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삼방전자 사장 (1)
(77)
이영남이 고기를 먹으며 피식 웃었다.
변상철이 대뜸 반응하였다.
“이봐, 리틀 브라운! 왜 웃는 거야?”
“형 눈썰미가 약해 보여 웃었습니다.”
“약해 보이다니? 이 사람이 형들 앞에서 시니컬한 웃음만 짓네?”
변상철은 이영남의 신분을 모르기 때문에 막 대했다. 그러나 강시혁은 이영남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삼방그룹의 아들이고 자기는 잡급직 경비 반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변상철은 자주 반말을 했지만 강시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히 그렇게 되어갔다.
동물의 생존 전략일 수도 있었다.
“형은 내가 웃는 이유를 몰라요?”
“몰라. 미국 가서 공부 많이 하고 왔다는 네가 말해봐.”
“형은 경찰관이 된다고 했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지?”
“아까 TV에 나온 배우 K의 머리는 가발이에요. 범인 잡는 경찰관이 되려면 그런 부분을 놓치면 안 되겠죠.”
“정말 가발일까?”
“틀림없습니다. 머리를 하얗게 백구치고 그 위에 금발 가발을 한 거지요.”
“그런가?”
“머리털이 검사에 걸리니까 밀고 들어온 겁니다. 머리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머리털에 남아있는 약의 성분은 이미 사라졌겠지요. 검출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털은 머리털만 있나? 겨드랑이 털도 털이고 종아리 털도 털이고 거시기 털도 털인데?”
“거기도 다 면도로 밀고 들어왔을 겁니다.”
“설마.”
“그게 구속되는 것 보다는 낫지요. 구속되면 연예인으로서는 인기 급락이니까요.”
“리틀 브라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 역시 약에 대해서는 박사네. 미국에서 약을 많이 접해본 사람 같네.”
“한때 손을 대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월요일이 되었다.
강시혁은 평소대로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바벨 운동을 하였다. 이제는 50번 이상을 하였다.
숨을 몰아쉬고 거울의 자기를 보았다.
확실히 전보다는 가슴이 많이 나온 것 같기는 하였다.
팔뚝에 힘을 주어보기도 하였다.
팔뚝에 그려 논 문신이 움직였다. 남성미가 더 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강시혁은 반바지만 입은 채 마당으로 나갔다.
잔디가 깔린 넒은 마당에서 고등학교 때 배운 태권도 동작을 해보았다.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같은 동작을 해보았다.
고단자가 보면 꼴값 하네 라고 하겠지만 여기는 보는 사람도 없고 장소도 넓어 휙휙 발을 뻗어가며 마음껏 연습했다.
요즘엔 마당에 청소를 많이 한다.
왜냐하면 가을이 되면서 낙엽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으면 또 까칠한 관장이 와서 잔소리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일이 돌아다니며 낙엽을 치웠다.
관리실에 들어와 소소한 소모품을 산 품목과 금액을 컴퓨터 엑셀에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비서실 임창영 과장이었다.
“내일은 영빈관, 아니 상서원을 쓸 일이 있습니다. 영빈관이 입에 붙어서 상서원이란 말이 잘 안 나오네.”
“하하. 여기서도 모두들 그냥 영빈관이라고 많이 부릅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높은 사람들 오시면 상서원이라고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어느 분들이 오십니까?”
“중국의 성(省) 정부 당서기(黨書記)와 중국 전자회사 회장님이 오십니다. 현재 하얏트 호텔에 묵고 계십니다.”
“아, 그럼 청소를 깨끗이 해놓겠습니다.”
“우리 측에서는 회장님은 가시지 않습니다. 호스트 역할은 삼방전자 사장님이 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도 내일 오십니까?”
“저는 영어권 인사들이 올 때나 갑니다. 이번에 전자 사장님을 수행하는 사람은 전자 신규사업부의 엄 차장이란 분이 할 겁니다. 북경대학을 나오신 분입니다.”
