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121화 (121/199)

121화 거물과의 맞장 (5)

(121)

수원시내는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차들이 많이 붐볐다.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부의금 봉투가 잘 있나 꺼내 보았다. 봉투는 잘 있었다. 봉투가 꽤 두툼한 것을 보니 돈 백만 원은 들어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런데 봉투에 쓴 부의(賻儀)라는 글자와 뒷면의 삼방그룹 회장 이건용이라고 쓴 글씨는 누가 썼는지 굉장히 잘 썼다.

붓 펜으로 썼는데 정말 서예가가 쓴 것 같았다.

[비서실엔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 비서실은 다양한 인재들이 모인 곳이 분명해.]

동수원 병원은 동수원 사거리 근방에 있었다.

생각보다는 큰 병원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삼방화학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많았다.

모두 생산직의 반장이나 조장, 아니면 부, 차장들인지 나이들도 많아보였다. 강시혁처럼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은 많지 않아보였다.

영정사진을 보니 할머니가 아니라 중년부인이라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은 국화꽃 송이를 영전에 바치고 묵념을 하였다. 상주가 고등학생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몸이 건장한 남자가 노조위원장임을 직감했다.

노조위원장은 5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다부진 체격에 머리가 스포츠머리였다.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큰형님 소리를 들으면 딱 맞는 사람처럼 생겼다.

이 사람은 수천 명의 노조원들이 추대한 위원장이니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부인이 해로하지 못하고 병사를 했으니 사람팔자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강시혁이 분향을 마치고 상주인 고등학생과 맞절을 하였다.

강시혁이 고등학생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고생이 많구나.“

노조위원장이 강시혁을 예의 주시했다.

양복을 쪽 빼입은 젊은 남자가 왔으니 어디서 온 사람인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애통해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조위원장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삼방그룹 비서실 직원입니다. 회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헉! 그러십니까?“

그러면서 노조위원장은 강시혁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아주었다.

오랜 노동생활을 해서 그런지 손을 쥐는 장력이 대단했다. 강시혁의 다친 손을 보고 말했다.

“손을 다치셨군요. 이리 오십시오.“

그러면서 노조위원장은 강시혁의 팔을 잡고 문상객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

강시혁이 얼른 봉투를 꺼냈다.

“회장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신 부의금입니다.“

“헉! 고맙습니다.”

노조위원장은 얼른 봉투를 받고 좌우로 눈동자를 한번 굴려보았다.

그리고 재빨리 봉투를 자기 품속에 넣었다.

접수를 받는 사람 앞을 지나는데 노조위원장이 말했다.

“방명록 작성을 안 하셨으면 해 주시죠.”

강시혁이 방명록에 자기 이름을 쓸까 하다가 ‘삼방그룹 회장 이건용’ 이라고 썼다.

접수대에 앉아있던 사람이 이 글씨를 보고 크게 놀랐다.

뒤에 있던 노조위원장이 접수를 받는 젊은 사람에게 말했다.

“이 분은 회장님께서 보내신 비서실 직원이셔.”

노조위원장의 안내로 문상객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왔다.

문상객들은 홀 안에 거의 꽉 차다 싶었다. 삼방화학의 노조 간부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위원장은 회사 제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강시혁을 안내했다.

“야, 야. 자리들 좀 비켜줘. 회장님께서 보내신 비서실 직원이야.”

앉아있던 노조 간부들이 벌떡 일어났다.

벌써 술들이 들어가서 그런지 얼굴들이 불그레하였다. 그리고 중년의 아재들이라 그런지 아랫배가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노조위원장이 일어선 사람을 차례로 소개했다.

“이 사람은 삼방화학 노조의 쟁의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법규부장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후생부장이고, 이 사람은.....”

노조위원장은 확실히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노조 간부들에게 강시혁을 소개하는 것은 속셈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회장이 자기를 알아주기 때문에 이렇게 비서실 직원을 보낸 것 아니냐 하며 폼을 잡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자식들아 내가 이런 사람이야. 너희들 하고는 달라!’ 꼭 이러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앉으시죠.”

회사 제복을 입은 중년의 노조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하시죠.”

상복을 입은 아줌마들이 강시혁이 중요한 손님인줄 알고 육개장과 안주 같은 것을 가져왔다. 노조위원장이 우악스런 손으로 소주병을 따며 말했다.

