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일본 야쿠자 (1)
(99)
강시혁은 회의장 밖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문틈으로 살짝 회의장을 엿보았다.
현재 회의장 안에는 박 변호사와 송 변호사, 그리고 홍 사장이 있었다.
박 변호사가 송 변호사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홍 사장은 팔짱을 낀 채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결정 하기위해 나름대로 고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을까?]
강시혁은 두 변호사들의 대화가 궁금했다.
강시혁은 좀 걱정이 되었다.
그것은 이영진 상무가 장명건설의 노사분쟁을 연말까지 처리하겠다고 한 발언 때문이었다.
지금은 추석이 지나고 11월 초입인데 연말까지라면 2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안에 노사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홍 사장측은 높은 이자를 요구하거나 이영진 상무가 가지고 있는 장명건설의 주식 양도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영진 상무는 무엇을 보고 노사분쟁을 연말까지 끝낸다고 했을까? 장명건설이 삼방그룹 품으로 왔으니 노조의 요구대로 무턱대고 급여를 올려 주겠다는 건가?]
[하긴 월급을 올려준다고 하면 농성은 내일이라도 풀어지겠지. 월급을 삼방그룹 수준에 맞춘다면 장명건설이 망할 텐데? 지금도 영업이익이 마이너스인 회사가 아닌가?]
장명건설은 자본잠식회사다.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종업원 월급을 대기업 수준에 맞춘다면 적자폭은 더욱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장명건설을 M&A한 이영진 상무는 삼방그룹 내에서 정말 배임으로 몰려 설 땅이 없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았다.
지긋지긋한 홍 사장과의 관계를 빨리 정리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아닌가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영진 상무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젊은 여자의 몸으로 앞으로 거대한 삼방그룹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가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때 남편 되는 홍 사장이 기둥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이혼사태까지 이르렀으니 참 딱하기만 하였다.
박 변호사가 강시혁을 불렀다.
“협의가 끝났으니 들어와요.”
강시혁이 다시 회의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홍 사장은 강시혁의 얼굴이 보기 싫은지 고개를 돌렸다.
박 변호사가 회의실에 있는 호텔 구내전화로 이영진 상무에게 전화를 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협의는 끝났습니다.”
“그래요?”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에 홍 사장님이 날인을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그 조건에 대하여는 회의장에 내려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내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몸도 아프고 하니 협의 결과만 말씀해 보세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장명건설의 장기농성은 금년 말로 끝내고 내년 1월 31일까지 발행주식에 대한 액면분할을 실시한다. 주총 승인을 위해 주주총회는 그 이전에 열도록 한다.”
“계속하세요.”
“둘째, 액면분할 실시가 어려우면 홍승필 사장의 보유주식 시가총액에 매월 5%의 이자를 지급한다.”
“셋째도 있겠지요. 홍 사장이 그 정도로 끝낼 사람이 아닙니다.”
“액면분할 후 15일 이내에 홍 사장 보유지분을 삼방그룹에서 인수한다.”
“주가가 오른 가격에 삼방그룹에 넘기겠단 이야기군요.”
“그런데 액면분할을 하면 대체로 주가가 올라가지만 안 올라가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박 변호사님은 홍 사장이란 사람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군요. 노조의 장기농성만 끝내면 홍 사장은 바로 주가 띄우기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작전세력을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호, 그래요?”
“액면분할은 유동성을 좋게 하는 호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적극 활용하겠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주가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까 우리는 그것에 크게 관심 갖지 않습니다. 회사의 매출증가와 영업이익 증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요.”
강시혁은 박 변호사 옆에 있었기 때문에 통화내용을 다 들었다.
그렇지만 홍 사장과 송 변호사는 떨어져 앉아있기 때문에 잘 듣지를 못하였다. 또. 송 변호사는 노트북을 열심히 치고 있었고 홍 사장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차분한 이영진 상무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동의한다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박 변호사가 홍 사장과 송 변호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요구사항에 대하여 동의한답니다.”
