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회장의 방문 (1)
(89)
회장이 강시혁을 훑어 보고나서 물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할 만한가?”
“예, 할 만합니다. 문화재단에 계신 분들이나 비서실 직원들도 잘 대해주어 업무에 애로사항은 없습니다.”
“흠. 그런가?”
“또 옆에 계신 이사님이나 이영진 상무님을 모시고 있는 김 과장님도 잘 대해주십니다. 금산 아줌마도 친절하게 대해줘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자네는 체격이 좋군. 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보니 건강해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사실 체격이 좋아진 건 이유가 있었다. 대리운전을 할 때보다도 잠을 잘 자고 잘 먹고 또 바벨운동을 날마다 했기 때문이었다.
회장은 차를 마시면서도 계속 날카롭게 강시혁을 관찰했다.
“전에 무슨 운동을 한 적이 있나?”
“특별하게 한 것은 없습니다. 최근에 바벨운동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던 회장 차 기사가 말했다.
“이 사람은 태권도 3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허, 그래?”
회장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태권도 운동도 꾸준히 한 것 같군.”
“태권도는 학교 다닐 때 잠깐 해보았을 뿐입니다.”
“운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군.”
“내세울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오늘 메키스 펀드의 메키스 회장을 만난 사실이 있나?”
“그렇습니다. 이영진 상무님의 지시로 예일대 휴즈 교수와 함께 귀국하는데 공항까지 모셔드렸습니다.”
“자네는 영어를 할 줄 안다니 모신 것 같군.”
“영어는 잘 못합니다.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만 할뿐입니다.”
“메키스 회장을 가까이 모셨다니 영광이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괴팍한 영감인데 자네가 모셨군.”
“차 안에서 제가 질문하는 것은 잘 대답해 주셨습니다.”
“질문이라고?”
“어느 주식을 사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재무구조가 좋은 우량기업에 가치투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또 회장은 빙긋 웃었다.
회장이 마저 남은 차를 마셨다.
강시혁은 메키스 회장에게 천 달러를 받은 사실도 말씀은 드려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메키스 회장님은 헤어질 때 저에게 천 달러를 주셨습니다.”
천 달러라는 소리에 회장보다는 옆에 있던 회장 차 기사가 더 놀래는 것 같았다.
“윽! 천 달러?“
회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천 달러라고? 메키스 회장답군!”
“너무 과분한 금액이라 회사에 입금을 시켜야 할까 생각중입니다.”
“그건 자네 돈이네. 그럴 필요 없네. 그리고 우리 영남이가 혹시 여기에 오질 않나?”
“한두 번 왔다 갔습니다.”
“와서 뭘 하고 갔나? 이층에 있는 미술품 감상을 하러 온건 아니겠지.”
“음악도 듣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불러?“
“음악적 재능이 아주 좋은 분 같았습니다.”
“여기에 와서 이상한 약을 흡입하거나 한 일은 없었나?”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좋지만 이상한 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기로 저와 약속을 했습니다.”
이영남이 영빈관에 와서 약을 흡입한 사실은 없지만 술은 한두 번 마셨었다.
그러나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건 아니었다.
회장이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앞으로 그놈이 여기 와서 약을 흡입한다면 비서실장에게 바로 보고를 해주게.”
“알겠습니다.”
“안 그러면 자네도 삼방그룹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기 어려울 걸세.”
“알겠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이나 이영진 상무 집에 있는 가정부들이 자네에게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협조해 주게.”
“두 분 가정부는 제 친 이모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르면 즉시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는 정원사가 상주했었지만 지금은 따로 두지를 않네. 정원 손질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조경 회사에서 봐주고 있지. 그러니 정원 손질보다는 남자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나 가끔 봐주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수고하게. 밤에 혼자 심심하겠는데?”
“밤에는 어학공부도 하고 바벨운동도 하고 그럽니다.”
“흠. 그런가?”
기타 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회장이 마당으로 나갔다.
