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예일대 교수 (1)
(84)
추석날 오후가 되었다.
강시혁이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였다.
강시혁은 준비해둔 봉투를 엄마에게 드렸다. 50만원이 든 봉투였다.
“이게 왠 돈이냐? 너 빚도 많이 남았을 텐데.”
“신용회복위원회에서 조정 받았어요. 매월 조금씩 갚아나가면 돼요.”
“그래도 그렇지.”
“받으세요. 요즘은 월급도 좀 올라서 저축도 좀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받아 둬요. 당신 옷이라도 한 벌 해 입어.”
엄마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봉투를 받았다.
“저, 그리고 다음 달에 일본 출장을 가게 될지 몰라요.”
“일본 출장?”
“일본 오사카에 있는 미술관 견학이에요. 문화재단 일과 관계가 있어서 가게 되었어요.”
“그으래? 너 처음에 들어갔던 아영테크란 중소기업보단 확실히 좋은 직장인 것 같다. 윗사람들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해라.”
“네.”
[윗사람 말 잘 듣지요. 제가 최하 말단이라 전부 모셔야 할 사람들만 있습니다. 나이도 동갑인 설운동 대리라는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저보다 나이도 어린 큐레이터 신종화란 여자도 상사로 모시고 있습니다.]
[관장이란 여자는 신종화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라고 합니다. 가정부가 부르면 즉시 달려가고 벤츠차를 모는 김 기사에게는 김 과장님이라고 부르면서 아부도 합니다. 오너의 가족들은 우리 조상님보다도 더 잘 모신답니다. 아버지가 사료회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으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이것으로 끝내면 아버지처럼 되겠지요. 이들을 발판으로 꼭 출세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엄마와 아버지는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강시혁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부모님이었다.
강시혁이 농협건물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그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시혁은 서울로 올라오는 KTX열차 안에서 이영남의 카톡을 받았다.
[형, 어디 있어요? 나 지금 영빈관에 와 있는데 문이 잠겨있네요.]
[아, 지금 고향에 갔다가 서울 올라가는 중입니다. 두 시간 정도 더 있어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럼 카페에서 있다가 두 시간 후에 들릴게요.]
강시혁이 저녁 어스름 무렵 영빈관에 도착했다.
역시 불 꺼진 영빈관은 황량해 보였다.
집은 아무리 크고 좋아도 사람이 살아야 온기도 있고 밝은 기운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강시혁은 영빈관 도착 후 전등을 모두 켰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공기를 순환시켜주었다.
얼마 후 이영남이 생글거리며 나타났다.
강시혁이 먼저 말했다.
“추석은 잘 지냈어요?”
“추석 같은 것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계신 곳에 가서 차례 지내느라 힘들었어요.”
강시혁은 아마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집과 같은 서민들은 간단하게 차례를 지내지만 재벌들은 틀림없이 거창하게 지낼 것으로 보았다.
더구나 창업 회장님 미망인이신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되어 크게 지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회장님 댁엔 사돈의 팔촌까지 친척들이 다 왔을 것이다.
이런 기회에 회장에게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둬야 국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영남은 본처 소생이 아니더라도 아들이었다.
틀림없이 회장을 대신해 제주(祭主) 노릇도 했을 것이다. 드럼이나 치던 놈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였다.
“아마 리틀 브라운 본가에는 추석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접대 하느라 힘들었겠어요.”
“금산 아줌마는 물론 삼방화학 화성공장 구내식당에 내려간 가정부 아줌마까지도 와서 일을 도와줬어요.”
강시혁은 자기가 솔선해서 그 집 앞에 가서 안내나 신발정리 같은걸 했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였다.
하지만 꼭 자기를 부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질 않았었다.
“그럼 리틀 브라운은 드럼이라도 치고 가세요. 스트레스는 날려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려고 왔어요.”
“저는 오늘 기타 안치고 바벨 운동을 할게요. 한 이틀 운동을 안했더니 몸이 근질거리네요.”
강시혁은 요즘 근육을 더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영진 상무의 경호원 노릇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영남이 바벨세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바벨은 몇 키로 자리에요?”
