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돌아온 그녀 (1)
(72)
강시혁은 밥을 먹고 예술의 전당 주차장으로 갔다.
벤츠차 운전석에 앉아 스마트 폰이나 봤다.
기왕이면 영어공부 겸해서 동영상으로 미국 드라마를 보았다.
한참 보고 있어도 회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강시혁은 오히려 늦게 끝났으면 했다. 그래야 벤츠차 안에서 미국 동영상이나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설운동 대리나 사무국장과 인턴들은 회식자리가 괴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과 중국인은 영어를 하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관장과 신종화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오늘의 회식은 관장의 독무대나 다름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호호 하는 관장의 목소리가 벤츠차 안까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계속 동영상을 보았다.
동영상에서 웃기는 장면이 나와 킥킥대고 있는데 누가 차창 문을 두드렸다. 설운동 대리였다.
“강 반장, 손님들 가신답니다.”
그래서 얼른 차에서 나와 뒷문을 열고 기다렸다.
술기운에 얼굴이 발그스름한 일본인과 중국인이 나타났다. 중국인이 강시혁에게 영어로 물었다.
“왜 우리들이랑 같이 식사를 안했습니까?”
“홀에서 먹었습니다.”
“오, 그래요? 중국은 회식할 때 기사들도 사장이나 회장 옆에서 같이 식사합니다. 사장이나 기사는 다 같이 공작업무를 하는 동지들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공산주의 국가의 인권이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시혁이 앉아서 시동을 걸자 관장과 국장, 신종화 등이 왔다.
관장이 또 금테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강 기사, 아니 강 반장! 이 분들 내일 인천공항까지 모셔다 드리세요. 10시까지 호텔로 가면 될 겁니다.”
“넵, 알겠습니다. 관장님.”
“그리고 오늘은 이분들 모셔다 드리고 다시 여기 오는 것 알죠?”
“압니다. 그림 반출 날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없더라도 반출 하는 것은 신종화씨 지시받고 일하면 됩니다. 흠. 흠.”
[신종화의 지시를 받고 일해? 이봐요, 관장 아줌마! 내가 신종화보다 나이가 서너 살 위일 거요. 신종화와 상의해서 하라고 하면 몰라도 꼭 지시받고 하라면 되겠어요? 이 브르주아 아줌마야!]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마음뿐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반출하는 것은 신종화 씨 지시받고 하겠습니다.”
“그럼 얼른 가 봐요.”
그러면서 관장은 일본인과 중국인에게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나까무라상 사요나라! 왕시엔성 짜이지엔!
나까무라상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사요나라를 외쳤고 왕시엔성은 무협지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관장에게 포권을 취했다.
강시혁은 일본인과 중국인을 여의도 콘래드 호텔로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다시 영빈관으로 와서 카니발을 끌고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저녁 무렵 그림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강시혁이 신종화에게 다가갔다.
“뭐, 지시할 것 없습니까?”
“아휴, 지시라니요. 저기 떼어낸 그림들 포장해서 차에 실어주세요.”
강시혁이 그림들을 차에 실었다.
출품할 때는 그림이 20점이었는데 지금은 10점이었다. 나머지 10점은 팔렸기 때문에 미술품 전문 수송업체에서 고객에게 직접 배달한다고 하였다.
[두 번 왔다갔다 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잘되었네.]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나 강시혁은 노량진 학원을 갈 수가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 영빈관으로 왔다.
피곤하지만 운동과 영어공부 등은 하루도 빠질 수가 없었다. 공부후 김치 하나에 밥을 먹었다. 그래도 낮에 먹었던 해물이 들어간 잡탕밥보다도 더 맛이 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 강시혁은 기타를 쳤다.
어쿠스틱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많이 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나 ‘Dust in the wind’ 는 이제 제법 잘 쳤다. 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렸다.
강시혁은 Dust in the wind 노래까지 불렀다.
영빈관의 넓은 지하에선 노래를 불러도 이웃에 방해를 안 주니 좋았다.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바람속의 먼지에요
사람들 모두가 바람속의 먼지일 뿐이죠.)“
오늘 회식에 참석했던 군상들이 스쳐가는 바람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강시혁은 업무일지를 써서 설운동 대리에게 보내고 여의도로 갔다.
