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비밀 경호원 (3)
(81)
삼방전자 사장이 서류를 들고 회장실로 갔다.
사장은 회장이 의자에 앉으라고 하지도 앉았지만 바로 의자에 앉았다.
오랫동안 회장과 친구사이처럼 지내왔기에 허물이 없는 것 같았다.
회장은 보던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변화하는 세계질서’ 라는 책이었다.
회장이 말했다.
“당신도 귀밑의 새치가 많이 느는 것 같군.”
“가는 세월이야 막을 수 있습니까? 미국의 전설적 투자가라는 레이 달리오가 쓴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 눈 안 아프십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방금 들어온 소식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여기에 왔던 중국 당서기가 귀국한 후에 바로 다음날 성 정부와 시 정부의 고위 간부들을 불러 회의를 했답니다.”
“그놈들도 빨리하고 싶겠지.”
“한중 합자사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토지 수용을 빨리 끝내라고 다그쳤다니 이달 중으로 농민보상은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벌써 사천성 성도신문에 기사가 나갔다고 하네요.
“기사가요?”
“성도시 외곽에 있는 황수진(黃水鎭)에 대규모 전자공장이 들어올 계획이라는 기사가 나갔다고 합니다.”
“한국 기자나 중국 기자나 냄새들은 잘 맞는군.”
“이게 기사 내용입니다.”
회장은 서류는 보지 않고 눈을 비비며 말했다.
“10만평이라고 했던가요?”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보다는 훨씬 작습니다. 무리하게 크게 투자할 필요는 없습니다. 공장 설립 후 경영정황을 보아가며 공장은 넓혀나가도 됩니다.”
“역시 전자사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타입이군. 그래서 우리 그룹이 너무 보수적이란 말을 많이 듣는 것 같습니다.“
“두드려 보는 것이 실패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요. 그래도 투자액이 1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거는 전자사장이 자금 동원능력을 고려해서 했겠지요.”
“중국 정부의 토지수용이 완료되면 회장님이 중국 사천성엔 한번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 이 일은 영진이가 추진하는 걸로 하고 싶어요. 무리하게 건설 회사를 인수하는 바람에 아직도 저렇게 시끄럽지 않소? 영진이도 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하지 않겠소?”
전자사장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야 영진 상무의 경영 능력을 세상이 다시 평가해 줄 겁니다.”
“중국 합자사 추진이야 전자 사장이 모두 밑그림을 그렸는데 영진이를 내세우는 것도 내가 면목은 없습니다. 영진이는 다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격이니 말이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액의 투자야 항상 최종적 판단은 회장님이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사후에 내 자식 놈들이 그룹을 잘 이끌어갈지 그게 항상 걱정이요.”
“삼방그룹 계열사 전체 정규직원이 5만 명이 넘습니다. 영진 상무를 보좌할 숨어있는 젊은 인재는 많으리라고 봅니다.”
전자사장이 회장실을 나갔다.
회장은 짧은 한숨을 쉬고나서 이영진 상무를 불렀다.
“너, 내 방으로 좀 와봐라.”
“네. 알겠습니다.”
이영진 상무가 회장 방으로 왔다.
“앞에 앉아라.”
이건용 회장은 일종의 딸 바보다.
앞에 앉은 이영진 상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혼 후 잘 살았으면 좋았겠는데 어디서 약쟁이를 만나 이혼 수속을 받는다니 마음이 아려왔다.
“너 우리가 중국 사천성 성도에 전자공장을 합자 형태로 설립하는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투자 금액이 얼마인지 알지?”
“10억 달러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10억 달러를 지금 통장에 넣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자 사장이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 하는가 잘 봐라. 그런 게 네가 배워야 할 것 들이다.”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한꺼번에 10억을 발행하는 건 아니다. 바로 주가폭락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여러 번 나누어 발행할 계획이다. 전자는 자산규모나 매출이 많으니 나누어 발행하는 것은 주가에 영향을 많이 미치지 못한다.”
“전자 사장님 옆에서 많이 배우도록 할게요.”
“우리가 왜 성도에 공장을 세우려고 하는지 알겠지?”
‘대도시 옆이라 인력을 구하기도 쉽고 생산제품이 전량 중국 판매용이라 그렇게 결정한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지. 성도시는 일개 시지만 면적은 우리나라 경기도보다도 크다. 그리고 인구도 2천만 명이 넘어간다.”
