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승진 (5)
(116)
전자 사장은 뒷짐을 쥐고 계속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강시혁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으로 의자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다.
전자 사장이 강시혁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자네 패스트트랙커(Fast Tracker)란 말을 들어보았나?”
"예, 패스트트랙은 알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안건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까?“
“맞네. 안건의 신속처리를 말하지. 하지만 또 다른 뜻이 있는 걸 알고 있나?”
“다른 건 모르겠습니다.”
“기업에서 유동성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을 등급으로 구분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말하네. 하지만 사람을 쓰는 인사관리에도 이 용어가 있네.”
“그, 그렇습니까?”
“장래 사장의 재목이 될 만한 젊은 사람을 뽑아 회사에서 대폭적 지원 하에 키우는 프로그램이지. 뽑힌 사람을 패스트트랙커라고 하네.”
“그렇다면 공채 1등으로 들어온 사람이 그 대상이겠군요.”
“성적만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니네. 사회성과 창의성, 그리고 도전의식을 보는 거지.”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있었네. 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도 하고 서울대학을 나오고 뛰어난 어학실력에 컴퓨터도 능하고 계수에도 아주 밝은 젊은이가 있었네.”
강시혁이 관심이 있어 눈을 반짝이고 전자사장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은 선발되어 회사의 패스트트랙 프로그램에 들어갔겠군요.”
“회장님은 이 사람을 조용히 미국 아이비리그의 경영대학원에 입학시키고 최고의 석학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했네. 불과 5년 전의 일이지.”
“그분은 나중에 사장이 되겠군요.”
“그런데 패스트트랙 교육과정을 마치고 현업에 배치했는데 하는 꼬락서니가 별것 아니었네. 일을 찾아서 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네. 학교 공부는 잘했어도 융통성도 없었고 아부도 할 줄 몰랐던 거지.”
“아부는 나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네. 자네는 회장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었나?”
“그,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아부의 극치였네. 면전에서 꼬리를 흔들고 딸랑이만 흔들어대는 것이 아부가 아니네. 윗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재빨리 찾아주는 것도 아부네.”
“그, 그런가요?”
“자네는 장례식 날 사장들이 고스톱을 칠걸 예상해서 잔돈도 빳빳한 새 돈으로 준비했었지. 이것도 아부의 극치네. 자네의 의도된 연출이었지.”
“억울합니다. 저는 상갓집에서 필요 할 것 같아 그냥 준비했을 뿐인데 아부로 매도하니 억울합니다.“
“매도 하는 건 아니네. 자네의 그 내공에 탄복해서 그렇다네. 회사에서 길렀던 그 엘리트 패스트트랙커는 아쉽게도 그 내공이 없었네.”
“그, 그런가요?”
“자네는 그동안 신불자도 되어보고 분식점 하다가 말아먹고 대리운전도 하고 이혼한 사람이 아닌가? 이 역경을 거치며 자네는 자네도 모르게 내공이 쌓인 걸세.”
[이 양반 기분 나쁘게 내 뒷조사도 많이 했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 영빈관 경비로 채용할 때 신원 조사한 자료가 있어서 그랬었네. 대기업의 사원 채용 때는 신원조회는 하게 되어있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전자 사장은 허리를 굽혀 강시혁의 얼굴 가까이 자기의 얼굴을 대고 말했다.
“내공있는 고수가 하산했으니 이제 슬슬 강호를 접수해 보시게.”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이때 비서가 다시 들어왔다.
“사장님. 일본 교바시 보디가이드, 아니 보드가드 회사 사장님 전화입니다.”
“바꿔 줘봐.”
전자 사장은 또 유창한 일본말로 뭐라고 대화를 나누었다.
전화를 끝내고 사장은 생수를 마시며 말했다.
“이이다 유키 사장은 관서 사투리가 심해서 가끔 내가 잘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겐사이 보디가드를 겐사이 보디가이도 라고 발음하니 남들이 회사 상호도 겐사이 보디가드가 아닌 겐사이 보디가이드로 말할 때가 많지.”
“아, 그건 저도 잘못 알아들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이다 유키 사장이 가와라 흥업과 야쿠자들의 채권 추심을 의뢰했던 계약서 사본을 입수했다고 했네. 복사한 것을 팩스로 보냈다니 자네도 한부 가져가게.”
“알겠습니다.“
사장이 비서를 불렀다.
“겐사이 보디가드에서 팩스를 하나 보낸 것이 있으니 확인해봐. 그리고 3부만 복사해서 가져와.”
“알겠습니다.”
“복사한 것을 한부는 이영진 상무에게 갖다드리고 또 한부는 여기에 있는 비서실 강 대리에게 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비서는 또 강시혁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강시혁은 비서가 참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형수술을 많이 한 얼굴이라 자연미가 없어 호감은 가지 않았다.
