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거물과의 맞장 (4)
(120)
점심을 먹고 이영남은 드럼을 치러갔다.
강시혁은 재활용 쓰레기봉투가 떨어진 것 같아서 마트에 가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다.
문화재단의 설운동 대리였다.
“강 대리요? 나 설운동이요.”
“아 예, 설 대리님. 안녕하셨습니까?”
강시혁은 설운동이 선임 대리이므로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지금 거기 보관된 벤츠는 삼방전기 소속이지만 카니발은 문화재단 소속인 것 알고 있죠?”
“그렇습니다. 카니발은 문화재단 소속입니다.”
“그 차는 이쪽에서 관리하겠습니다. 이쪽에서 관리한다고 관장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차를 가지러 오셔야겠네요.”
“내가 내일 영빈관으로 가죠.”
내일은 변상철과 함께 A일보 홍 회장과 맞장 뜨러 가는 날이었다.
“내일은 내가 영빈관에 없습니다. 비서실 일로 어딜 가야합니다. 모레 어떻겠습니까?”
“모레요? 할 수 없군. 모레 가지요.”
그러면서 설운동 대리는 전화를 끊었다.
[카니발 가져가면 설 대리가 주말에 자주 이용하겠군. 낚시터 깨나 다니게 생겼네.]
또 전화가 왔다. 010으로 시작되는 전화번호가 뜨는 것을 보니 개인전화였다.
사무실 전화번호가 아닌 것을 보니 광고성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요즘 부쩍 기획부동산의 광고성 전화나 여론 조사기관의 전화가 자주 와서 사무실용 전화번호는 잘 안 받고 있는 중이었다.
“강시혁 대리요?”
굵은 중년 남성의 전화였다.
“예, 그렇습니다. 어디십니까?”
“나 비서실 최 이사요. 거기 벤츠가 보관되어있지요?”
“그렇습니다. 벤츠와 카니발이 있었는데 카니발은 문화재단 소속이라 문화재단에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손가락을 다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운전할 수 있겠소?”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비서실로 지금 들어오시오. 어디 좀 갈 데가 있고 업무협의도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지하철 타고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니요. 벤츠를 끌고 오시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러면 그렇지. 비서실에서 날 한가하게 놔두지 않겠지. 그럼 내가 나가면서 문을 잠가야하는데 이영남이 드럼을 치고 있으니...... 별수 없이 나가라고 해야 되겠네.]
강시혁이 드럼을 열심히 치고 있는 이영남에게 갔다.
“리틀 브라운! 본사 비서실에서 급히 날 부르네. 지금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그럼 나도 나가야겠네. 문을 잠궈야 하니까.”
“대문 잠금장치 비밀번호 알려줄까?”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이영남은 자기 시계를 보았다.
억대가 넘어가는 명품 손목시계가 번쩍 하고 빛을 뿜었다.
[저런 걸 차고 다니니까 양아치 같은 놈들이 자꾸 따라붙지.]
“지금 2시밖에 안 되었네. 그럼 커피숍에 가서 기다릴까? 기타 치는 진형이 형이 오후 3시쯤에나 출근할 텐데.”
“미안해. 리틀 브라운.”
“아니야. 형이 미안할 것 없지.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인데!”
“대문 비밀번호 필요 없어?”
“필요 없어.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면 특수 관계인의 업무간섭이야.”
“정말 미안하네.”
“형, 내가 20억 보내준 걸로 돈 벌면 이태원 역 앞에 사무실 하나 얻어. 커피숍에 앉아있으면 나를 알아보고 집적거리는 놈들이 많아서......”
“돈 벌면 사무실뿐이겠어? 집이라도 사달라면 사주지.”
그러다가 강시혁은 입을 막았다.
집의 기준은 강시혁과 이영남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10억짜리 집만 사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겠지만 이영남은 아니었다. 100억짜리 정도는 사줘야 만족할 것 같았다.
이영남이 지금 살고 있는 한남동 나인원 아파트만 해도 90억이 넘어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영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집은 있으니까 필요 없어.”
강시혁이 본사로 갔다.
벤츠를 지하 주차장에 주차시켰다. 기사 대기실에 들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기는 이제 기사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운전직이 아니고 관리직이기 때문이었다.
비서실 최 이사 라는 사람을 만났다.
어제 비서실 직원들과 인사할 때 최 이사도 인사를 했을 텐데 전혀 얼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40대 후반의 안경 낀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이 불러서 왔습니다.”
