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승진 (1)
(112)
이영남은 셈법은 빠르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이다.
또, 음악 활동만 하던 사람이라 순진하기도 했다.
강시혁은 기왕이면 좀 더 감동적인 몇 마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리틀 브라운! 그런데 나는 아무 힘이 없어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이상은 해줄 것이 없어. 미안해.”
“아니에요.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이렇게라도 말해주니 내가 울적한 마음이 좀 사라지긴 했어요. 빨리 돌아와요. 보고 싶어요.“
“나도 그동안 리틀 브라운하고 정이 들어서 그런지 보고 싶어.”
“어제도 내가 영진 누나를 만나서 형 이야기를 했어요.”
“내 이야기를? 무슨 말을 했는데?”
“형이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은 사람인데 영빈관 경비로 썩기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어요.”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렇지만 겸손한 척 했다.
“경비로 썩다니? 나는 영빈관 경비 자리도 어렵게 얻은 사람인데.”
“영진 누나도 말했어요. 형은 삼방그룹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사람 중에 하나라고 말했어요.“
“뭐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강시혁은 이 소리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재벌 2세들이 나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교바시 보디가이드 회사로 가버리면 안되겠는데? 하지만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은 월급이 문제인데 좀 더 많이 주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영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래서 내가 형을 정규직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고마워. 리틀 브라운. 그렇지만 회사는 사규라는 것이 있어서 정규 직원은 그렇게 마음대로 될 수 없어.”
“그랬더니 영진 누나가 강 반장이 정규직이 되면 계열사의 다른 곳으로 가야되는데 그래도 좋으냐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형이 영빈관을 떠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건 안 된다고 했죠.”
[이 자식이 내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그랬더니 영진 누나가 이번 사건으로 형이 공을 세웠기 때문에 아버지도 아마 큰 상을 주실 거라고 했어요.”
[상? 무슨 상? 손가락 잘라졌다고 봉투에 몇 십만 원 담고 위로금이라고 주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그렇지만 점잖게 말했다.
“내가 무슨 공을 세웠다고.....”
“아녜요. 형은 야쿠자 일곱 명을 때려 눕혔잖아요.”
“때려눕히긴! 내가 다구리로 맞았지.”
“어쨌든 같이 싸운 것 아녜요? 아마 형은 내가 누구한테 그렇게 당해도 싸워줄 거예요. 그렇죠? 형?”
“그, 그럼. 리틀 브라운을 괴롭히는 놈들이 있으면 이 형이 당장에 몽둥이 들고 가지.”
“형, 고마워요.“
재벌의 아들이라고 해도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이영남의 처지로는 이 말이 또 고마운 모양이었다. 울먹하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강시혁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기는 어쨌든 이영진 상무와 이영남에게 점수를 따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공채직원이 아니라서 월급이 적어 그렇지 인정받고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문화재단의 설운동 대리가 상사 노릇을 하려고 하고 원장이나 그 밖의 직원들이 자기들과 직종이 다른 경비라 무시해도 이것은 이겨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사는데 그냥 스쳐지나가는 일 정도로 여기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월급이야. 지금 자리도 대리 운전할 때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여기에 만족하다가 40세가 넘고 50세가 넘으면 나는 금생에선 실패한 것이 되겠지. 이영진 상무 벤츠를 몰고 있는 김 기사나 회장님 차를 몰고 있는 이사급 기사 정도가 되더라도 나는 만족할 수 없어. 더 큰 데로 가야돼.]
이렇게 생각하니 또 일본 경호회사로 직장을 옮기는 것에 대한 유혹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이이다 유키 씨가 왔다.
이이다 유키 씨는 이번에도 과일을 한보따리 가져왔다.
“저, 오늘 퇴원하고 싶어요. 이제 크게 치료를 받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접합 수술한 실도 안 풀었을 텐데?”
“봉합수술에 사용한 의료용 실밥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는 말을 들었어요. 또 한국에 가서도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사에게 말해보죠. 그런데 우리 교바시 보디가이드로 오는 문제는 잘 생각해 보았어요?”