자연 미인은 이영진 상무가 자연 미인이었다.
비서가 서류를 복사해가지고 왔다.
복사한 채권 추심의뢰서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강시혁은 일본어나 중국어는 할 줄 몰라도 한자공부 정도는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어에도 한자가 많이 섞이기 때문이었다.
사장이 복사한 서류를 주며 말했다.
“이 서류를 줄 테니 잘 활용하게. 위에서 지시가 없더라도 내공이 있는 사람은 알아서 활용을 하겠지. 그게 고수 아닌가?”
“아, 알겠습니다.”
“가르시아 밀서에 대하여 아는가?”
“잘 모르겠는데요.”
“가르시아 밀서를 줄때는 상관은 말이 없었지. 받은 사람도 말이 없었고.”
강시혁은 가르시아 밀서를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한 뜻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영빈관에 돌아가면 인터넷 검색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 강 대리! 이제 그만 가보시게.”
강시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자 사장은 또 강시혁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리며 말했다.
“잘해. 배짱 있게 잘 해봐.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라는 말이 있듯이 배짱 있게 잘 해봐.”
“알겠습니다.”
“참, 손가락 절단 접합수술은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네. 재활운동 열심히 하게. 자네의 몸값은 이제 이전의 싸구려 몸값이 아니네.”
“고맙습니다. 사장님.”
강시혁은 사장이 손가락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하자 괜히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전자사장의 말이 너무도 따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이 비서실로 갔다. 임창영 과장을 만났다.
임창영 과장이 비서실 임원에서부터 부장, 차장, 과장들에게 강시혁을 인사시켜 주었다.
모두 반갑게 대해주었다.
유길준 대리도 인사했다. 키가 좀 작은 안경을 낀 후덕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유길준 대리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생겼나 했더니 강 대리는 역시 체격이 좋네요.”
“체격만 좋지 머리는 좀 비었습니다.“
“하하. 농담도 잘하고 인성도 괜찮은 것 같아 보이네요. 반갑습니다.”
여직원들과도 인사를 했다.
좀 나이가 든 여직원이 말했다.
“우리 비서실엔 새로 승진하면 밥 한번 사는 전통이 있어요. 언제 날짜 한번 잡아요.”
“예?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체격에 비해서 부끄러움은 잘 타는 것 같네요. 말까지 더듬는걸 보니까요.”
이 말에 뒤에 서있던 다른 여직원들이 까르르 웃었다.
“밥 안사면 이태원 영빈관으로 쳐들어 갈 거예요! 알아서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뒤에서 다른 여직원이 말했다.
“언니, 강시 앤드 혁이라는 분은 언니 앞에서만 이렇게 더듬는 것 같아.“
그러면서 여직원들은 또 까르르 웃었다.
[제기럴, 여자들은 전에 내가 다녔던 중소기업 아영테크의 생산직 고졸 여성이나 대기업 비서실 엘리트 여성이나 다 똑같네.]
강시혁은 이날 처음으로 임창영 과장과 함께 본사 지하에 있는 사원 식당에 갔다.
지하에 있는 사원 식당은 동시에 수백 명이 들어올 수 있는 넓은 식당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원들이 몰려왔다.
사원들은 저마다 목에 아이디카드를 걸고 들어왔다.
사원들이 아이디카드를 자동인식기에 대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강시혁은 문화재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본사 아이디카드가 없었다. 임창영 과장이 비서실에 손님용으로 비치되었던 공용 아이디카드를 사용해서 들어올 수 있었다.
강시혁은 수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다른 사원들은 모르지만 중소기업에 다니고 대리 운전이나 했던 강시혁으로서는 굉장히 부러워했던 장면이었다.
대리라는 직급은 공채 직원들이라고 해도 평균 4년이 걸려야 달 수 있는 직급이었다.
강시혁은 이제 자기의 나이에 걸 맞는 직급을 얻었다. 그동안 공채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고 돌아서 왔지만 이제 다른 직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밥을 먹는 처지가 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역시 사원 식당의 반찬은 중소기업 아영테크와 달랐다. 깨끗한 그릇에 음식도 푸짐했다.
강시혁은 임창영 과장에게 스타벅스에서 커피까지 얻어마셨다.
임창영 과장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자꾸 물었지만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이영진 대리의 협의 이혼문제나 가와라 흥업의 가압류 예정과 같은 민감한 문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강시혁이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사람 많고 복잡한 본사에 있다가 여기 오니까 살 것 같았다. 강시혁은 여기가 내 집처럼 편했다.