“오, 왔어요? 의자에 앉아요.”
강시혁이 의자에 앉았다.
최 이사라는 사람이 강시혁의 손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 괜찮아요? 벤츠 몰고 왔나요?”
“몰고 왔습니다.”
“그럼 차를 몰고 나 대신 수원의 동수원 병원을 다녀와야겠어요.”
“예? 동수원 병원요?”
“거기 장례식장에 가면 삼방화학 노조위원장 부인의 장례식장이 있을 겁니다.”
“예? 노조위원장 부인이 돌아가셨습니까?”
“암으로 죽었다고 하네요. 이 부의금 봉투를 전하고 오세요. 회장님이 보내시는 부의금입니다.”
[흠. 노조위원장 정도 되니까 회장님도 챙기는구나. 회장들이 과장이나 부장 같은 중간관리자는 챙기지 않아도 노조위원장은 챙기는구나. 나도 생산직으로 들어갔다가 노조운동이나 할 걸 잘못했나?]
이사가 다리를 꼰 채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회장님을 대신해서 내가 가야하는데 내가 아주 바쁜 일이 있어요. 그래서 대신 가달라 이 말이요. 조화는 보냈습니다.”
“예......”
“여기 비서실엔 나 말고 부장이나 차장급들도 있지만 당신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영빈관엔 벤츠가 있으니 그걸 끌고 가면 정말 회장님을 대신해서 온 줄로 아니까 그렇게 해요.”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봉투는 부의금 함에 넣지 말고 노조위원장을 만나 직접 전달하고 와요. 비서실 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회장님이 보내서 왔다고 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강 대리가 문화재단에 있다가 비서실로 왔으니 앞으로 우리도 강 대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또 일일 업무일지 쓰라는 소리가 나오겠군.]
이사는 전화로 유길준 대리를 불렀다.
유길준 대리가 이사에게 왔다. 강시혁이 유길준 대리에게 눈인사를 해주었다.
“유 대리! 동수원 병원 장례식장은 강 대리가 갔다 오기로 했네.”
“아, 그렇습니까?”
“영빈관 벤츠는 강 대리가 관리하니까 벤츠를 몰고 가서 회장님 부의금 봉투를 전달하면 폼이 더 나겠지. 안 그런가? 유 대리?”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영빈관 벤츠는 차량소속이 삼방전자지만 비서실에서 관리하니까 차량유지비는 우리가 지원해줘. 복리후생비도 지원해 주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복리후생비? 그럼 월급 외에 점심 값이라도 지원해 주겠다는 건가?]
“그리고 강 대리는 비서실 소속이지만 영빈관 파견 근무자니까 업무일지는 작성해야겠지. 그래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일일 업무일지를 쓰라고 하면 그것도 부담이니까 주간 업무보고라도 보내도록 해야겠네.”
“예, 좋습니다.”
강시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일일 업무보고는 솔직히 말해 부담이 되지만 주간 업무보고는 할 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비서실은 문화재단보다 융통성이 있는 것 같았다.
최 이사가 강시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봐요, 강 대리!”
“예, 이사님.”
그럼 유길준 대리에게 주간 업무보고 양식 받아가고 동수원병원에 가 봐요. 내일 출상이라고 하니까 오늘저녁에 꼭 가야돼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강시혁이 유길준 대리 책상이 있는 곳으로 왔다.
넓은 사무실에 수많은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와이셔츠만 입은 직원들은 컴퓨터에 코를 박고 모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비서실의 이 많은 직원들은 무슨 일을 할까?]
유길준 대리가 주간 업무보고 양식 한 장을 출력해 주면서 말했다.
“참고로 보시고 이메일로도 양식 보내드리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최 이사는 비선 조직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꼭 업무보고를 하라고 하네. 누가 좀생이 아니라고 할까봐.”
이 말에 강시혁은 미소만 지었다.
“그래도 업무보고는 해 드려야겠죠.“
“주유비는 영수증 모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줘요. 나한테 보내지 말고 영수증을 이렇게 출금전표 뒤에 붙여서 경리부로 보내줘요.”
그러면서 유 대리는 출금전표에 계정과목과 금액을 쓰고 뒤에 영수증 붙인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자기가 중소기업인 아영테크에서 근무할 때 해본 것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복리후생비는 중식대가 나가는데 일일 8천원 계산하면 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무식당에 가서 영수증 구해 보내면 됩니다.”
“그럼 월 20일 근무기준 16만원인가요?”