“아직 못했습니다. 한국에 가서 정리할 문제도 있어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요.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래 기다릴 수는 없고 일주일 여유를 주죠. 결심이 섰다면 한국 가서도 전화 연락을 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시혁은 의사가 회진하러 병실에 들렸을 때 퇴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이다 유키 씨도 이 사람은 한국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퇴원을 요청했다.
의사는 주의사항을 몇 가지 말해주고 내일 퇴원하라고 하였다.
퇴원을 한다니 살 것 같았다. 간호사도 마지막 남은 주사바늘을 뽑아주었다.
강시혁은 너무 기쁜 나머지 병실에서 주먹을 쥐고 복싱하는 흉내를 내었다.
간호사가 와서 물었다.
“운동을 하신 것은 알겠는데 복싱도 하셨나요?”
강시혁은 미소만 지어주었다.
간호사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니 확실히 강시혁이 좋은 모양이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퇴원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답신이 왔다.
[고생 많이 했어요. 회장님도 강 반장님 대우 문제를 다시 한 번 검토해보라고 했으니 좋은 소식 들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
강시혁은 좋은 소식이란 게 과연 뭘까 하고 생각했다.
혹시 보너스로 몇 십만 원이 든 봉투가 아니라 몇 백만 원이 든 돈봉투라도 보내주려나 하였다.
강시혁은 문화재단의 사무국장과 설운동 대리에게도 전화를 해주었다.
자기는 문화재단 소속이므로 상사들에게 알려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무국장은 고생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문화재단에서 가장 합리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사무국장뿐인 것 같았다.
설운동 대리는 고생은 강시혁이 아닌 자기가 했다고 말했다.
“강 반장 일본에 가 있는 동안 나 혼자서 뺑이 치느라 개고생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큐레이터 신종화가 업무를 도와주면 좋겠는데 그 여우같은 인간이 그런 건 남자가 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내가 몇 번이나 받아버릴까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다음날 강시혁은 퇴원을 하였다.
간호사들이 종이학을 접어 작은 투명 플라스틱 통에 넣어 선물로 주었다.
역시 일본인은 섬세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큰돈 들인 선물이 아니라 자기의 정성을 나타내는 이런 선물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자기는 줄 것이 없어 미안했다. 주머니를 뒤져보았더니 한국돈 백 원짜리 동전이 나왔다. 그래서 동전을 주며 말했다.
“저는 드릴 것이 없네요. 마침 한국 동전이 있으니 기념으로 가지세요.”
“오,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강시혁은 한국 동전을 받은 간호사가 동전에 나와있는 초상화의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하였다. 초상화의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찌른 이순신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이 종이학이 든 플라스틱 통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간호사는 또 까르르 웃었다.
어째 이 여자는 건들기만 해도 웃음이 쏟아져 나오는 웃음주머니를 달고 있는 여자 같았다.
이이다 유키 씨가 간사이 공항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차를 타고가면서 이이다 유키 씨가 말했다.
“일본에 와서 고생 많았어요.”
“사장님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전자 사장을 만나면 일본 한번 놀러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영빈관 경비반장인 자기가 본사에 들려 함부로 전자 사장을 만날 처지는 못 되었다.
그래서 돌아가면 임창영 과장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강시혁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이영진 상무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땐 벤츠를 몰고 김 기사가 공항엘 나왔고 비서실 임창영 과장도 마중을 나왔었다.
하지만 강시혁에게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왼손 손가락을 다쳐 여행용 가방을 오른손으로만 끌고 다니니 다소 불편했다.
일본에서는 병원에서 간사이 공항까지 이이다 유키 씨와 그의 직원이 도와주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잡급직 경비인 강시혁 역시 한국에서는 누가 마중 나오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강시혁은 인천공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영빈관 마당은 관리인이 없어서 그런지 낙엽이 쌓여있고 나무들도 시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시혁은 짐을 자기 방에 넣고 1층 접견실로 갔다. 그리고 1층과 2층을 돌아다니며 각 방문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삼방전자 회장이 전자 사장을 불렀다.
