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이혼 협의 (2)
(98)
박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저도 부부 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서로 치고받고 하는 몸싸움 같은 것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부부 중 한사람이라도 약물 복용을 한 사실도 없습니다.”
송 변호사가 박 변호사에게 말했다.
“오늘 협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은 서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먼저 협의이혼을 신청하신 부인되시는 분에게 묻겠습니다. 지금도 이혼에 대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네.”
“다시 숙려기간을 갖고 재결합할 의사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영진 상무는 허공을 응시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엔 박 변호사가 물었다.
“남편 되시는 분이 오늘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에 날인을 거부한다면 재판이혼으로 갈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재판까지 가게 되면 사회적 명예라든가 잃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도 방금하신 말씀의 철회 의사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앞에 계신 두 분은 신청인의 의사가 확고하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신청의 동기는 배우자의 상습적 약물복용과 폭행입니다. 결혼을 지속할 수 없는 중대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날인을 부탁드립니다.”
홍 사장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해 달라면 해주지. 하지만 조건이 있소.”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문제도 없고 결혼생활이 짧아 재산분할의 사유도 발생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이때 나비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은 호텔 직원이 유리컵에 든 음료수를 들고 왔다.
잠시 협의가 중단되었다.
종업원은 말없이 음료수를 각자의 테이블 앞에 놓았다. 그리고 앙증맞게 생긴 볼펜을 가져와 한 사람씩 나누어 주었다.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념품인 것 같았다. 인터컨티넨탈 호텔 로고가 박힌 예쁜 볼펜이었다.
박 변호사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회의한다고 이런 것도 나주어 주는 것 같군. 볼펜이 예쁜데?”
그러면서 잉크가 잘 나오는지 서류에 몇 자 글씨를 써보았다.
홍 사장과 강시혁도 볼펜을 받았지만 쓸 일이 없어서 포켓에 넣었다.
이영진 상무는 볼펜을 건드리지도 않고 멍한 자세로 허공만 바라보았다.
박 변호사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영진 상무에게 말했다.
“상무님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피곤하면 숙소에 들어가 쉬시죠. 의사 결정을 할 때는 제가 전화로 문의를 드리겠습니다,”
송 변호사가 말했다.
“몇 가지만 더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 더 앉아계셨으면 합니다. 괜찮겠죠?”
“네, 괜찮습니다.”
모두 호텔 종업원이 가져온 음료수를 한 모금씩 마셨다.
상큼한 과일 냄새가 풍기는 음료수였다.
송 변호사가 말했다.
“그럼 다시 협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양육권 문제나 재산 분할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협의대상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결혼 전 부인 측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삼방전기 주식 10만주를 주기로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구두상으로 준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혼이 되는 이 시점에서 그것은 없던 것이 되겠지요.”
“약속 위반입니다.”
“그 약속은 어디까지나 구두상의 약속입니다. 문서로 각서나 약정서를 써준 것 도 아닙니다. 법률적 효력도 없습니다.”
“법률적 효력이 있고 없고는 판사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판사 앞에 가져가 보십시오.”
“좋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따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음은 두 번째 질문입니다.”
“말씀하세요.”
“결혼 후 남편 되시는 분은 매형 되시는 분의 회사인 장명건설을 삼방그룹에 매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매각 후 장명건설은 3개월 이내에 액면분할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장기 노사분규로 잠시 못했을 뿐입니다.”
“이 사항은 약정서까지 있습니다.”
그러면서 송 변호사는 서류를 흔들어보였다.
“그 약정서 사본은 우리도 갖고 있습니다. 흔들지 않아도 됩니다.”
“노사분규를 핑계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홍 사장님께서는 장명건설 주식 5%를 갖고 계십니다. 약정까지 해놓고 재산권행사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면 말 그대로 대기업의 횡포 아닙니까?”
“노사분규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액분(액면분할)과 노사분규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두 변호사의 언쟁이 높아지자 이영진 상무가 말했다.