“알겠습니다. 중국어를 굉장히 잘 하시는 분이겠군요.”
“고등학교도 상하이 국제학교를 다닌 분이라 반 중국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강 반장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으니 전화가 갈 겁니다.”
“알겠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우리 그룹으로서는 중요한 손님들입니다. 실수 없이 잘 모시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전화를 끊고 문화재단에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문화재단 설운동 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대리님? 강시혁입니다.”
“급한 용무 아니면 문자로 해주셔도 됩니다.”
“내일 삼방전자 사장님이 영빈관에서 손님을 모신답니다. 그럼 자세한 것은 문자로 보고하겠습니다.”
“자, 잠깐요! 그럼 삼방전자 사장님 외에 어느 분들이 오신답니까?”
강시혁은 ‘문자로 보고하라면서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왔지만 꾹 참고 사근사근하게 말해줬다.
“중국 성 정부의 당서기와 중국 전자회사 회장님이 오신답니다. 현재 하얏트 호텔에 묵고 계신답니다.”
“당서기요? 그럼 공산당 서기인가? 중국은 당서기가 최고라던데!”
“그것까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회의는 몇 시죠?”
“시간은 아직 미정입니다. 삼방전자 신규사업부의 차장님 한분과 조율 중에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접대 잘 하시고 나중에 자세한 것은 업무일지에 보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리님!”
얼마 후에 관장이 전화를 했다.
[그러면 그렇지. 설운동 대리에게 보고 받았으니 이 여자가 나에게 전화 안할 리가 없지.]
“강 반장이요? 나요.”
“예, 관장님.”
“삼방전자 사장님과 중국 손님이 영빈관에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예, 들었습니다.”
“접견실 청소를 잘해놓고 화분에 꽃도 갈아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가을이라 마당에 낙엽이 많이 떨어졌을 거예요. 모두 다 깨끗이 치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강시혁은 피식 웃었다.
[업무일지에 한줄 써줘야겠군. 삼방전자 손님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관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이 있었다고 말이야. 그래야 이 여자가 결재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겠어?]
이번엔 삼방전자 신규사업부의 엄 차장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삼방전자는 신규사업부라는 부서가 있는 것을 보니 신규 사업을 많이 벌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강 반장이십니까? 나는 삼방전자 신규사업부의 엄민상 차장입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영빈관 경비 반장 강시혁입니다.”
“혹시 비서실 임창영 과장의 전화를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내일 사장님께서 중국 손님을 모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방전자 사장님께서 중국 손님을 모실 예정입니다. 오후 4시에 영빈관서 회의를 하시고 오후 6시에 이태원의 음식점으로 모실예정입니다.”
“오후 4시로 알고 청소를 해놓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손님 접대용 벤츠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녁에 한번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사용해? 그럼 내가 내일은 노량진 학원엘 못 가겠는데?]
“차를 사용하는 문제는 제가 결정권이 없습니다. 문화재단의 사무국장과 협의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영빈관이 비서실 소속이 아니고 문화재단 소속인가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무국장과 상의하겠습니다.”
강시혁은 모레 수요일에는 이영진 상무가 차를 쓴다고 하였었다.
중국 사람을 영빈관에 모시는 일은 내일이라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게 되는 삼방전자 사장은 강시혁도 뵌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회장의 오른팔이라고 하는 삼방의 2인자라고 하였었다.
강시혁은 언젠가 이 사장이 자기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바로 ‘자네는 지금처럼 하면 되네.’ 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자네는 얼굴이 좋아졌군' 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재백궁(財帛宮)의 빛이 밝아지고 있군’ 이라고도 했었다.
강시혁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재백궁을 검색해 보았다.
재백궁은 코의 별칭으로 여기의 기운이 맑아야 재물이 모인다고 했었다. 그리고 콧방울이 크고 안이 보이면 재물이 다 빠져나가는 팔자라고 되어 있었다.
강시혁은 얼른 화장실에 가서 거울에 자기 콧구멍을 보았다.
