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자율 방범위원 (3)
(93)
저녁에 김 기사가 여권을 가지고 영빈관으로 왔다.
“어서 오세요. 과장님!”
“요즘 내가 여길 자주 오네.“
여권은 편지 봉투 속에 들어있었다.
김 기사가 봉투를 던져주며 말했다.
“봉투 속에 들은 게 뭔가? 여권 같은데?”
“여권 맞습니다. 일본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비서실 유길준 대리가 보내라고 했었습니다.”
“일본 비자를 받아? 일본은 무비자 아닌가?”
“일본은 무비자였는데 코로나가 번지고 한일관계도 험악해 비자를 받아야 한답니다. 코로나가 수그러들면 다시 무비자가 되겠죠.”
강시혁이 일본 출장을 가려 할 때는 비자를 받아야 할 때였다.
“자네는 일본도 척척 가고 괜찮네.”
드디어 김 기사의 찍는 소리가 나왔다.
“제가 가는 건 경호 때문입니다. 찌라시 기자들이나 악질 유튜버들이 모여들면 밀어내긴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자네는 체격도 있고 운동도 좀 한 사람이니까 선발된 것 같군.”
“과장님이 이영진 상무를 제일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니까 과장님이 가야한다고 말씀드려볼까요?”
“아아, 되었네. 나는 이제 배도 나오고 나이도 들어 안 되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건달들 서너 명은 바로 걷어버릴 텐데.”
[건달들 서너 명을 걷어버려? 건달들이 다 운동 좀 한사람들일 텐데 왜 김 기사 아저씨한테 맞겠습니까? 보아하니 운동 살도 없고 비계살만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강시혁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말했다.
“과장님은 정말 젊었을 때 한가락 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경호 임무를 위해서 간다니 조심해서 다녀오게.”
“잘못하면 몸싸움도 해야 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이비 기레기나 유튜버들하고 치고받고 싸우지는 말게. 잘못하면 형사문제가 벌어지네.”
“참, 냉장고에 장수 막걸리 한 병하고 돼지고기 편육이 있는데 한잔 하고 가시겠어요?”
“안 돼. 밖에 벤츠 세워놓았어. 오늘은 끌고 가야돼.”
“에고, 그럼 어쩌나!”
그러면서 강시혁은 막걸리와 편육을 검은 봉지에 담았다.
김 기사에게 주면서 말했다.
“그럼 집에 가셔서 사모님이랑 같이 한잔 하세요.”
“이걸 날 주면 어떻게 해?”
“저는 됐습니다. 과장님 드세요.”
“허허. 고맙네. 그럼 나는 가겠네.“
김 기사가 봉지를 들고 갔다.
[김 기사는 귀국할 때 면세점에서 선물이나 사가지고 오면 되겠군.]
그런데 강시혁은 면세점 생각을 하다가 우울해졌다.
신용카드가 없기 때문이었다.
“에효, 내가 신불자라 신용카드가 없으니 물건 사기도 힘들겠네. 현금 지불해줘야겠네. 별수 있나? 지난번 메키스 회장한테 받은 달러나 가지고 나가야지.”
다음날 이영진 상무로부터 정식 메시지가 왔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일본 오사카지역 출장을 갑니다. 강 반장은 안전요원으로 함께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재단에는 이미 통보하였으니 출국에 따른 준비를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옙, 알겠습니다. 비서실과 문화재단 연락은 받았습니다.]
대전에 계신 엄마한테 연락을 했다.
“엄마! 나야. 다음 주 월요일에 나 일본 출장을 가. 3박 4일 다녀올 거야.“
“그래? 어느 지역엘 가는데?”
“오사카야.“
“일본도 코로나가 번진다는데 조심해서 다녀와. 그리고 한일관계도 험악해 널 해코지할 놈들이 있는가 모르겠다.”
“하하. 그런 건 없어요.“
“좋은 회사인 것 같으니 윗사람들 말 잘 듣고 열심히 해라.”
강시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윗사람들 말 잘 들으라는 이야기밖에 할 줄 몰랐다.
모든 행복은 윗사람들한테 말을 잘 듣는 것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같았다.
이것은 윗사람들의 말이 정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무조건 예, 예. 하라는 말과 똑 같았다.
남의 밑에서만 사는 민초들의 한 단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강시혁은 후배 변상철에게도 전화를 했다.
“상철이니? 지금 점심시간이지?”
“형, 목소리가 밝네. 무슨 좋은 일 있어?”
“내가 다음 주 월요일 일본 출장을 간다.”
“일본 출장? 와, 이제는 막 날아가는 것 같네. 그런데 무슨 일로 가나?”
“VIP 경호야.”
“킥킥. 형이 무슨 경호를 한다고 그래? 솔직히 말해 형이 태권도나 유도 같은 유단자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건달 물을 먹은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만 경호를 하나?”
