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삼방전자 사장 (2)
(78)
강시혁이 한약재와 인삼이 들어간 대추차를 가져왔다.
전자 사장이 당서기를 바라보며 또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 대추차에는 한국의 청정지역에서 생산한 각종 약재와 고려인삼이 들어가 있습니다.”
“호, 귀한 차인 것 같군요.”
강시혁은 속으로 웃었다.
금산 인삼을 고려 인삼으로 둔갑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전자 사장이 또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드시면 정력에도 아주 좋습니다.”
“객지에 나와서 정력이 좋아봤자 지요.”
그러면서 서로 또 웃었다.
이럴 때 마다 통역인 엄 차장은 열심히 통역을 했다.
엄 차장은 자기 앞에 놓인 대추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통역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 차장은 두 사람이 말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를 하며 통역을 했다.
그런데 메모하는 것이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
강시혁은 크게 놀랐다.
[중국어로 메모를 하네!]
강시혁은 영어를 공부한 사람이다.
자기도 저렇게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빠르게 메모해가며 순차통역을 할 수 있을까 했다.
엄 차장이나 비서실 임 과장 등은 확실히 삼방그룹의 인재들이었다.
그래서 삼방그룹이라는 대기업에서 과장도 하고 차장도 하는구나 했다.
자기가 만약에 회장의 눈에 들어 계열사 직원으로 심어준다면?
아마 인재들 많은 곳에서 빛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은 회의가 열릴 때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벽 쪽에 섰다.
그리고 로봇처럼 꼿꼿이 서서 흰 수건을 팔에 걸고 대기했다. 서빙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 이것은 자기의 의무라고 여겼다.
중국인들이 대추차를 마셨다.
그런데 대추차는 말린 대추나 인삼 같은 것을 갈아서 분말로 만들어 탄 차였다.
약간 걸쭉해서 그런지 중국인 한사람이 강시혁을 불러 뭐라고 하였다. 중국말이라 강시혁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I'm sorry. I don't know Chinese. I know English.
(죄송합니다. 저는 중국어를 모릅니다. 영어는 압니다.)
그러자 엄 차장이 말했다.
“생수를 달라고 하네요.”
“아, 알겠습니다.”
강시혁이 얼른 생수를 유리컵에 따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그리고 절도 있게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중국인들이 탱큐 라고 말했다.
회의는 길어졌다.
같은 말도 중간에 통역을 끼어서 하니 시간이 배로 걸렸다.
강시혁이 들으니 삼방전자에서 자본과 기술과 장비를 투입하고 중국 정부는 토지 10만평을 제공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흠. 중국에다 공장 세우면 한국보다 인건비가 싸게 먹히니 값싼 제품을 만들어 내겠군. 그리고 중국은 고용확대가 되니 서로 윈윈이겠네.]
강시혁은 자기도 공부를 하기위해서 회의 내용을 열심히 들었다. 또 태어나서 이런 구경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가끔 경영에 관련된 용어가 튀어나와 이 방면에도 공부 좀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경영학과 출신들을 많이 뽑는구나 하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엄 차장이 싸인을 보냈다.
“강 반장. 중국차 준비해 주세요.”
강시혁이 큰 유리컵에 용정차를 타서 쟁반에 받쳐 들고 내왔다.
뜨거운 물에 탄 차이므로 흰 장갑을 끼고 서빙을 하였다. 그것이 더 위생적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오우, 롱칭차(용정차)!”
중국인들은 자기네 나라의 차가 나오니 반가운 모양이었다. 안색이 달라지며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나갔는데 숭늉이나 보리차가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나라 음식을 먹어 속이 불편한데 자기네 차가 나오니 굉장히 좋아했다.
중국인들은 차를 마시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강시혁은 엄 차장이 미리 말해준대로 찻물이 떨어지면 다시 물을 부어주었다. 여러번 우려서 마셔도 되는 차인 것 같았다.
당서기가 전자 사장을 쳐다보며 강시혁에 대하여 말했다.
“이 젊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꼿꼿하게 서 있군요. 의자에 앉지도 않고 말입니다. 복무태도가 아주 좋습니다.”
“허허. 그래요? 삼방전자 직원들은 원래부터 복무태도들이 좋습니다.”