“노사분쟁은 금년 말까지 처리하겠습니다.”
“그 말씀 번복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하신 말씀 녹음이라도 해 둘까요?”
이제까지 두 변호사의 논쟁을 듣고만 있던 홍 사장이 말했다.
“금년 말까지 약정서대로 액분을 못하면 이영진 상무가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장명건설 주식을 모두 나에게 양도한다고 하면 되겠군.”
이 말에 이영진 상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분노의 눈빛만 쏘아댔다.
강시혁은 속으로 저런 나쁜 놈 하였다.
[나쁜 놈! 이영진 상무의 지분을 양도받으면 자기 것 5%, 이영진 상무 것 5%를 합하여 10%를 보유하겠다는 속셈이네. 그럼 장명건설의 시가총액이 720억이니까 72억을 갖고 있겠다는 심보 아닌가?]
[아니지. 언젠가 노사분규가 해결되고 그놈의 액분인지 액면분할인지를 하게 되면 주가는 더 올라가겠지. 대그룹 품으로 들어간 회사니까 수주 한건 따면 또 올라가겠지. 그래서 주가가 지금보다 두 배 오른다면?]
[저 인간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주식 평가액이 72억이니까 두 배 오르면 144억이 되나? 허, 참. 돈 쉽게 버네! 휴지 안대고 코 풀어버리네!]
박 변호사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지나친 요구사항입니다.”
“지나친 요구라니!”
“실현 불가능한 요구라면 협의 진행이 어렵습니다. 차라리 연말까지 액분을 못하면 기간 이자를 달라고 하시면 그건 이해가 갑니다. 그렇지만 있는 주식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억지입니다.”
홍 사장이 자기 법률대리인인 송 변호사를 보고 말했다.
“지금 시중은행 이자율이 얼마요?”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 국민은행 주담대 1년 변동 이자율이 5.37%입니다.”
강시혁은 이자율이 얼마나 될까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송 변호사는 저렇게 척척 대답하니 정말 유능한 변호사란 생각이 들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저 정도로 서비스는 해야 일류 변호사겠지.]
[그렇다면 5%만 잡으면 얼마인가?]
강시혁이 자기도 한번 계산해 보려고 하는데 이번엔 박 변호사가 즉석에서 말했다.
“월 3천만 원 정도 됩니다.”
[제기랄! 대형 로펌사 변호사들 정말 머리 좋네. 컴퓨터가 따로 없네!]
그러면서 강시혁은 두 변호사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변호사보다도 더 부러운 사람은 홍 사장이었다. 액분이 안되면 매월 3천만 원씩 이자를 따복 따복 받아먹는다고 생각하니 금수저는 역시 부러운 존재들이었다. 신의 존재였다.
[매월 3천만 원이면 얼마야? 두세 달만 그렇게 들어와도 나는 신불자 신세를 벗어나는 돈이네!]
홍 사장이 어깃장을 놓았다.
“내가 이자나 받아먹으려고 오늘 여기 나온 줄 아시요? 액분이 금년 연말까지 안 되면 이영진 상무 지분을 전부 나에게 양도하시오. 그것 외는 나는 협의할 생각이 없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한다니까! 이혼 의사 확인신청서에 날인할 의사가 없다니까!”
박 변호사가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협의는 잠시 쉬었다가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송 변호사도 오케이 하였다.
“그럽시다. 그럼 10분만 쉬었다가 하죠.”
박 변호사가 강시혁에게 말했다.
“강 반장! 이영진 상무님이 아무래도 피곤하신 것 같으니 룸으로 모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영진 상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장을 나갔다.
강시혁이 그 뒤를 따랐다.
이영진 상무가 자기 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강시혁을 보며 말했다.
“강 반장님! 미안하지만 박 변호사한테 이렇게 전해주세요. 금년 연말까지 액분이 안되면 5% 이자를 지급해 주겠다고 하세요. 그리고 나중에 액분이 되어 주가가 올라가면 시가대로 홍 사장 지분을 회사에서 사주겠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홍 사장이 서명을 하면 나에게 전화로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시혁이 정중히 인사하고 다시 3층 회의장으로 내려왔다.