“20키로 자리입니다. 양쪽에 10키로 씩 20키로요.”
“저걸 몇 번이나 들어요?”
“보통 30번씩 합니다. 50번 할 때도 있고요.”
“저도 한번 들어볼까요?”
이영남이 두어 번 들다가 포기하고 물러났다.
들어 올리는 폼을 보니 사고 나기 꼭 알맞은 타입이었다.
[이놈이 이렇게 약골이었나? 뽕에 찌들었던 놈이라 영 맥을 못 추네.]
“저는 못하겠네요. 형이 한번 해봐요.”
강시혁이 바벨을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하였다.
들어 올릴 때마다 힘줄이 튀어나왔다. 이 모습을 이영남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강시혁이 10번 정도만 하고 바벨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리틀 브라운도 여기 와서 날마다 연습해 봐요. 처음엔 힘들지만 나중에 저처럼 잘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리틀브 라운 같았으니까요.”
“에이, 저는 드럼이나 치겠어요.”
그래서 이영남은 드럼을 치기 시작했고 강시혁은 다시 바벨운동을 했다.
강시혁이 바벨을 들어 올리면서 드럼 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노래소리도 들렸다.
이영남은 노래까지 부르며 드럼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이란 곡 같았다.
강시혁은 바벨 운동을 끝내고 이번엔 의자를 뒤로 눕히고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그러다가 이영남이 미국생활을 오래했으니 영어로 대화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혹시라도 그러면 영어실력이 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은 이영남이 한곡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접근했다.
“Shall I bring you some cool water (시원한 물이라도 가져올까요?)
“Okey Thank you. (고마워요).”
이영남이 생수를 벌컥대며 마셨다. 목이 말랐던 것 같았다.
전 같으면 이 집에서 드럼을 치면 할머니한테 야단을 맞았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옆에서 충실한 부하가 물까지 바치니 이영남은 이제 제 세상을 만난 듯싶었다. 그러니 얼굴이 점점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영남은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궁정의 시종장처럼 서있는 강시혁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Lat's have a drink later. (이따가 술 한 잔 하실래요?)“
“That sounds good. (좋아요).”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영어로 오고갔다.
학교에서 배운 고급단어는 강시혁이 많이 알아도 역시 발음은 조기유학을 했던 이영남이 훨씬 나았다.
“역시 발음이 좋네요.”
“형도 좋아요.”
‘내가 미국엘 가면 미국사람들이 내 말 알아들을까요?“
“알아들을 거예요. 그런데 사실 나도 잘하는 영어는 아니에요. 영어는 영진이 누나가 잘해요. 영진이 누나는 원래 공부만 하던 모범생이었으니까요.”
“매형인 홍 사장도 영어는 잘하지요?”
“홍 사장 이야기 하지마세요. 매형도 아녜요. 뽕쟁이일 뿐이에요. 지금 이혼 수속을 밟고 있잖아요.”
“에효,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요.”
“술 한 잔 하시죠. 이따가 하려고 했는데 지금 하죠. 내가 술 한 병 가져왔어요.”
그러면서 이영남은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슬링백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발렌타인이군요.“
강시혁이 술병의 라벨을 찬찬히 보고 크게 놀랐다.
“헉! 발렌타인 30년산!”
발렌타인 30년산이면 100만원도 넘는 고급술이다.
자기가 이번 추석에 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던 시바스리갈 12년산은 불과 5만원 자리였다.
강시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 이걸 어디서 났습니까?”
“아버지 집에서 한 병 가져왔습니다.”
“회장님 아시면 큰일 나시려고?”
“아버지 집에 이거 많아요. 추석이라 누가 또 20병을 가져왔어요.”
“그, 그래요? 그럼 가격만 2천만이 넘을 텐데?”
“우리 아버지한테는 껌 값이겠죠. 누구한테 선물한다고 한 병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뭐라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그거 가져가고 약이나 하지 말라 하시더군요.”
“하하, 그래요?”
“이번 추석엔 아버지가 그래도 저를 보고 좋아하셨습니다.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입니다. 형! 정말 내 얼굴 좋아졌어요? 나는 통 모르겠는데!”