“저.... 청이 하나 있습니다.”
회장이 돌아서며 눈을 부릅뜨고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회장은 이상하게 사람을 그냥 쳐다보아도 눈을 부릅뜬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이영남 씨가 음악적 재능이 좋습니다. 여기 지하실은 방음 장치도 좋으니 와서 악기연습 같은 것을 하도록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악기연습이라고?”
“드럼이나 기타 같은 것 말입니다. 가끔 취미 정도로 하고 거기에 빠지지만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알아서들 하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러면서 강시혁은 회장에게 크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회장 차 기사는 벌써 회장 차 뒷문을 열고 서 있었다.
회장이 뒷 좌석에 타자 기사가 뒷문을 닫았다.
그런데 한 번에 닫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멈칫하다가 닫았다.
강시혁이 쳐다보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흠. 오야지를 모실 때는 저렇게 하는구나. 중간에 한번 멈칫했다가 닫는 것은 안전을 확인하는 것 같네. 과연 이사급 운전기사네.]
강시혁은 또 자동차를 향하여 크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회장은 가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회장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강시혁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회장님이 느닷없이 왜 왔지? 영남이 때문에 왔나? 맞아 이영남이 여기에 와서 약을 흡입하는가를 물으러 온 것 같네.”
그런데 강시혁의 이 추측은 틀렸다.
회장은 강시혁이 이영진 상무의 보디가드로 적임자인가 한번 떠보려고 온 것이다.
더구나 해외까지 나갈 때 따라 나서는 보디가드라면 신원은 물론 인성에 관한 적합성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이 대문을 닫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리틀 브라운! 회장님 가셨어!”
“히히, 그래요?”
두 사람은 해방이 되었다는 표시로 서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형! 족발이라도 시킬까요? 해방되었으니 술 한 잔 해야죠.”
“에이 안 돼. 회장님께 여기서 술 마시는 건 안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는데. 오늘만 참지.”
강시혁은 이제 이영남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그럼 다음에 하죠.”
“그런데 오늘 회장님이 오신건 아무래도 리를 브라운 때문에 오신 것 같아.”
“나 때문에요?”
“여기 자주 오냐고 묻고 약을 흡입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던데?”
“그래요?”
“그래서 그런 사실은 전혀 없다고 했지. 영빈관에서는 약을 흡입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했지.”
“잘 했어요. 참 잘했어요.“
“그런데 회장님께 청이 하나 있다고 말씀드렸지.”
“청이요?”
청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영남은 강시혁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이 혹시 자기 아버지 앞에서 월급이라도 올려달라고 한건 아닌 가 하는 것 같았다.
“이영남 씨가 음악적 재능이 좋은 것 같으니 여기 지하실에 와서 악기 연습 하는걸 허용해 달라고 했지.”
“오, 그랬어요?“
“방음장치가 잘되어있어 이웃 방해도 않고 또 이영남 씨가 취미정도로 한다면 드럼같은 걸 들여놓도록 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뭐래요?”
“음악에 빠지지 않고 취미 정도라면 해도 된다고 하시더군.”
“그으래요? 그럼 오늘같이 아버지가 와도 드럼 소리 때문에 잔소리는 안 하시겠군.”
“그럴 겁니다.”
“하하. 역시 형이 최고야.”
그러면서 이영남은 강시혁을 와락 껴안았다.
이영남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다음날 오전에 강시혁은 삼방그룹 비서실장 전화를 받았다. 비서실장의 전화는 처음이었다. 전에 영빈관에 계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얼굴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처음이었다.
“강 반장이요? 나 삼방그룹 비서실장이요.”
“아, 예. 그렇습니까?”
비서실장은 사장 급이란 소리를 언젠가 한번 들은 기억이 났다.
“강시혁 씨는 현재 문화재단의 임시직으로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임시 잡급직 경비로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후 정규직 전환이 된다면 신불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강시혁은 속으로 뜨끔했다. 현재 신불자 신세이기 때문이었다.