“정말 대국이네요.”
“여기에 세울 공장의 부지 면적은 자그마치 10만평이다. 지금 이 땅에 주민들이 살고 있어 중국 정부에서 수용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삼방전자 사장이 조만간 중국에 갈 텐데 너도 따라가도록 해라.”
“제가요?“
“아마 회장 딸이 왔다고 하면 중국 정부에서도 달리 볼 것이다.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거니까.”
“그렇겠네요.”
“내가 가도 되지만 배운다는 차원에서 네가 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가기 전에 일본을 먼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놈이 널 오라고 하더냐?”
“그렇습니다. 제가 와야 협의이혼 의사 확인 신청서에 날인을 해주겠답니다.”
“다른 요구사항은 없고?”
“오면 저에게 말하겠답니다.”
“그러면 누구랑 갈 건가? 혼자는 절대 안 보낸다. 지난번처럼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변호사와 같이 갈 겁니다.”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말이냐?”
“저의 사건을 맡은 이혼전문 변호사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육아문제가 있어 해외출장을 꺼립니다. 그래서 박 변호사가 대신 가기로 했습니다.”
“서초동 법무법인의 박 변호사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혼자가지고 널 보호하겠냐? 일본 경시청이나 아니면 사설 보안회사에 보안요원이라도 파견해 달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약에 중독된 놈들은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놈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안요원은..... 생각 좀 해보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상서원 경비 반장이라도 데려가든지 해라. 그놈은 전에 홍 서방에게 맞고도 참았던 놈이 아니냐?”
“강 반장 말입니까?”
“그놈이 정말 힘으로 한다면 약으로 찌든 홍 서방한테 맞겠냐? 참을성이 대단한 놈 같으니 그놈을 데리고 가던지 해라.”
이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이영진 상무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이미 아는 사람이라 편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홍 사장이 폭력을 휘두를 때 그놈이 맞아준다면 오히려 우리가 합의하는데 유리하겠지. 하지만 그놈이 너에게 손을 댈 때는..... 그때는 내가 책임질 테니 인정사정없이 몽둥이찜질을 해주라고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놈은 영어도 할 줄 안다니 해외 데리고 나가도 써먹을 데가 있겠지.”
“하지만 추석이 곧 닥치니 일본 출장은 추석이 지나면 가도록 할게요.”
“그렇게 해라. 그런데 추석 전에 장명건설 시위하는 거나 끝났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홍가 놈을 만나면 그렇게 이야기해라. 우리가 무리하게 장명건설을 인수해서 지금 삼방그룹 이미지가 말도 아니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 같자 회장은 또 딸이 안쓰러웠다.
“너 혼자 큰집에서 남편도 없이 외롭지?”
“금산 아줌마도 계시고 영남이도 자주 놀러오기 때문에 괜찮아요.”
“정 있기 힘들면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와라. 우리하고 합치자.”
“괜찮아요.”
“영남이 때문에 그런 모양이구나. 네가 우리 집에 들어오면 영남이란 놈이 잘 안 오겠지. 네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걸 알고 나서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녀석이니까!”
토요일이 되었다.
이영남이 영빈관으로 왔다.
“형! 오늘은 시간 있다고 했죠?”
“예, 있습니다.”
“그럼 같이 나가죠.”
“그런데 어딜 가는 겁니까?”
“점심 먹으러요.”
“그런데 점심은 아무 때나 먹으면 되지 그렇게 시간이 있느냐고 거창하게 물어요?”
“실은 오늘 내 친구들하고 식사를 합니다.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죠. 그러니 형은 옆에서 무게만 잡고 있으면 됩니다.”
[혹시 일진 애들이라도 만나나?]
“뭐, 그거야 어렵지 않죠. 그런데 친구들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건달이죠.”
[일진이 맞는 것 같네.]
“그, 그래요? 그런데 그놈들이 리틀 브라운을 괴롭히고 있나요?”
“자꾸 어딜 투자하라고 해서 피하는 중입니다. 돈보다도 그놈들과 같이 있는 게 싫어서요.”
“그렇군요.”
“그런데 형 얼굴이 쪽팔리기 싫으면 선 그라스라도 끼고 가세요.”
