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젊은 음악인 (1)
(68)
강시혁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 전기기능사 합격 여부를 확인해 보았다.
다소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합격이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어려운 시험이든 쉬운 시험이든 일단 시험에 합격하면 기분은 좋은 법이다. 어깨춤이 절로 났다.
노량진 학원의 강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문제집을 여러 번 반복해서 풀어보세요. 전기기능사는 필기시험이 어렵습니다. 필기시험 합격률은 30% 내외입니다. 하지만 필기 합격하면 실기는 쉽습니다. 실기 합격률은 70%입니다. 그러니 필기 시험공부를 우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시혁은 필기시험 공부를 죽어라 하고 했던 것이다.
문제집을 여러 번 보기도 했다.
실기시험은 앞으로 한 달 반 정도가 남았다.
실기시험에 필요한 공구들을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업무일지에 시험에 대한 공구가 아니라 영빈관을 비롯한 VIP저택의 전기설비 점검을 위한 공구를 사야 될 것 같다고 기재했다. 전동드릴과 스프린 벤더, 와이어 스트리퍼와 절연 공구세트를 사야 되겠다고 썼다.
그냥 사도되지만 업무일지에 이렇게 쓰면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했다.
후배 변상철에게 전화를 했다.
“필기는 합격했다.”
“오, 그래? 축하해. 그럼 한잔 해야지. 이번에 술은 내가 살게.”
“시험은 내가 합격했는데 술을 왜 네가 사니?”
“헤헤. 나 돈 좀 벌었어.”
“어디서 훔쳤냐?”
“알바 했지. 이태원 클럽에서 일하는 친구 집에 한번 가줘야지.”
“그럼 지금 와라.”
“오늘은 못가. 토요일에 갈게. 지금 나 포천에 있어.”
“포천? 아버지 침대공장에 가 있구나.”
“여기서 며칠째 일하고 있어. 아버지가 나를 꼬이려고 시급을 두둑이 쳐주셨어.”
“하하. 그래? 그런데 며칠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클럽에 가서 한방에 날려버리면 되겠냐?”
“또 벌면 되지.”
다음날 오전에 설운동 대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업무일지에 보니까 전기설비 점검 공구를 사야 된다고 되어 있네요. 당장 사세요. 비품 구입은 사전 승인을 받아야 되지만 소모품은 강 반장이 알아서 사면됩니다.”
“전동드릴 같은 건 비품이 아닙니까?”
“업무일지에 가정용 전동드릴이라고 했으니 소모품 처리해도 됩니다. 가격 비싼 산업용이라면 비품 처리 하겠지만 말입니다.”
“소모품과 비품의 구분은 어떻게 합니까?”
“1년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품이나 보통 10만원 미만 구입품은 회계 기준상 소모품으로 처리합니다. 어떤 회사는 50만원 미만을 소모품으로 하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선풍기 같은 것도 10만원 미만이라 우리 삼방 문화재단에서는 소모품 처리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1년 쓰고 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하.”
“역시 설 대리님은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하하. 강 반장은 확실히 내 말을 잘 이해하는데 우리 삼방 문화재단에서는 외계에서 왔는지 내 말을 이해 못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예? 누가 이해를 못합니까?”
“누구긴 누구입니까? 잘난 한녀충 신종화지요.”
강시혁은 카니발을 끌고 청계천 공구상가로 나갔다.
청계천 공구상가는 참 별의별것이 다 있었다. 여기에 있는 공구를 사가지고 가면 달나라 가는 로켓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손님 한 사람이 공구상 주인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사장님. 공구는 모두 30만원어치 샀는데 영수증은 50만원으로 끊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좋은데 우리가 매출이 높아져 과표가 잡히게 되는데......”
“우리가 남입니까?”
강시혁은 우리가 남입니까 하는 소리를 뒤에서 듣고 금산 아줌마가 생각났다.
금산 아줌마는 가끔 강시혁에게 우리가 남이가? 하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시혁은 이 남자의 옆얼굴을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헤어진 와이프 심은혜와 살고 있는 박 과장이었다. 자원전자라는 좃소기업의 박문도 과장이었다.
[개자식! 하필이면 여기서 만나네!]
그런데 오늘 보니 박 과장이 참으로 꾀죄죄해 보였다.
전에는 그렇게 안보였는데 오늘따라 그렇게 보였다. 그것은 그동안 강시혁의 눈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그동안 가방끈이 긴 고액 연봉자들만 상대하다보니 그런 것 같았다.