“‘멀리서 오셨으니 한잔 하시죠.“

“자동차 운전 때문에 안 됩니다. 손도 이렇게 다쳤고요.”

“그럼 반잔만 하시죠.”

강시혁은 술을 받고 마시지는 않았다.

그런데 노조위원장은 소주를 작은 술잔이 아닌 맥주잔에 따르더니 벌컥대고 냉수 마시듯이 마셨다.

[와, 이 정도 실력이니 노조위원장 해먹지!]

강시혁은 노조위원장의 술 실력에 감탄만 하였다.

강시혁이 육개장을 먹으며 말했다.

“저는 위원장님께서 상을 당하셨다고 해서 위원장님 부모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부인이 돌아가셨네요. 아드님이 고등학생인 것 같은데...... 참, 안타깝네요.“

“에효, 다 사람의 팔자죠.”

그러면서 위원장은 또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놓고 벌컥대며 마셨다.

“문상객들이 계속 올 텐데 이렇게 술 드셔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소주 한 박스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한 박스? 와, 이 아저씨 확실히 내공이 장난이 아니네.]

“삼방화학은 위원장님이 노조원들 관리를 잘 하셔서 분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거 하나만큼은 내가 자랑하고 싶죠.”

“그런데 삼방건설 자회사인 장명건설은 장기간 노사분규로 윗분들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걔들은 노노간에 싸움이 심해서 그게 지랄입니다.”

“예? 노노간의 싸움이라뇨?”

“온건파인 전임 노조위원장과 강경파인 신임 노조위원장 간에 싸움이 치열하죠. 그래서 강경파들이 뭔가 보여주려고 저렇게 장기농성인데 그게 되겠습니까?”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을 내려오게 하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은 두 가지죠. 월급을 강경파들이 요구하는 대로 대폭 올려주거나 아니면 온건파들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해야 되겠죠. 지금 장명건설은 매출도 감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매출이 감소하는데 저렇게 농성을 하는군요.”

“우리는 매출이 감소하면 절대 농성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놈들이 나온다면 나한데 죽죠.”

“역시 삼방화학은 위원장님의 리더쉽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장명건설 이 자식들은 누울 자리를 보고 이불을 펴야하는데 막무가내로 저 지랄들을 하니 한심합니다. 온건파인 전임 노조위원장에게 술이라도 사주세요.

“술이요?”

[전임 노조 위원장에게 활동비라도 조금 주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강경파 애들을 온건 쪽으로 넘어오게 하세요. 그러면 타워크레인 꼭대기에서 내려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내가 장담합니다. 지금 날씨도 추워지는데 그 꼭대기 위에서 무슨 지랄들인지. 참, 내 원.”

그러면서 노조위원장은 맥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런데 소주병이 비었는지 소주가 나오지 않았다. 위원장은 옆에 앉아서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쟁의부장 엉덩이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야, 쟁의부장! 너 저기 가서 술 한 병 더 가져와라.”

“예, 형님!”

쟁의부장이라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걸 보니 꼭 일본 야쿠자 야마구찌구미의 오야붕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시혁이 식사를 다 하고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드님이 참 잘생겨서 이다음에 큰 인물이 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놈보고 살아야죠. 이젠.“

강시혁이 인사를 하고 밖을 나오는데 노조위원장이 따라 나왔다.

그 뒤로 몇 명 노조 간부들도 따라 나왔다.

“나오지 마세요. 문상객들이 계속 오는데.”

“아아, 회장님이 보내신 분인데 가는 건 봐야죠. 또 우리도 담배 한 대 피우고요.”

그런데 노조위원장은 분명히 소주를 금방 한 병 반이나 비운 것 같은데 끄떡없었다.

아니, 더 팔팔한 것 같았다. 태생적으로 힘이 장사인 것 같았다.

[정말 젊었을 땐 한가락 했을 것 같네. 팔씨름을 해도 젊은 내가 지겠는데?]

강시혁이 벤츠 마이바흐 위에 올라갔다.

이럴 땐 역시 고급 차량이 폼이 났다. 회장님을 대신해서 나온 사람이 털털거리는 경차나 타고 왔으면 체면이 서지 않을 뻔하였다.

강시혁은 역시 벤츠를 끌고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실 최 이사라는 사람도 벤츠를 가져가라고 한걸 보니 내공이 보통 아닌 것 같았다.