“그러면 동의내용에 대하여 서명을 받아야겠군요. 방금 워드 찍은 것 호텔 비즈니스 룸에 가서 출력시켜가지고 오죠.”
송 변호사가 요구사항을 적은 서류를 출력시켜가지고 왔다.
박 변호사가 서류를 보고나서 강시혁을 불렀다.
“강 반장! 이 서류를 가지고 이영진 상무에게 가세요. 여기 서명을 받아가지고 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강시혁이 12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갔다.
방문을 노크했다. 이 영진 상무가 코트는 벗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문을 열었다. 그녀의 흰 피부가 눈에 부셨다.
“저, 이 서류에 서명을 해달라고 하는데요? 요구사항에 대한 것을 적은 것 같습니다.”
이영진 상무가 서류를 읽어보고 서명을 해주었다.
“예상했던 요구사항입니다. 그런데 오래 끌줄 알았는데 협의가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강시혁이 미소를 지었다.
[아, 협의가 빨리 끝난 건 내가 공갈 좀 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미소만 지어주었다.
강시혁이 가려고 하자 이영진 상무가 다시 불렀다. 이영진 상무는 강시혁에게 쪽지를 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약국에 가서 이 약 좀 사다 주실래요? 파브론골드 라는 약입니다.”
“파브론골드요?”
강시혁은 파브론골드가 무슨 약인지는 모르지만 설마 마약은 아니겠지 하였다.
재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수면유도제 같은 환각성 약을 복용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프로포폴 같은 마취제는 아니겠지?]
이영진 상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몸살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네요. 파브론골드는 일본 몸살 감기약이에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강시혁이 이영진 상무가 서명한 서류를 가지고 회의실로 갔다.
서류를 박 변호사에게 주었다. 박 변호사가 이영진 상무가 서명한 서류를 확인하고 홍 사장에게 주었다.
홍 사장은 서류를 그냥 받지 않고 화가 난다는 듯이 확 낚아챘다.
송 변호사가 자기도 고개를 빼고 서류를 보았다.
“서명을 했으니 사장님도 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에 날인을 하십시오.“
홍 사장이 신경질적으로 서명을 했다.
박 변호사가 홍 사장이 서명한 협의이혼 신청서류를 자기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두 분 참으로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박 변호사도 수고했어요.”
“최근 우리나라도 이혼율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한 해에 10만 명이 이혼한다니 옛날 사람들이 알면 놀랄 것입니다.”
이혼 이야기가 나오니까 강시혁은 헤어진 와이프 심은혜가 생각났다.
[심은혜는 잘 살고 있을까? 한 해에 10만 명이 이혼한다는데 나는 그 통계에 안 들어가겠지? 우리는 혼인신고도 안하고 살았으니 말이야.]
홍 사장이 먼저 일어섰다.
“박 변호사! 우리는 이제 가겠소.”
“예, 안녕히 가십시오. 앞으로는 좋은 일로 뵙기를 원합니다.”
홍 사장이 강시혁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이름이 강시혁이라고 했지? 앞으로 몸조심하게.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은 옷이라도 두껍게 입고 다녀야 할 거야. 흐흐흐.”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날씨가 추워진다 이 말이요.”
그러면서 홍 사장은 목에 힘을 주고 회의장을 나갔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옷이라도 두껍게 입고 다니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이지? 공갈치는 건가? 뽕쟁이들이 공갈 쳐보았자지!]
송 변호사도 나가려고 하다가 박 변호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선배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송 변호사도 수고 많았어요.”
“서울 가시면 선배님 계신 로펌에 놀러가겠습니다. 거기 교대 역 뒤쪽에 유명한 맛 집이 있으니 한잔 같이 하시죠.”
“그럽시다!”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였다.
강시혁은 변호사들이란 자기 고객을 위해 싸우지만 뒤 돌아서는 또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구나 하였다.
강시혁이 JR오사카역 근방의 약국으로 갔다.
영어로 파브론골드란 약을 달라고 하니까 약사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강시혁이 다시 영어로 몸살 감기약이라고 하니까 그때야 알아들었다.