콧구멍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코 하나는 잘생겼지. 그런데 큰 편은 아닌 것 같네. 언니는 형부가 코가 커서 좋겠네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강시혁은 전자 사장이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말이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삼방전자 신규사업부의 차장이라는 사람이 영빈관으로 왔다. 직원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차장이라는 사람은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임창영 과장이 반 중국 사람이라고 소개를 해서 그런지 정말 중국인같이 보이기도 했다.
차장이 영빈관을 둘러보고 말했다.
“좋습니다. 회의하기 딱 좋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우리가 중국차인 용정차를 준비했습니다.”
“영빈관이 자랑하는 대추차가 있는데요?”
“그것도 처음에 내놓으시고 두 번째로 중국 용정차를 내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뜨거운 물이 떨어지면 계속 채워줘야 합니다.”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습니다. 서빙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차를 쓰는 문제는 문화재단 사무국장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밤 9시경에 이태원의 민속 쇼하는 집 앞에서 하얏트 호텔 앞까지 모셔다 드리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긴 거리는 아니네요. 그런데 이태원 같은 클럽 거리에 민속 쇼 하는 데가 있었군요.“
“이태원에 계시면서 몰랐어요? 건물 지하에 있는 술집인데 한복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부채춤도 추고 가야금 연주 같은 것도 합니다. 나중에 한번 가보세요.”
“정말 한번 가봐야겠군요.”
“그런데 클라이막스에 오르면 춤추는 무희들이 옷을 벗고 추기도 합니다.”
“옷을 벗어요?”
“뭐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차장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관광수입을 올리려고 좀 야한 것을 하는 모양이네.]
“중국 손님들이 좋아하겠네요.”
“이번에 오는 중국인은 잘 모셔야합니다. 중국 현지 전자공장 설립에 허가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다음날 오후가 되었다.
강시혁은 양복을 갈아입고 흰 와이셔츠에 몸에 향수까지 뿌리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대문 밖에 차 소리가 들렸다.
강시혁이 뛰어나가서 차 문을 열어주었다.
삼방전자 사장이 내리면서 강시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굴 좋아졌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사장 옆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임원인 것 같았다.
뒷 차에서는 차장이라는 사람이 먼저 내려 뒷문을 열어주었다.
세 사람이 내렸는데 한 사람은 60대였고 두 사람은 50대였다.
60대는 유행이 지난 검정 뿔테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남자이고 두 사람은 뚱뚱했다.
50대중 한사람은 금테 안경을 낀 사람이었다.
삼방전자 사장이 뿔테 안경에게 말했다.
“당서기 선생! 여기가 바로 삼방그룹 창업자가 사시던 집입니다. 지금은 영빈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얼른 차장이 통역을 했다.
강시혁은 저 뿔테 안경이 그 유명한 공산당 서기구나 하였다.
무섭게 생긴 줄 알았는데 꼭 중학교 교감 선생님처럼 생겼다.
마당으로 들어서며 당서기가 말했다.
“훌륭한 집이군요. 관리도 잘되어 있군요. 삼방의 발원지가 여기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감회가 새롭다니 고맙습니다.”
당서기가 영빈관 현관위에 붙은 현판을 보았다.
“시앙루이위엔(祥瑞園: 상서원)?”
“저희 회장님이 지은 영빈관 이름입니다.”
“하오(좋습니다.)!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국에도 상서원이란 이름이 붙은 지명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상서원은 원래 무지개 구름이 출현하고 바람과 비가 적당히 알맞아 만물이 소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화생쌍수(禾生雙穗)의 뜻이 있죠.”
“화생쌍수요?”
“벼 이삭이 쌍으로 열린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서 회담을 하니 오늘 우리들 합자 이야기도 쌍으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방금 당서기께서 바람과 비가 알맞다고 풍조우순(風調雨順)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하하 웃었다.
강시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역시 거물들은 유식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죽었다 깨도 저런 표현은 못할 것 같았다.
이영진 상무도 비즈니스에서 능글맞게 이런 대화는 못하리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