시 동안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 팀장은 나보다 나이가 서너 살 밖에 많지 않은 것 같네. 그런데 대 그룹의 막강한 법무팀장이라니 더럽게 빨리 출세했네.]
“이영진 상무님이 이 서류를 팀장님께 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일본 가와라 흥업의 가압류 철회 확인서입니다.”
법무팀장이 서류를 대충보고 자기 책상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거 가압류 되지도 않아요. 언론플레이나 하면서 삼방그룹 이미지에 고춧가루나 뿌리겠다는 심사지.”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A일보사 회장님과 사장님의 확인서명도 옆에 받아 놨습니다.”
“그건 잘했어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명함이나 있으면 한 장 주고가요.”
강시혁은 유길준 대리가 준 명함 속에서 한 장을 꺼내 법무팀장에게 주었다.
강시혁이 대리 명함을 첫 번째로 준 사람이 법무팀장이었다.
법무팀장도 자기 명함을 강시혁에게 주었다. 명함엔 법무팀장이라는 직위 밑에 국제 변호사라는 글씨도 인쇄되어 있었다. 국제 변호사인 것 같았다.
강시혁이 법무팀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엔 사람들이 꽉 찼다. 점심시간이 되어 지하식당으로 가는 직원들이었다.
강시혁은 1층 로비에서 내렸다.
강시혁은 사원증을 받았기 때문에 직원 식당을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1층에서 내렸다.
복잡하게 먹느니 이태원에 가서 자장면이나 한 그룻 사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에서 유길준 대리를 만났다.
“유 대리님. 식사 안하십니까?”
“최 이사님 모시고 초밥집 가기로 했습니다. 구내식당은 이제 질려서.....같이 갈까요?”
“아닙니다. 저는 가봐야 됩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법무팀장은 만났어요?”
“만났습니다. 상당히 젊은 분이던데요?”
“뒷 배경 좋고 엘리트라 젊은 나이에 별을 단 사람입니다.”
“그래요?”
별이면 이사급이란 이야기였다.
“서울대 재학 중에 사법고시 합격하고 미국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전직 국무총리인 K씨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배경이라면 젊은 나이에 별을 달만도 하지.]
아무튼 그렇게 배경 좋고 실력 좋은 사람에게 자기의 첫 번째 명함을 주었으니 무언가 재수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수 나쁘게 비서실 최 이사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어? 당신 여기 어째 들어왔어?”
“이영진 상무님 심부름으로 법무팀장에게 서류 하나 주고 가는 길입니다.”
“법무팀장? 그 싸가지 없는 시키.”
최 이사가 법무팀장을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하는걸 보니 마치 문화재단의 설운동 대리와 큐레이터 신종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조직이건 사이가 나쁜 천적들은 있는 모양이었다.
최 이사가 빌딩 출입구 회전문이 있는 쪽으로 가며 말했다.
“강 대리! 당신도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아닙니다. 저는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합니다.”
“그래?”
최 이사는 특별히 강시혁을 잡지도 않았다.
강시혁이 이태원 역에 도착하였다.
역 근방에서 자장면을 하나 사먹고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오니까 살 것 같았다.
혼자 책상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커피를 마셨다.
책상위에 올려 진 명함과 사원증을 보고 자랑을 하고 싶어졌다.
동창들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엄마에게나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 나야!”
“시혁이구나. 잘 있지? 가끔 전화 해다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엄마, 나 삼방그룹 대리 됐어요.”
“뭐라고? 대리? 하하. 들어간 지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됐구나.”
“이제 연봉 6천은 받을 거야. 엄마 아빠 용돈은 빚 다 갚고 보내드릴게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우린 잘 있으니까 너나 착실히 모아라.”
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심은혜는 가버렸지만 그래도 기쁨을 함께할 가족이 있어서 좋았다.
강시혁은 괜히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얼른 전화를 끊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 또 연락할게.“
“그래, 그래. 거기 과장, 부장들 말 잘 듣고 착실히 근무해라.”
강시혁은 오전에 사놓은 주식들이 어떻게 움직이나 궁금했다.