“그렇습니다. 작년엔 일일 7,500원이었는데 좀 올랐습니다. 그리고 접대비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사전에 결재를 받고 집행해야 됩니다. 접대비만큼은 사후 영수증을 저한테 보내주셔야 합니다. 좀생이 저 최 이사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특별히 영업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 접대비 발생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강시혁은 접대비 이야기가 나오자 기분이 좋았다.
문화재단 잡급직 소속으로 있을 땐 접대비를 쓸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 비서실 대리가 되니까 접대비 지출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 가보세요.”
“알겠습니다.”
“최 이사는 회장님 심부름이면 자기가 가지 꼭 남을 시키네.”
“바쁜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쁘긴 개뿔! 피부미용 받으러 가려는 거겠지!”
강시혁은 픽 웃었다. 어디가나 월급쟁이들은 상사들 욕을 하기 때문이었다.
뒤돌아서서 이사에게 좀생이라고 욕을 해도 막상 불러서 가면 깨갱거리는 것이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숙명이었다.
강시혁은 유길준 대리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어디서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자기가 있었던 최 이사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이 반쯤 열려있어 슬쩍 보았더니 최 이사가 젊은 직원 하나를 데려다놓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젊은 직원의 깨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강시혁이 차고로 내려왔다.
여기서 이영진 상무 차를 운전하는 김 기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자네는 대리되었다고 하더니 바쁜 모양이네. 대리 기사에서 비서실 대리가 되었으니 출세는 했네.”
“과장님 덕분입니다.”
“내 덕이라고? 그런 빈말 하지 말고 정식 대리가 되었으면 술이라도 사야지!”
강시혁이 왼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손이 이래서. 그렇지 않아도 붕대 풀면 제일 먼저 과장님께 술 한 잔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자네 의리 변하면 안 되네.”
“변하다니요! 맹호 부대 대 선배님이신데요!”
그러면서 강시혁은 맹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김 기사가 뒷짐을 쥐고 가면서 말했다.
“우리 그룹에서 운전직에서 사무직으로 전환된 사람은 자네뿐이네. 그러기에 사람은 가방 끈이 길어야 돼. 자네는 K대학 나온 사람이 아닌가!”
[가방끈요? 아닙니다. 그 잘난 대리 자리도 손가락 잘라져가며 피로서 쟁취한 자리입니다.]
강시혁은 이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저 김 기사의 등에 대고 허리를 크게 굽혀 인사만 하였다.
강시혁이 수원 시내로 들어왔다. 이제 해는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후배 변상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A일보 회장 만나러 가는 날이 내일이지?“
“응, 내일 오전에 와.”
“작전 짜야 되는 거 아닌가? 조금 있다가 나 영빈관에 형 만나러 갈까?”
“아니, 나 지금 수원에 있어.”
“웬 수원은?”
"회사 일로 가는 중이야. 지금 운전 중이야.“
“아니, 손가락을 다쳤는데 운전을 한단 말인가?”
“운전은 할만 해."
“참, 언젠가 한번 내 동창중 하나가 삼방그룹에 들어갔었다는 말을 했었지?”
“들었던 것 같아.”
“그녀석이 동창중 유일하게 대기업에 들어간 놈이라 만나면 목에 더럽게 힘을 주었지.”
“그랬나?”
“형이 이번에 대리 되었다고 해서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봤더니 삼방화학 화성공장 관리과에 근무한다고 하네.”
“그래?”
“대리는 아직 못 달았다고 하네. 사원 3년차라니까 내년이나 되겠지. 그런데 형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어.”
“어, 내말 하지 마. 나는 비선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안했어. 괜히 형 소개나 해달라고 하면 귀찮잖아. 그런데 수원은 정말 무슨 일로 가나?”
“삼방화학 화성공장 노조위원장 부인이 죽었다 고해서 문상 가는 거야. 비서실 대표로.”
“비서실 대표면 비서실 임원이나 팀장이 가야되는 것 아닌가? 왜 형이 가?”
“그렇게 됐어. 벤츠를 운전하니까 나를 시킨 것 같아.”
“그럼 노조위원장도 만나겠네.”
“만나겠지. 네 동창도 삼방화학 화성공장에 다닌다고 하니까 한번 노조위원장에게 물어볼까? 이름이 뭐였지?”
“하지 마. 그 자식 싸가지가 없어서 할 필요도 없어.”
강시혁은 역시 조직 내에서 근무하려면 인간관계를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절대로 운이 열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