신용회복위원회 조정으로 그나마 은행거래가 가능한 정도였다. 물론 신용카드도 만들 수 없는 처지였다.
강시혁은 마른 침만 꼴깍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어느 은행을 거래하고 있죠? 급여통장 발급은행 말입니다.”
“신한은행입니다.“
“그럼 신한은행 금융거래 확인서를 나한테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메일 주소를 불러줄테니 보내주면 됩니다.”
강시혁은 이 사람이 왜 사람을 귀찮게 하나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총무에서 대리 정도가 전화하면 되지 왜 사장급인 비서실장이 직접 전화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혹시 보이스피싱이 아닐까?]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예? 또요?“
“그리고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여 신용회복위원회 조정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씨팔! 거기까지 조사한 모양이네.]
“신용회복위원회 조정으로 부채를 성실히 갚고 있다면 취업 제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강시혁 씨에 대한 취업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파악하려는 것은 향후 정규직 전환 때 참고로 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향후 정규직 전환?”
“그래서 수고스럽지만 오늘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변제확인서를 발급받아 나한테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서류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금융거래확인서나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변제확인서는 모두 온라인 발급이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내 이메일주소는 [email protected]입니다."
"알겠습니다.“
“채무변제 확인서는 성실히 갚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할뿐입니다. 사실 확인이 된다면 향후 강시혁 씨가 삼방그룹에서 성장하는데 아무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런 일은 회사 총무과에서 하지만 강시혁 씨는 현재 VIP경호라는 특수직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전화한 것 입니다. 정보 보호를 위해서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강시혁 씨와 나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일체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문화재단의 관장이나 사무국장에게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돈 요구가 없는 걸 보니 보이스피싱은 아닌 것 같군. 이메일 주소도 삼방 닷컴이니 비서실장이 맞는 것 같군.]
강시혁은 온라인으로 서류를 발급받았다.
처음 발급 받는 거라 에러가 나와 몇 번 시도 끝에 발급받았다. 바로 이메일로 파일 첨부하여 보내주었다.
그리고 바로 휴대폰에 남아있는 비서실장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내주었다.
[말씀하신 금융거래확인서와 채무변제확인서는 실장님 이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잠시 후 답변이 왔다.
[확인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시혁은 서류를 보내놓고 다시 한 번 금융거래확인서와 채무변제확인서를 보았다.
금융거래확인서는 깨끗했다. 대출금 거래사실이 없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강시혁이 부채를 갚지 못한 것은 국민은행이지 신한은행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무변제 확인서도 많이 갚은 것으로 되어있었다.
대리운전기사 시절부터 매월 갚았기 때문에 8,300만 원 정도 남은 것으로 되어있었다. 말하자면 성실 변제자였던 것이다.
[왜 이런 서류를 보내라고 하지? 정말 나를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려고 그러나? 정규직 대졸 신입사원 급여만 해도 연봉 5천이 훨씬 넘는다는데 거기에 맞춰주려고 그러나?]
[정말 그렇게 맞추어 준다면 난 삼방그룹에 열과 성을 다하여 충성을 맹세할 수가 있지. 빨라면 하면 빨고 핥으라면 하면 핥을 용의도 있지. 암.]
강시혁은 만약에 자기가 연봉 5천만 원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였다.
변제액을 빼더라도 한 달에 얼마를 저축할 수 있는가 따져보았다. 잘하면 채무변제를 조기상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우울하기도 했다.
[아닐 거야. 왜 나를 정규직으로 해주겠어? 내가 삼방의 정규직 직원들처럼 직무 적성검사를 받고 시험보고 들어온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그 유명한 삼방의 집단토론 면접을 거친 것도 아니잖아?]
강시혁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어 영빈관 청소 일을 하는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스마트폰의 알림 톡이 울렸다.
용산 구청에서 보내온 알림 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