강시혁이 듣고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삼방전자 직원? 나는 문화재단 소속인데! 이 양반 능청스럽기는 정말 대단하네.]
당서기가 강시혁의 우람한 가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젊은이는 운동을 좀 한사람 같네요.”
전자사장이 또 능청을 떨었다.
“그 사람이 원래 태권도 선수 출신이요. 각종 대회에 나가 금메달도 여러 개 딴 사람입니다.”
“호, 그래요?”
놀란 것은 중국인뿐만이 아니었다.
엄 차장도 놀란 눈으로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강시혁이 이 말은 민망스러웠다. 못들은 체 하고 얼른 주방으로 갔다.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가 보내온 과일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깎아서 내왔다.
두 접시에 나누어 내왔다.
과일을 먹은 중국인들이 맛있다고 난리였다.
“호, 한국 과일이 이렇게 맛이 있군요.”
회의 하느라고 입안도 텁텁하고 마침 저녁때도 가까워 배도 고플 때였다. 맛이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의는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거의 끝날 때쯤 된 것 같았다.
당서기가 아닌 중국 측 사장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한국 삼방전자의 시설과 기술력, 그리고 재무상태를 파악했습니다. 옆에 계신 당 서기께서도 삼방은 우량기업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인허가에는 문제가 없을듯합니다.”
이번엔 삼방전자 사장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자금조달 문제는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전환사채라도 발행해서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자하는 10만평 토지에 대한 원소유주들의 민원이 없게끔 정리를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근간 삼방전자의 회장님도 우리가 제공하는 공장 부지를 둘러보셨으면 합니다.”
“회장님께서 가시지 않더라도 그 따님인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시혁은 속으로 이런 합자(合資) 계약은 최종적으론 회장과 이영진 상무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였다.
대주주는 그들이니까 수십억 달러의 투자 결정권은 그들이 가지고 있구나 하였다.
모두 악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서기가 벽 가까이 서있는 강시혁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샤오펑요(젊은 친구)! 수고 많이 했어요.”
강시혁이 절도 있게 인사를 해주었다.
이어서 같이 온 중국인 사장과 임원도 악수를 해주었다.
삼방전자 사장은 강시혁의 어깨까지 두드려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과일까지 준비를 한걸 보니 많이 늘었어. 자네는 지금처럼 하면 되네!”
전자사장은 또 지금처럼 하면 되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수고한 사람은 강시혁이 아니라 쉬지 않고 통역을 한 엄 차장 같았다.
강시혁이 엄 차장에게 말했다.
“오늘 제일 많이 수고하신 분은 차장님 같았습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아니요. 계속 서있는 당신이 더 고생했지. 그런데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 과일까지 준비했으니 고마워요.”
“하하. 원래 있던 과일입니다.,”
“그런데 태권도가 몇 단이요?”
“예? 그, 그것이...... 조금 밖에 안했습니다.”
“조금 밖에 안 했다면 한 3단 되는 것 같군. 어쩐지 체격이 좋다고 했습니다. 벤츠차는 우리가 식당에 갔다가 끝날 때 쯤 가지고 오면 됩니다. 내가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강시혁은 조금 섭섭했다.
다들 저녁 먹으러 가는데 자기를 데려가지 않아서였다. 물론 같이 가자고 해도 따라가지 않았겠지만 경비 반장이라 무시하는 건가 하였다.
[내가 가면 대화에 낄 수도 없고 그래서 안 데리고 간 것 같군. 또 영빈관 정리도 있어서 그런가?]
강시혁은 문을 잠그고 방금 전까지 회의했던 접견실로 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먹다 남은 과일을 으적거리며 먹었다.
강시혁은 회의장을 대충 정리하고 지하실에 있는 관리실로 내려왔다.
여기 책상 앞에 앉았을 때가 제일 마음 편하고 안정감이 들었다.
강시혁은 저녁을 먹고 영어회화 공부를 했다.
노량진 학원에 가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다.
밤 9시경 엄 차장이 전화를 했다.
“엄 차장입니다. 지금 벤츠차를 가지고 이태원 메인도로에 있는 우리은행 앞으로 와주세요. 리움 미술관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은행입니다.”
“어딘지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강시혁이 벤츠차를 끌고 가니 전자사장과 임원은 들어가고 중국인 세 사람과 엄 차장이 있었다.