선 그라스는 얼마 전에 이영진 상무가 준 돈으로 하나 산 것이 있었다.
그동안 쓰고 밖에 나가질 않았는데 이럴 때 한번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 그라스를 끼고 이영남을 따라갔다.
이영남은 옆에 보디가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팔자걸음으로 이태원 거리를 걸었다.
이영남은 경양식 집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 세 놈인데 한눈에 보아도 양아치 같은 놈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명은 팔뚝이 강시혁보다도 굵고 가슴도 벌어져 아주 암팡지게 생긴 놈이었다.
강시혁은 좀 불안했다.
저놈들이 혹시라도 리틀 브라운에게 폭력을 가하면 어쩌나 하였다. 자기가 끼어들어도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강시혁은 폭력을 휘두르며 놀던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 때 알바를 많이 해서 노동으로 단련된 몸과 최근에 바벨 운동을 한 것이 전부였다.
태권도나 유도 같은 운동의 유단자도 아니었다.
설사 저놈들을 때려도 골치 아프고 맞아도 골치 아플 것 같았다.
[오너의 아들이라 보호는 해줘야 하는데....... 세 놈이나 되고 노는 놈들 같으니 오늘 내가 잘못 걸린 것이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때린다면 저놈들은 나를 폭행으로 고소할 것이고 내가 맞으면? 그대로 재수 옴 붙는 결과가 되겠지.]
[재벌한테 맞으면 한 대에 백만 원이라도 받아낼 수 있지만 저놈들한테 맞으면 말 그대로 일진이 사나운 거겠지.]
서로 엉켜 싸운다면 쌍방폭행으로 걸려 들어갈 확률이 많았다.
그것은 대리기사 일을 할 때 당해봐서 알고 있었다.
잠실에서 분당 정자동까지 대리 기사 일을 할 때였다.
그때 BMW를 운전했었다.
술 취한 손님이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다 왔다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손님이 느닷없이 강시혁의 따귀를 쳤다.
“이 개새끼가 누굴 치는 거야?”
강시혁도 화가 났다.
그래서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잠 깨우려고 흔들었지 너를 언제 쳤어!”
“어, 이 새끼가 사람 목을 조른다!“
그러면서 손님은 또 갑자기 강시혁의 팔을 물었다.
그래서 강시혁이 머리로 받았다.
이렇게 되어 치고받고 싸우자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이 왔다.
쌍방 고소까지 갔었는데 나중에 술 깬 손님도 귀찮은지 고소를 취하했다.
그날 이 사건 때문에 강시혁은 일을 못했다. 그날 수입을 망쳤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참고 술 취한 진상 손님들에게 고분고분 해줬었다.
싸우면 손해인 것을 터득한 것이다.
강시혁은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더구나 내일은 전기기능사 실기시험을 보는 날이다. 괜히 싸움이 붙어 경찰이 오라 가라하면 시험 보러 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제기럴! 어제 꿈자리가 사납더니! 에이, 경양식집에 왔으니 밥이나 먹자!]
그래서 강시혁은 한자리 건너편에 앉아 돈가스를 주문했다.
이영남의 친구들이 흘끔흘끔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강시혁은 웃옷을 의자에 걸치고 문신이 보이게끔 하고 다리를 꼰 채 밥을 먹었다.
이영남의 친구들이 스파케티를 먹으며 이영남에게 물었다.
“같이 온 사람이 누구니?”
“보안업체 직원이야. 귀찮아 죽겠어. 우리 아버지가 붙여주었는데 옆에 따라다니니까 불편해?”
“전직 경찰인가?”
“그건 모르겠어.”
“너 정말 우리가 하는 사업에 투자 안할 거야?”
“돈 없어. 우리 아버지하고 내가 사이가 나쁜 것 너희들이 알잖아.”
“너 많이 변했다. 이러면 재미없을 걸?”
“미안하다.”
“우리가 그냥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클럽 인수하는데 투자하고 이익금 나눠먹자는데 뭐가 잘못되었나?”
“알아. 그런데 돈이 없어.”
“이 새끼가!”
그러면서 암팡지게 생긴 놈이 주먹을 들었다가 강시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선 그라스를 낀 강시혁의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여유가 만만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