“하긴 기본 체격이 좋고 바벨 운동을 열심히 해서 운동한 사람처럼 보이기는 하지. 그러다가 진짜 일본 야꾸자들이나 만나려면 어쩌려고. 킥킥.”
“내가 일본 야꾸자들 만날 일이 왜 있겠냐? 모시고 가는 이영진 상무한데 직접거리는 놈들이나 밀어내면 되지.”
“형 체격이면 한두 명은 밀어내겠군.”
“한두 명이 아니라 두세 명은 밀어낼 자신이 있다.”
“형 갈 때 선그라스도 끼고 머리도 깍두기처럼 하고 가. 집적거리는 사람들한테 겁 좀 주란 말이야.”
“글쎄.”
“공작새가 싸울 때 날개를 펴는 것 봤지? 그 이치야. 겁을 주는 것도 경호의 한 방법이야.”
“알았어. 고려해 볼게. 그런데 귀국할 때 면세점에서 뭘 사가지고 오면 되겠니? 내가 신세진 문화재단 직원이나 여기 기사들한테 선물 좀 하려고 그래. 넌 해외여행 경험이 있으니 말해봐.”
“돈이 많으면 양주라도 사서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잖아? 또 무거운 물건은 가지고 나오기도 힘들어. 가벼운 소품으로 사가지고 오는 게 좋겠지.”
“소품이라면 뭐가 좋을까?”
“남자들이야 넥타이나 벨트 같은 것이 무난하겠지. 여자들은 가벼운 컴팩트 파우더 같은 거나 사가지고 오면 되지 않을까? 그런 건 세관에서 걸리지도 않아.”
“넥타이나 컴팩트 파우더?”
“내 것도 하나 사올 거지?”
“짜샤, 네 것은 없어!”
“그럼 얼른 전화 끊어. 나 지금 바빠!”
강시혁은 넥타이를 사다줄 사람들 명단을 작성해보았다.
먼저 남자는 설운동 대리,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다니는 김 기사, 그리고 변상철, 대전에 계신 아버지를 적었다. 이영남은 재벌 아들이라 명단에서 뺐다. 비서실 직원들도 뺐다.
그리고 여자는 가정부 아줌마 2명, 큐레이터 신종화, 대전에 계신 엄마, 문화재단 사무국장까지 집어넣었다.
관장은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았다. 수백만원짜리 루비똥 백을 들고 다니는 교만스러운 관장에게 잘못 선물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컴팩트 파우더를 강시혁의 면상에 집어던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의 선물은 좀 약한 것 같았다.
아버지한테는 벨트를 하나 더 사드리고 엄마한테는 화장품 세트라도 사다드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거 이러면 모두 얼마야? 메키스 회장한테 받은 돈 다 털어 넣어도 모자라는 것 아니야?”
그런데 엄마와 아버지에겐 꼭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다.
강시혁이 이영남에게도 일본 출장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영남에게 부재중 전화가 걸려 왔던 흔적이 있었다. 아마 변상철과 전화할 때 통화중이라 자기가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이영남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또 이영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하였다.
“형, 지금 바빠?”
그런데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누가 들으면 안 되기라도 하는듯한 목소리였다. 또 누구에게 시달리는 것이 아닐까 했다.
“아니 괜찮아. 지금 어디야?”
“나 이태원 대로변에 있는 딤섬집에 있어요. 잠깐 식사나 같이 하지.”
“식사? 지금 몇 시인데?”
전화가 끊겼다.
강시혁은 이영남이 또 누구엔가 시달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부잣집 아들은 부잣집 아들들하고 놀아야하는데 이영남은 그게 아니었다. 괜히 이태원 바닥에서 돌아다니다보니 이곳 건달들과 어울린 것 같았다.
그것은 이영남이 예술을 좋아하여 밤무대나 섭렵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강시혁이 딤섬 중국집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건달처럼 생긴 두 놈이 열심히 이영남을 설득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시혁이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이영남이 얼른 강시혁의 자리로 왔다.
“어, 형! 미안해요. 갑자기 친구들이 찾아와서 형하고 점심시간을 어겼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친구들이 자꾸 코인투자를 권해서.“
이영남이 만두를 시켰다.
이영남과 강시혁이 딤섬 만두를 먹었다.
건달 중 한명이 이쪽으로 왔다.
“어이, 리틀 브라운!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지.”
“난 관심 없다니까.”
“저리 가자.”
“난 오늘 이분하고 점심 약속이 있단 말이야.”
건달이 강시혁에게 잠깐 목례를 하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리틀 브라운하고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리틀 브라운을 데리고 가는걸 양해 바랍니다.”