“강 반장이 돌아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강 반장은 나이를 좀 먹어서 들어왔습니다. 이 기회에 나이에 걸 맞는 직위를 주는 것도 괜찮겠죠. 그러면 그놈은 더욱 회사 일을 열심히 할 것입니다.”
“나이에 걸 맞는 직위라면 대리 정도는 줘야겠군.”
“그러면 좋아할 겁니다.”
“다른 직원들이 반발하지는 않겠죠?”
“문화재단에서는 업무량으로 보아 중간관리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강 반장을 대리로 올린다면 문화재단에서 뽑아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계열사에 편입 시켜줘야 되겠죠.”
“공채로 들어온 평사원이 우굴 거리는데 괜찮을까? 입사경력이 일 년도 안 된 사람을 대리로 올린다면?”
“회장님께서 무조건 발령을 내도 반발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채 형식으로 하면 됩니다. 우리가 작년에 미국에서 MBA학위를 따가지고 온 사람들을 대리로 특채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전자보다는 삼방전기 소속으로 하고 특채형식으로 대리 발령을 내야겠군. 비서를 불러 전기 사장을 내 방으로 오라고 해야겠군.”
회장은 비서를 불렀다.
“전기 사장을 내가 보잔 다고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삼방전자 사장이 비서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전기보다는.... 비서실 소속으로 해야 앞으로 영진 상무를 보필하는데 좋지 않을까요?"
"흠."
"비서실은 숫자가 적지만 삼방전기 직원 숫자는 현재 6천 명이 넘습니다. 물론 생산직과 합친 숫자지만 여기엔 기존 직원들이 많습니다. 강 반장을 대리 발령 내면 전기 직원들이 강 반장이 누구인가 할 것입니다.”
“맞아. 비서실 소속이 낫겠구먼. 내가 홍 사장이 영진이와 함께 알콩달콩 잘 살면 나중에 전기 사장을 시켜주려고 했었소, 그래서 죽은 영남이 엄마한테 주려고 했던 삼방전기 주식 10만주를 그놈에게 주겠다고 했었던 것인데.....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뽕쟁이가 되어 남의 자식까지 망치려고 했으니......”
“영진 상무는 앞으로 잘 될 것입니다. 의지가 굳센 여성이니까요.”
이때 삼방전기 사장이 들어왔다.
삼방전기 사장은 회장과 전자사장을 보자 허리 깊숙이 인사를 하였다. 전기 사장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전자 사장 밑에서 부사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회장은 강시혁 때문에 전기 사장을 불렀는데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불렀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전기에 가압류 들어온 건 없지요?”
“네, 없습니다.”
“일본의 가와라 흥업이라는 데서 가압류를 한다고 지랄을 떠는데 그런 소식 들리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줘요. 그리고 법무팀에서 검토도 해보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가 봐요.”
전기 사장은 허리 깊숙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회장이 다시 비서를 불렀다.
“비서실장하고 이영진 상무를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삼방전자 사장이 말했다.
“하하. 회장님은 임원 인사만 관여 하시는데 이번엔 대리 인사에 특별히 관여하시네요.”
“아무래도 영진이를 경호하는 일을 주로 맡게 될 것 같으니 내가 관여를 할 수밖에.”
비서실장과 이영진 상무가 회장 방으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두 손을 마주잡고 회장 앞에 서 있었다.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
“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았다.
삼방그룹은 나이가 많은 삼방전자 사장 이외에는 회장이 앉으라고 해야만 앉을 수 있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불문율처럼 그렇게 되었다.
비서실장과 이영진 상무는 의자에 앉아서 회장의 입만 쳐다보았다.
회장이 비서실장 얼굴을 쳐다보고 말했다.
“상서원을 관리하는 강 반장을 자네도 알지?”
“예. 한번 보았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문화재단 소속으로 있는데 비서실로 전출 발령을 내게.”
“예? 비서실로요?”
“그리고 직급은 대리로 하게.“
“옛? 대리로요?”
“왜?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요즘 대리들 급여가 얼마나 되지?”
“호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연봉 6천 5백에서 7천만 원 정도 됩니다.”
이 말에 이영진 상무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