“나중에 본사에 들어와 근무하라면 못할 것 같네. 그동안 건대 앞에서 자영업을 하고 대리 운전 일을 해서 그런 가 이제 조직생활에 적응이 잘 안될 것 같네.]
강시혁은 그동안 아이디카드를 목에 걸고 근무하는 대기업 사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강시혁은 양복을 벗고 넥타이까지 풀자 숨통이 다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시혁은 귀국하고 본사의 승진 인사까지 마쳤으니 이제 이영남에게 전화를 걸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영남은 내연녀의 자식이라 세자는 못되어도 왕자는 되는 사람이니 잘 보여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귀엽게 생긴 사람이 자기와 같이 천한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라주니 멀리 할 수도 없었다.
“리틀 브라운 나야.“
“아, 형!”
“귀국했지만 귀국 보고도 해야 하고 또 승진해서 정신없이 보내느라 내가 리틀 브라운에게 연락도 못했네.”
“참, 형 대리 되었다고 영진 누나한테 이야기는 들었어. 축하해 형!”
“저녁에 와. 출장비 남은 것이 있으니 술 한 잔 살게.”
“킥킥. 나한테 술사겠다고 하는 사람 처음 보는 것 같네.”
[흠. 그 말은 맞는 것 같네. 재벌 아들한테 술 산다는 사람은 없었겠지.]
“그리고 오게 되면 가와라 흥업의 가압류 문제 해결도 같이 의논하고 싶어.”
“삼방전기 주식 10만주 말이지? 고마워 형. 그럼 이따 봐.”
전화를 끊고 개인 다이어리에 오늘 본사에 들어갔다 온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후배 변상철의 전화였다.
“나야 상철이야.”
“그래, 반갑다.”
“형이 귀국한줄 알았지만 바쁠 것 같아서 전화 안했어. 이제 내가 저녁에 들려도 되나?”
“그래 와라. 리틀 브라운도 오늘 같이 만나기로 했다.”
“회사에 손가락 하나 받쳤는데 무슨 보상 없어? 한 1억은 받아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 것 없어. 대신 나 대리 승진했어.”
“와, 대박이다. 정규직 전환도 어려운데 대리까지 되었으니 이제 나이에 걸 맞는 자리가 생겼네. 그럼 연봉이 얼마야? 7천? 8천?”
“초임 대리라 호봉이 낮아. 얼마 안 돼.”
“그럼 이제 대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강시 앤드 혁이라고 불러라. 오늘 비서실 여직원이 그렇게 부르더라.”
“뭐? 강시 앤드 혁? 으하하하. 그 여직원 센스 있네. 비서실 여직원이면 얼굴도 예쁘겠는데? 나 소개 좀 시켜줘.”
“애인 있다더라.”
“그러면 그렇지. 반반한 애들은 꼭 애인이 있다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순발력이 있어야 돼."
저녁 6시가 되자 이영남이 왔다.
이영남은 오자마자 강시혁을 끌어안았다.
[이 녀석은 왜 징글맞게 남자끼리 끌어 안어?]
“반가워 형! 형이 와서 영빈관 불이 이렇게 켜지니 사람 사는 곳 같아!”
“내가 없는 동안 괴롭히는 놈들은 없었지?”
“없어. 나를 괴롭히는 놈들이 있으면 일본 야쿠자 일곱 명을 떡으로 만들어놓은 형이 가만히 있겠어?”
“지금은 손을 다쳐서 힘 못써. 하지만 몽둥이는 들 수 있지.”
말하고 있는 사이에 변상철이 왔다.
변상철은 뜻밖에도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왔다.
“너, 오늘 어디 선보고 오냐?”
“결혼식에 갔다 왔어. 친척 동생이 분당에 있는 예식장에서 오늘 식을 올렸거든.”
“밥을 어디 가서 먹을까?”
“일단 나가봐.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가면 좋은 집이 있겠지.”
“대리 승진 턱이니까 소고기 사주지.“
셋이 헤밀톤 호텔 쪽으로 왔다.
변상철의 제안으로 셋은 단풍나무라는 간판이 붙은 고기 집으로 왔다.
이 집은 특이하게 간판이 온통 소주병으로 채워진 집이었다. 외국인이 많이 오는 거리라 그런지 단풍나무 라는 한글 옆에 영어로 Maple Tree라는 글자도 붙어 있었다.
강시혁은 여기서 등심을 시켰다.
여기서 소주를 마시면서 강시혁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줬다.
이이다 유키 라는 전직 경찰 간부를 만났던 이야기도 해주었다.
조용히 강시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영남이 느닷없는 말을 하였다.
“형! 이이다 유키 씨를 나에게 한번 소개해 줄 수 없겠어?”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