“나도 리틀 브라운과 중요한 사업이야기가 있어요.”
건달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사업하는 분 같지 않은데.”
“당신들도 사업하는 사람들 같지는 않은데?”
“뭐요?”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면 어쩔 건데?”
그러면서 강시혁이 웃통을 벗고 벌떡 일어났다.
강시혁의 불룩한 가슴과 문신이 드러났다.
저쪽에 앉아있던 나머지 건달 한 놈도 이쪽으로 왔다.
“당신도 건달 같군.”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도 건달 같군.”
두 사람은 강시혁을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보았다. 서로 노려만 보았다.
공기가 험악한 것을 보고 식당 주인이 달려왔다. 모두 건달들인 것 같은데 괜히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자기네 가게가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식당 주인이 강시혁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혹시 용산경찰서 방범위원이 아니십니까?”
“예, 맞습니다.”
“지난번 주민 센터에서 있었던 위촉식에서 뵈었습니다. 저도 상가 번영회를 맡고 있어서....”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건달들이 슬금슬금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역시 이럴 때는 영빈관 경비 반장보다는 경찰서 방범위원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건달들이 나가면서 말했다.
“리틀 브라운 나중에 만나자. 괜히 좋은 투자 기회 놓치지 마라.”
“그냥들 나가. 딤섬 만두 값은 내가 낼게.“
강시혁이 만두 먹는 것을 쳐다보던 이영남이 말했다.
“형이 경찰서 방범위원이에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이영남은 존경의 눈빛으로 강시혁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강시혁은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다.
또 빨리 먹기도 하였다. 금방 만두 한 접시를 먹고 말했다.
“리틀 브라운! 영빈관으로 가지. 아직도 건달 놈들이 이 근처를 배회할지 모르니까.”
“좋아요. 나도 드럼을 치고 싶으니까.”
“앞으로 영양가 없는 건달 친구들은 다 손절해.”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이영남은 말끝을 흐렸다.
강시혁은 편의점에서 캔 맥주 두 개를 샀다.
그리고 영빈관 관리실에 들어와 이영남과 서로 나누어마셨다.
이영남이 관리실 책상위에 있는 용산경찰서 방범위원 위촉장과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보았다.
“와, 형이 정말 용산경찰서 방범위원이네!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전기 기능사 자격증도 있는데?”
“이런 것 다 소용없어. 그래봤자 문화재단 잡급직 경비인데!”
“말도 안 돼! 형처럼 영어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이렇게 기능사 자격에다 방범위원까지 하는데 경비라니!”
“그래서 이영진 상무가 일본 가는데 나를 추천했잖아. 다음 주 월요일 나 일본가. 3박4일 오사카 가기로 했어. 이영진 상무 보디가드로 말이야.”
“오, 잘됐네요. 그런데 내가 심심하겠는데?”
“영빈관 출입문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 와서 드럼 연습해. 회장님도 드럼 치는 걸 허용하셨으니까!”
“영진 누나가 이번에 일본 가는 것은 서로 이혼 도장을 찍으려는 것 같은데 홍가 놈이 엉뚱한 짓을 하지 않을까 몰라.”
“엉뚱한 짓이라니!”
“중증환자들은 사람을 몰라보니 문제죠.”
“내가 따라가니까 너무 걱정 마. 만약에 홍 사장이 영진 상무에게 손 하나라도 대면 내가 메다꽂을 테니까!”
“형이 따라가니까 안심이 되긴 한데.... 그놈이 폭력행사는 안하더라도 무리한 요구 같은 거나 안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변호사 한분도 같이 가잖아. 서초동 법무법인의 박 변호사라고 나도 잘 아는 사람이야.”
“형, 그런데 이걸 알아?”
“뭘?”
“홍가하고 같이 놀아난 연예인 K말이야. 걔가 또 약물주사로 걸려 들어갔다고 하네요.”
“습관성 약이라 떨쳐내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런데 K라는 그 여자 수첩에서 약을 제공한 사람들 명단이 나왔는데 홍가 이름도 나왔다고 하던데요?”
“그으래? 인터넷 보도가 나왔나?”
“보도는 안 나왔어요. 약을 제공한 사람들이 모두 실력자들 아들들이라 보도 통제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리틀 브라운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약을 제공한 사람들 중에서 내 친구 형이 있었어요. 그 형도 어제 경찰 조사를 받고 나왔다고 하면서 내 친구가 너만 알라고 했어요.”
“명단에 홍 사장 이름이 나왔다면 홍 사장도 조사를 받았을 텐데 국내에 없으니 다행이네. 경찰이 일본까지 가서 조사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힘이 있는 사람들이니 그 전에 무슨 조치를 취했겠죠.”
"힘이라....."
강시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힘이란 돈과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기처럼 바벨 운동이나 하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현타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