“좋아 졌으니 좋아졌다고 했겠지요.”
“형 덕택에요. 요즘 여기 와서 드럼 친 이후부터일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한잔!“
그러면서 이영남은 발렌타인 30년산 병을 땄다.
이영남은 안주도 가져왔다. 슬링백에서 견과류와 육포 같은 것을 꺼냈다. 강시혁은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마시나 하였다.
한잔 마셔보았다. 달콤한 향이 입안에 돌았다.
향은 바닐라 향 같기도 하고 쉐리향 같기도 하였다. 여운이 입안에 돌았다.
[강시혁이 출세했네.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도 마셔보고! 이런 건 설운동 대리나 임창영 과장도 못 마셔봤을 거야!]
이영남이 강시혁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글거리고 말했다.
“난 형 얼굴만 봐도 좋아.”
“예? 그,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형, 여기 영빈관에서 오래 근무했으면 좋겠다.“
[여기서 오래 근무하라고? 잡급직 경비반장으로 오래 있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데? 돈은 언제 모으는데! 당신 같은 재벌아들이야 상속 재산도 천문학적 숫자이겠지만 난 아니네. 이 사람아!]
하지만 강시혁은 얼굴에 미소를 잔뜩 띠고 말했다.
“저도 잘리지 않고 오래 근무했으면 좋겠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한주가 흘렀다.
아직 여권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이번 주에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이 영빈관 마당에서 낙엽을 치우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이영진 상무였다.
“넵, 강시혁입니다.”
“이영진 상무입니다.”
‘여권은 신청했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알아요. 오늘은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이 아니고 손님 한분을 모셔야 할 것같이 전화했습니다.”
“옙,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손님은 현재 하얏트 호텔에 묵고 계신 미국인입니다. 내일 그분을 모시고 백석읍에 계신 박 변호사님 아버님을 만나게 해드리면 됩니다.”
“옙!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무료하게 영빈관이나 지키고 있는 것 보다 이런 업무가 더 좋았다.
바깥바람도 쏘이고 혹시 식사 때라도 되면 밥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너 가족의 심부름에 대해서는 문화재단이나 비서실에서 터치를 안 하기 때문에 그것도 또한 좋았다.
“내일 하얏트 호텔까지는 몇 시까지 가면 되겠습니까?”
“10시까지 가시면 됩니다. 손님은 빌리 휴즈 라는 미국인입니다. 박 변호사님이 로비에 나와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강시혁은 내일 모시게 될 빌리 휴즈란 사람이 누구일까 하였다.
박 변호사가 로비에 나온다니 박 변호사도 같이 가는 건가 하였다.
강시혁은 일단 설운동 대리에게 문자로 보고를 하였다.
[내일은 오전 10시부터 VIP지시에 따라 외국인 안내 업무를 합니다. 자리 이석을 하게 될 것 같아 보고 드립니다,]
답신이 왔다.
[잘 다녀오시고 갔다 온 결과는 업무일지에 따로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강시혁은 벤츠차를 끌고나와 휘발유도 만땅을 채웠다.
그리고 자동 세차장에 가서 세차도 말끔히 하였다.
관리실에 앉아있는데 박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옙, 변호사님!”
“나, 서초동 법무법인의 박 변호사요. 내일 강시혁 씨가 햐얏트 호텔로 오기로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 이영진 상무님 지시를 조금 전에 받았습니다.”
“내가 내일 호텔 로비로 나가죠. 오시는 분이 미국 예일 대학 원로 교수님인데 아버님이랑 잘 아시는 분입니다. 이번 한국에 온 김에 아버님을 만나시겠다고 해서.....”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고 백석읍까지 가겠습니다. 변호사님도 같이 가실 거죠?”
“난 안갑니다. 나는 바쁜 일이 있어서 호텔에서만 인사하고 갈 겁니다. 이후 강시혁 씨가 잘 모시고 갔다 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벤츠차도 지금 막 세차까지 해 논 상태입니다.”
“강시혁 씨가 오면 아버님도 편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럼 내일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