증권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삼방그룹의 사논 주식 10종목은 올라 간 것도 있고 내려간 것도 있었다. 그런데 종목이 많다보니 등락율 평균은 종합주가 지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은 보합이었다.
[여러 종목 사놓으니 평균은 종합 주가지수와 비슷하네. 지수만 따라 등락한다면 재미가 없겠지.]
오후에 신종화가 자기 차인 기아 K7을 타고 왔다.
이 여자는 미인은 아니지만 언제나 옷을 세련되게 입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싼 악세사리를 목에 걸친 건 아니었다. 노점상에서 파는 싸구려를 가지고 연출을 잘했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 안목이 남다른 것 같았다.
신종화는 큐레이터로는 손색이 없지만 너무 날카로운 면이 있어 탈이었다.
완벽을 추구하다보니 주위와 늘 마찰이 있었다. 강시혁처럼 모든 걸 받아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강시혁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은 아주 화사해 보이네요.”
“강 대리님도 얼굴 좋아졌어요. 역시 사람은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전에 내가 대리 운전을 하고 다닐 때 어떤 손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당신은 운전을 잘하니 대리기사 직업을 잘 찾은 것 같다고 했어요.”
“그건 칭찬이 아니군요. 손님의 우월의식 때문이죠. 그래봤자 당신은 돈이나 받고 내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당신을 부리는 사람이다 라는 우월의식 말입니다.”
“그런가요?”
“그 손님은 특정 대상에 대하여 자신이 더 뛰어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만족을 얻으려는 부류입니다. 그런 사람은 제 주변에도 있어요.”
“아휴, 복잡하네요. 나는 그런 것 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커피 한잔 타드리죠.”
“미술품 차에 싣고 한잔 하죠.”
강시혁이 신종화를 2층 미술품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환기가 잘되어 쾌쾌한 냄새도 없네요. 강 대리님이 관리를 잘하시는 것 같네요.”
“특별히 하는 건 없습니다.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공기를 순환시켜주는 일 외에는 하는 것 없습니다.”
“하찮은 일이라도 날마다 하는 게 중요하죠.”
그런데 반출하는 미술품이 대작이라 여자 혼자는 힘들 것 같았다.
강시혁이 들어줄 수도 없었다. 한손에 붕대를 감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들죠. 제가 오른손은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둘이 미술품을 같이 들고 날랐다.
미술품을 나르고 강시혁이 커피를 타주었다.
그냥 보낼까 하다가 어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을 다쳐서 오늘 미술품을 같이 들었지만 다음엔 내가 혼자 날라드리죠. 다른 건 내가 큐레이터님을 못 따라가지만 신체적 힘은 더 세니까요.”
커피를 마시면서 신종화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니요?”
“저 오늘 사표 냈어요.”
“예엣?”
“설운동 대리와 대판 싸웠어요. 더는 저도 힘들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아니, 미술관에서 큐레이터가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안 됩니다!“
“설운동 대리가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헛소문이라니요?”
“모른 척 하지 마세요. 그러면 강 대리님도 미워요.”
“정말 저는 모르겠는데요.”
신종화가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설운동 대리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내가 XX장관 애인이라고 하죠. 강 대리님도 들었을 거예요.”
강시혁이 이 소문을 설운동 대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나이가 차이가 많아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설 대리는 분명히 나이 차이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면서 푸틴 대통령 애인인 알리나 카바예바는 서른한 살 차이라고 했었다.
“아, 들은 것 같아요.”
“거 봐요.”
“하지만 그런 황당한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큐레이터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세요.”
“제가 XX장관에게 접근한건 사실이에요. 그분 아버님이 수도권에 있는 대학교 재단 이사장이거든요. 그래서 제 남친 취업을 부탁했던 건 사실이에요.”
“남친요?”
“미술대학 1년 선배에요. 그 선배도 강 대리님처럼 흙수저라 돈은 없는 사람이에요. 낮에 시간강사를 하며 밤에 대리운전해요.”
“예? 대리운전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