귀국길에 오르는 일본인과 중국인은 쇼핑을 많이 했는지 짐이 한보따리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나이도 중년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짐을 가지고 낑낑댔다.
보다 못한 강시혁이 짐을 번쩍 들어 벤츠차 트렁크에 실어주었다.
일본인이 물었다.
“어휴, 체격이 좋네요. 운동 좀 하신 분 같네요.”
중국인도 웃으며 물었다.
“무슨 운동을 하셨나요?”
강시혁은 뻥을 좀 치기로 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에 한번 스쳐가는 사람들이라 뻥을 쳐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태권도를 했습니다.”
“오, 태권도? 몇 년이나 하셨습니까?”
“한 10년 정도 했습니다. 공인 5단입니다.”
“으와, 그래요?”
강시혁은 속으로 웃음이 났다.
자기는 태권도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몇 개월 배운 게 다였다. 더 배우고 싶었지만 태권도 학원 교습비를 못내 그만두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강시혁이 짐을 출국장 카운터까지 운반해 주었다. 일본인이 연신 고개를 까닥하며 고맙다고 하고 중국인도 ‘셰, 셰’ 를 연발하였다.
강시혁이 가려고 하자 일본인과 중국인이 각자 선물 하나씩을 강시혁에게 주었다.
일본인이 준 것은 꽃무늬가 있는 손수건이었고 중국인이 준 것은 스탠으로 만들어진 호루라기가 달린 열쇠고리였다.
강시혁에게는 필요도 없는 물건이지만 고맙다고 인사하며 받았다.
공항에 갔다가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영빈관에 신형 고급 벤츠차가 서 있었다.
가려는지 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음? 이영진 상무님을 모시고 다니는 김 과장 같은데?]
강시혁이 크락숀을 울리고 라이트를 깜박거려 주었다.
차가 도로 섰다. 김기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강시혁도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왔다.
“과장님!”
“난, 자네가 없어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공항에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손님이라니? 문화재단 손님인가?”
“예, 맞아요. 일본인과 중국인이에요.”
강시혁이 얼른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일회용 커피를 타서 김 기사에게 주었다.
김 기사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이영진 상무님이 돌아오셨네.”
“예? 돌아오셨어요?”
“어제 밤에 귀국하셨는데 나도 몰랐었네.”
“과장님이 모르시다니요? 과장님은 수행 기사 아닙니까?”
“밤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신 모양이야.”
“아니, 과장님을 안 불렀어요? 과장님이 바쁘셨다면 나라도 불렀으면 되었을 텐데?”
“많이 아프시고 넘어져서 외부인에게 자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군.”
“과장님이나 저나 왜 외부인입니까? 밀착 수행을 하는 최 측근 아닙니까?”
“그래서 나도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여자들 마음을 이해해야지. 망가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이 여자들 마음이 아닌가?”
“정말 많이 아프셨던 것 같네요.”
“택시를 타고 오셨다고 해서 나는 자네가 상무님을 모셨나 했네.”
“아이고, 전화가 왔으면 바로 달려갔겠죠.”
“나는 지금 상무님 지시로 종로 5가 약국에서 약을 사다 드리고 오는 길이야.”
“그럼 얼굴은 봤겠네요.”
“못 봤어. 약을 거실에 올려놓고 가라고 해서 그냥 왔어. 출근하게 되면 연락 주겠다고는 하더군.”
“거참, 얼마나 다쳤기에! 참, 오셨으니 점심식사 하러 가시죠.”
“난, 먹었어. 일이 있어 먼저 갈게.”
강시혁은 김 기사를 문밖까지 나가 배웅해 주었다.
역시 김 기사한테도 절도 있게 허리 꺾어 인사를 해주었다.
김 기사가 떠나자 강시혁은 문을 닫고 관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김 기사는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려고 온 게 아니군. 혹시라도 내가 이영진 상무를 공항에서 집까지 모시지 않았나 하는 의심 때문에 온 것 같네.]
강시혁은 비서실 임창영 과장에게 슬쩍 이야기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임창영 과장은 더욱 자기를 신임할 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그는 얼마 전에 강시혁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구두표도 보내주지 않았던가!
정규 관리직에 자기의 우군이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임 과장님! 접니다.”
“오, 강 반장!”
“이영진 상무님은 어제 밤에 조용히 귀국하셨습니다.”