“아, 파브론골드 데스까? 하잇, 와까리마시다!”
강시혁이 약을 샀다.
이게 파브론골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한자로 감기라는 글씨가 써 있는 것을 보니 몸살 감기약이 맞긴 맞는구나 하였다.
이영진 상무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을 노크했다.
이영진 상무는 방금 샤워라도 했는지 머리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여성용 로션 냄새가 은은히 풍겨왔다.
그런데 얼굴은 아까보다 밝아보였다. 협의이혼 신청서에 날인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였다.
“약을 사왔습니다. 이게 파브론골드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맞아요. 고마워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도 호텔 내에서 하기로 했어요. 박 변호사가 내가 몸살기가 있다고 하니까 여기서 그냥 하자고 했어요. 이따 저녁 6시에 20층에 있는 노카로스트 그릴에서 만나요.”
“알겠습니다. 상무님.”
“그리고 박 변호사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 협의엔 강 반장님 역할이 컸다고 들었어요.”
“그, 그것은.....”
“그런데 용산경찰서 방범위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면서요? 관명을 사칭하는 건 나쁜 일이에요. 오늘 결과는 좋았지만 말입니다.”
“사칭한건 아닙니다. 실제 저는 용산경찰서 방범위원으로 위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방범위원은 민간봉사단체이고 관직명은 아닙니다.”
“오, 그런가요?”
“영빈관 반장이라고 하니까 동네 유지들이 위촉을 해준 겁니다.”
“그런가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활짝 웃는 미소를 지었다.
홍 사장은 아직도 호텔 지하 주차장의 토요타 캄리 승용차 안에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가와라(河原) 흥업입니다.”
“자쵸(사장) 상 좀 부탁합니다.”
“어디십니까?”
“한국에서 온 홍 사장이라고 합니다.”
홍 사장은 그동안 일본을 자주 왔다 갔다 해서인지 일본말을 곧잘 했다.
“전화 바꾸었습니다.”
“아, 자쵸상! 한국의 홍 사장입니다. 협의는 끝났습니다.”
“오, 그런가요?”
“보내주신 볼펜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로고가 박힌 앙증맞은 볼펜이라 모두 주머니에 넣는 것 같습니다.”
“흐흐흐. 계획대로 되어가는 군요. 이번에 온 사람은 한국의 삼방그룹 따님이 끼어있어 구미쵸(조장) 상께서도 관심이 큽니다. 오래간만에 대어를 낚을듯합니다.”
“제가 아직 야마구치구미의 구미쵸 상을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야마구치 구미는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이다.
구미쵸는 오사카 지역의 대표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알려진 가와라 흥업은 야쿠자 조직에서 운영하는 회사 같았다.
“구미쵸 상은 효고현의 아시야(芦屋)시에 계십니다. 거기서 이곳 오사카를 비롯한 긴끼(近畿)지역을 총괄하고 계신데 요즘 경시청의 눈이 하도 심해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하지만 조만간 나오실 것으로 보입니다.”
“보내주신 볼펜은 성능은 괜찮은 거죠?”
“그럼요. 도청 성능은 아직도 짱짱합니다. 요즘은 아날로그방식이 아닌 디지털 감청 장비가 발달해 있지만 쓸 만합니다. 밧데리 성능도 모레까지는 충분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리는 도청 장치를 이용해 내일 삼방그룹의 따님이 어디 가느냐 하는 것만 파악하면 됩니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출국 날짜가 모레입니다.”
“출국 날짜는 그런 것 같습니다.”
“협의도 끝났다면 내일은 틀림없이 관광을 할 겁니다. 우리는 그때를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일행 중 한명이 경호요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운동을 좀 한 놈으로 보였습니다. 조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우리 애들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그들을 사진 촬영 했습니다. 삼방그룹 딸 옆에서 밥을 먹던 깍두기 머리가 그놈일 것입니다. 사진은 이미 아시야시의 지부로 전송 했습니다.”
“그런가요?”
“아마 그 사진을 지금쯤 구미쵸 상께서도 보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