강시혁이 방금 이영진 상무가 한말을 박 변호사에게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박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요.”
홍 사장이 들어오다가 두 사람이 귓속말 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귓속말로 하는 거요?”
강시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한국에서 구속된 연예인 K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강남 삼성동 오피스텔에서 홍 사장님과 함께 있었던 연예인 K양으로 알려진 사람 말입니다.”
“뭐라고?”
홍 사장만 놀란 것이 아니고 박 변호사와 송 변호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박 변호사는 강시혁이 방금한 말과 틀려 더 놀라는 것 같았다.
"그 K의 수첩에서 홍 사장님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 말은 어디서 들은 건가?”
“나는 홍 사장님의 부하가 아닙니다. 반말을 찍찍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홍 사장이 강시혁을 노려보았다. 꼭 경비원 주제에 어딜 감히!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좋아.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으니 말을 올려주지. 어디서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었소?”
“저는 용산경찰서 방범위원입니다. 경찰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뭐, 뭐라고?”
강시혁이 이 이야기를 들은 건 경찰에게 들은 말이 아니었다.
일본 출장을 오기 전에 이영남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한번 써먹어 본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쐐기를 좀 박고 싶었다.
“오늘 협의이혼 이야기가 잘 안되고 재판이혼으로 간다면 저는 홍 사장님을 마약사범으로 고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재판이 유리하게 되니까요.”
“이 자식이 듣자듣자 하니 건방지게!”
그러면서 홍 사장이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강시혁이 이번에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지난번 강남 오피스텔에서는 제가 홍 사장님에게 맞았습니다. 힘이 없어 맞은 건 아닙니다. 제가 맞은 건 이영진 상무님 체면을 보아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릅니다.”
“뭣이 어째?”
“힘으로는 사장님이 저에게 당하지 못합니다. 망신당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앉아 계세요.”
“아니, 이 자식이 내가 누구라고 건방지게!”
옆에 있던 박 변호사와 송 변호사가 홍 사장을 말렸다.
“아아, 참으세요. 홍 사장님이 참으세요.”
“내가 참게 생겼어요? 경비원 따위가 저런 말을 하는데?”
“홍 사장님은 사회 저명인사입니다. 경비원하고 싸웠다면 체면만 깎입니다. 참으세요.”
“흥! 일본 경시청이 그렇게 한가한가? 일본말도 못하는 한국의 경비원 따위가 하는 말을 들어줄까?”
이번에도 강시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하면 지기 때문이었다.
“일본말 못해도 통역도 있고 또 경시청 외사과 경찰들은 영어를 잘 합니다. 저 역시 홍 사장님 만큼 영어를 잘하진 못해도 K대 영문과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제 동창들도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학별의 위력은 대단했다.
홍 사장은 눈을 껌벅이며 강시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K대 영문과를 나왔다니 이놈은 경비원이 아니고 삼방그룹에 정규직원으로 시험보고 들어온 놈인가 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계속 말했다.
“저는 삼방그룹 경비원이 아닌 한국 용산경찰서 방범위원 자격으로 고발하겠습니다. 여기 산정호수에서 사장님이 마약을 하는 장면도 생생히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이 사진 한 장을 들어올렸다.
벌거벗고 남녀가 엉겨 약에 취해 있는 장면이었다.
"저, 저것은!"
"저도 사장님같이 점 잖은 분이 약물중독 검사에서 음성 판정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발 할 테면 해. 나도 경시청에 아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런데 홍 사장의 기가 많이 꺾어진 것 같았다.
조금 전보다 악을 덜 쓰는 것 같았다.
박 변호사가 말했다.
“강 반장!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주겠어요?”
“알겠습니다. 밖의 대기실에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은 절도 있게 인사를 하며 회의장을 물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