“오,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귀국하셨으니 다른 분에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조용한 귀국이라면 조용히 있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몸이 아프셔서 회사는 며칠 후에나 출근하실 것으로 보여 집니다.”
“정말 많이 아프셨던 것 같네요. 그런데 김 기사 이 사람은 그런 것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네!”
“아, 그것은 조용히 하라는 상무님의 지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장님도 일체 모른 체 하시고 김 기사에게 물어보거나 하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이야기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맛있는 점심식사하시기 바랍니다.”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가 얼마나 아픈 가 궁금했다.
상무가 아프면 아팠지 자기가 왜 애가 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지만 이상하게 궁금했다.
[금산 아줌마는 알겠지. 한 집에 사는 가정부니까.]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냥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자연스레 접근해 알아보기로 했다.
“이모님? 강시혁입니다.”
“오, 삼촌이야?”
“제가 조금 있다가 빈 김치 통 가지고 가겠습니다. 정말 김치 잘 먹었습니다. 이모님은 김치공장 사장님을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호호, 금산에 살 때 김장철만 되면 사방에서 나를 모셔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두 시간 정도 있다와. 나 지금 상무님 점심 차려드려야 해.”
“옛? 상무님이 돌아오셨어요?”
“어제 오셨어. 그럼 이따 봐.”
강시혁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기도 점심을 먹어야 했다.
강시혁은 점심을 먹고 김치통도 깨끗이 닦아 마당의 잔디밭에 올려놓았다. 햇빛에 말리면 냄새도 가시고 좋았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 댁으로 갔다.
그런데 빈 김치통만 들고 간 게 아니라 어제 일본인과 중국인에 받은 선물을 들고 갔다. 카니발을 끌고 갔다.
이영진 상무집 대문은 열려져 있었다.
강시혁이 온다고 해서 금산 아줌마가 열어놓은 것 같았다.
“이모님!”
“어서 와!”
“상무님이 많이 아파요?”
“쉿! 적게 말해. 지금 2층에 계셔. 점심 식사 후 지금 커피마시면서 책보고 있을 거야.”
“넘어지신 모양이죠?”
“그런 것 같기도 해. 김치통 가져왔지?”
“예, 여기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어제 문화재단에 오신 일본인 손님하고 중국인 손님한테 선물 받은거예요.”
“이걸 날 주면 어떻게 해?”
“일본인한테 받은 건 손수건인데 꽃무늬가 있어 여자용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모님 생각이 나서 가져온 거예요.”
“음마, 고마워라.”
“그리고 중국인이 준건 열쇠고리에요. 호루라기도 달려있으니 호신용으로도 좋지요.”
“호호, 그렇겠는데?”
그러면서 금산 아줌마는 스탠으로 된 열쇠고리를 신기한 듯 만져보았다.
금산 아줌마는 강시혁에게 김치통을 받더니 그 안에 비닐로 싼 김치를 넣었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힉! 이렇게나 많이요?”
“우리가 남이가?”
“미안해서 어쩌지요?”
“혼자 살면 먹는 거라도 잘 먹어야 해.”
“고맙게 잘 먹겠습니다.”
사실 혼자 살면서 김치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른 반찬이 없더라도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밥을 먹는 것이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상무님께 인사 안 드려도 될까요?”
“그냥 가. 내가 상무님한테는 삼촌이 다녀가면서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이야기를 할게.”
금산 아줌마가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이제 대문을 잠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모! 층계 오르내릴 때 조심하세요. 상무님처럼 넘어지면 안 되니까요.”
금산 아줌마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삼촌만 알아. 아마 일본에 가서 홍 사장하고 드잡이로 싸운 모양이야. 지금 눈덩이가 아직 시퍼렇고 얼굴도 퉁퉁 부어있어. 그리고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는데 다리는 지금 많아 나아지긴 했나봐.”
“그으래요?”
“김 기사도 모르고 있으니 그런 줄 알아. 아마 부기 좀 가라앉고 눈덩이 시퍼런 것 가시면 그때나 출근할 거야.”
“젊은 분이니까 빨리 낫겠죠.”
“정말 다른데 가서 이야기 하면 안 돼!”
“혼자 있는 사람이 누구한테 이야기 합니까?”
아마 그동안 금산 아줌마도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꽤나 근질근질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강시혁이 오자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하면서 가만히 말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