“이분들 숙소인 하얏트 호텔로 바로 가지 말고 남산 한 바퀴 돌고 갑시다.”
“알겠습니다. 서울 야경은 한번 봐야겠지요.”
강시혁은 남산 서울타워 입구까지 올라가 중국인들에게 서울 야경을 구경시켜주었다.
중국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중국인 손님들을 하얏트 호텔에 모셔주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이제 차에는 강시혁과 엄 차장만 남았다.
“차장님 댁은 어디십니까?”
“나는 이태원역에서 내리면 됩니다.”
“댁에까지 모셔드려야죠.”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태원역에서 지하철 타고 가겠습니다.”
“자택이 어디십니까?”
“마포입니다. 공덕동에 삽니다. 이태원 역에서 6호선 타면 바로 가니까 차로 갈 필요 없습니다.”
강시혁이 이태원역에서 엄 차장을 내려주었다.
엄 차장이 봉투 하나를 주며 말했다.
“삼방전자 사장님이 강 반장에게 주라고 한 겁니다. 오늘 수고 많았습니다.”
“아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엄 차장은 대답도 않고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 2번 홈으로 사라졌다.
영빈관에 돌아와 차를 주차시키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20만원이 들어있었다.
[과일 한번 깎아주고 20만원 받았으니 횡재했네.]
다음 날은 이영진 상무가 차를 쓰겠다고 한 날이었다.
강시혁은 오후 2시쯤 차를 가지고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갔다.
양복에 티셔츠를 받쳐 입고 몸에 향수도 뿌렸다.
차를 이영진 상무 집 앞에 주차시키고 기다렸다.
이영진 상무의 전화가 왔다.
“지금 우리 집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미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실크스카프를 목에 두른 이영진 상무가 나타났다.
요즘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핏기 없는 얼굴이 더 창백해 보이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얼른 나와 차 문을 열어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상무님.”
“전에 갔던 용인 묘소 알지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묘소에요.”
“옙,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기일(忌日)입니까?”
“기일은 아닙니다. 그냥 찾아뵙고 싶어서요.”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또 묘소 앞에 가서 울고 오려고 그러는가 하였다.
그래도 이런 일에는 자기를 불러주니 고마웠다. 이런 일에는 자기의 전용기사인 김 과장을 부르지 않고 자기를 불렀으니 말이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와 이것저것 대화를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오너의 딸을 모시고 가면서 주제넘게 말붙이는 것도 결례이기 때문이었다.
가끔 룸미러로 이영진 상무의 안색이나 살폈다.
이영진 상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강시혁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그대로 멈추지 말고 달리고 싶었다.
이영진 상무와 같은 아름다운 여성을 모시고 간다면 서울서 부산까지도 쉬지 않고 갈 것 같았다.
용인 골프장 뒤쪽에 있는 묘소 입구까지 왔다.
“저는 차에서 기다릴까요?”
“아니, 같이 가죠. 트렁크에 있는 돗자리만 반장님이 들고 가시면 됩니다.”
“옙. 알겠습니다.”
오늘은 음식이나 향을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일이 아닌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묘 앞에서 강시혁이 얼른 돗자리를 펴주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소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마주잡고 섰다.
이영진 상무는 돗자리위에 앉아 산소를 바라보며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만 있었다.
강시혁은 아마도 이영진 상무가 창업회장님께 힘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팎으로 요즘 시달리니까 조상이 보호해달라고 비는 건가? 창업 회장님이 삼방의 후계자감은 이영진 상무라고 했다는데 힘을 실어달라고 비는 것이 틀림없겠네.]
하지만 강시혁의 추측은 틀렸다.
오늘 온 것은 이영진 상무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골라준 배우자를 이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눈물로 고하는 자리였다.
일반인들이야 먹고 살기 바빠서 조상에 대한 예법을 잘 따지지 않지만 재벌들은 오늘날에도 가례를 잘 지켰다.
이영진 상무가 일어났다.
눈물자국이 있는 것 같았다.
“가시죠.”
강시혁이 돗자리를 말아 옆구리에 꼈다.
앞서 내려가는 이영진 상무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이영진 상무의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주변에 있던 코스모스 꽃잎들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이를 바라보는 강시혁의 마음 또한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