비서실 최 이사나 삼방화학의 노조위원장이나 모두 강호의 고수들인 것 같았다.

강시혁이 운전하는 벤츠가 서서히 움직이자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이 칼같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해주었다.

이제는 강시혁이 야마구찌 구미의 오야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시혁은 운전을 하고 가면서 대리 명함을 안 가져오길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마 삼방화학 노조 간부들은 강시혁이 적어도 비서실 과장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으리라.

강시혁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노조위원장이 한 소리를 되새겨보았다.

[장명건설 노사분규는 노노간의 싸움이라고 했지?]

강시혁은 정말 이영남이 돈을 빌려준다면 이번에 장명건설 주식을 사보기로 했다.

가와라 흥업이 장명건설 홍 사장 지분을 가압류 할 때가 돈을 지르는 시기로 보았다.

[해 봐야지. 이렇게 살수는 없어. 어차피 인생은 윷놀이판 같아서 ‘모’ 아니면 ‘도’가 아닌가.]

“그런데 정말 이영남이 돈을 빌려줄까?”

돈을 빌려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남은 강시혁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태원 건달들에게 투자 압력을 받아왔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현금 10억과 한남동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담보로 융자받은 10억을 투자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재벌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영남도 계산은 빠른 놈이라 얼른 투자를 안 하고 미적거렸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강시혁을 만났다.

돈이 통장에 없다면 돈을 빌려주지 않겠지만 어차피 투자하려고 준비했던 돈이 있다면 빌려줄 것 같기도 하였다.

더구나 투자에 대하여는 간섭하지 않고 국고채 3년물 금리 이자만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음날 아침 이영남이 영빈관으로 왔다.

이영남은 일본 교바시 보디가드로 보낸 은행 송금영수증을 들고 왔다.

강시혁은 얼른 영수증을 스캔 떠서 이메일로 교바시 보디가드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이다 유키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삼방그룹 강시혁입니다.”

“오, 강 상!”

“어제 가와라 흥업 기업조사 수수료는 보냈습니다. 송금자는 윤진형이라는 개인 이름으로 보냈습니다.”

“알겠어요. 바로 조사 착수하죠. 그런데 그거 생각해 봤어요?”

“그거라니요?”

“강 상이 교바시 보디가드에 와서 일하는 것 말이요.”

“아 예, 그거는 한국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안 될 것 같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도 계시고 또 회사에서도 다른 중책을 맡아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쉽군. 강 상 같은 열정과 몸이 빠른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요즘 일본의 젊은 놈들은 패기가 없고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같은 놈들만 많아져서 걱정이요.”

“스카우트 제의는 고마우신 말씀이었지만 함께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 수 없지. 일단 가와라 흥업에 대한 조사는 확실히 하고 알려주죠.”

“감사합니다. 사장님.“

전화를 끊고 나자 이영남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 이이다 유키 사장이 형을 스카우트 제의 했었구나.”

“월급을 여기서 받는 것보다 두배 준다고 했지만 갈수 있나. 말도 잘 안통하고 음식도 다를 텐데.”

“잘했어. 형. 여기서 있다 보면 그까짓 월급 두 배가 문제 아닐 거야.”

“그으래?”

“아, 그리고 형! 통장 확인 안 해봤지? 오늘 아침에 일단 5억 원을 보냈어. 계속 분할해서 돈이 들어갈 거야.”

“뭐라고? 정말?”

강시혁이 얼른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은행 조회를 해보았다.

정말 5억이 강시혁의 통장에 요술처럼 들어와 있었다.

강시혁은 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찌질이처럼 또 떨렸다.

[아아, 이 중에서 1억만 있었으면 내 인생을 옥죄었던 빚을 몽땅 갚았을 텐데. 그리고 심은혜와의 결혼생활도 깨지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변상철이 왔다.

변상철은 오늘 말끔한 양복 정장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왔다. 머리도 깍두기 머리를 하고 왔다.

“멋있다!”

“형이 정장을 하고 거물과 맞장을 뜨러 가는데 나도 정장 안할 수가 있나. 그래서 머리까지 형하고 비슷하게 하고 왔지.”

이영남이 킥킥대고 웃었다.

“둘이 같이 다니면 영락없는 조폭이네!”

“삼방그룹 비서실 대리를 감히 조폭에 비교하다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