비서실 임창영 과장이나 큐레이터 신종화, 문화재단 관장, 이영진 상무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강시혁은 이것을 느끼지 못했다.
[구질구질한 새끼! 20만원 삥땅치려고 하네. 30만원어치 물건 사고선 50만 원짜리 영수증을 끊어달라고 하는 걸 보니 뻔해. 자원전자 경리팀엔 50만 원짜리 영수증을 갖다 주겠군.]
공구상회 사장은 물건 팔아먹는 욕심에 50만 원짜리 영수증을 끊어주었다.
강시혁은 박 과장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물건을 고르는 척 하였다.
박 과장이 가고 나서 공구상회 사장에게 물었다.
“방금 물건 사간 사람은 여기 단골인 모양이죠?”
“가끔 오기는 합니다. 그런데 올 때마다 가라 영수증을 끊어달라고 해서 미치겠습니다.”
“가끔 오는 사람 같으면 안 해줄 수 없고 입장이 곤란하겠네요?”
“저렇게 영수증을 마구 끊어 가면 과표가 올라 내가 세금을 더 내게 됩니다. 그러나 장사 하려면 할 수 없죠.”
그러면서 공구상회 사장은 투덜거렸다.
구매한 공구를 차에 싣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벤츠차 기사였다.
“아, 벤츠, 아니 과장님!”
“나, 김 과장이네. 지금 영빈관 들려도 되겠지? 회사 기사 대기실에 있으니까 갑갑해서 못 쓰겠어.”
“아이고, 어쩌지요? 저 지금 공구 사러 청계천 공구상회에 와 있는데요?”
“어? 그럼 을지로 본사 주차장으로 와. 점심이나 같이해.”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가겠습니다.”
강시혁이 삼방그룹 본사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벤츠차 기사를 만났다.
“과장님! 구내식당에서 밥 먹으면 돈 굳을 텐데 외식을 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후배가 왔는데 밥 한 끼 못 사줄까?”
그래서 둘이 회사 뒷골목에 잇는 된장찌개 집으로 갔다.
밥을 먹으면서 강시혁이 말했다.
“이영진 상무님은 몸이 많이 아프신 모양이지요?”
벤츠차 기사가 검지 손가락을 가운데 대며 말했다.
“쉿! 여기는 회사직원들이 오는 데야. 조용히 말해. 저기 앉은 여자들도 회사직원이야. 구내식당 밥맛에 질리면 이런 식당에도 오거든.”
“회사 직원들은 이영진 상무님이 몸이 아프다는 걸 모릅니까?”
“회사 일로 출장이 연장된 걸로만 알고 있어.”
“그래요?”
“나는 어제 이영진 상무님이랑 바로 통화까지 했어. 몸이 아파서 오오사카 병원서 통원치료를 받는다고 했어.”
“어디가 아프시답니까?”
“열도 있고 다리도 좀 다쳤다는 말도 있어.”
“다리도요?”
“몸살기가 있어 병원에 가다가 넘어졌다고 하네.”
“그런데 정말 거기에 보호자가 없어서 어떡하죠? 빨리 삼방그룹 일본 지사장에게 연락해 지사원 한 사람을 파견하라고 해야겠네요.”
“일본 대학교수로 와 있는 친구가 있어서 괜찮다고 하네.”
“그럼 언제 귀국하시는 거예요?”
“상무님 말은 이삼일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어. 일본 간 김에 친구들도 만나고 일본 재계 인사들도 만난다고 하긴 했어.”
“그렇다면 모를까. 그런데 홍 사장님 말은 없었나요?“
“없어. 짧게 만났다는 말만 있고 더 이상 말은 없어.”
“화해가 잘 되었을까요?”
“글쎄. 내가 보기엔 잘 안되었을 것 같아. 또 홍 사장은 회장님에게 불만이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회장님에게요?”
“삼방전기 주식 10만주를 증여하기로 했는데 보류한다고 해서 그런 것 같아.”
“그런데 그건 맡겨 논 것도 아니고 주면 고맙고 안줘도 할 수 없는 것 아녜요?”
“그건 맞지만 주기로 한 것을 안주니 기분이 나빴겠지.”
“그러면 몸가짐을 바로 해 회장님께 잘 보이도록 노력을 했어야죠.”
“그러게 말이네.”
“상무님이 귀국을 할 때는 홍 사장님이랑 두 분이 나란히 손을 잡고 오시면 좋겠어요.”
“그러면야 좋겠지. 요즘 나도 일 안하고 월급 타먹으려니 민망해 죽겠어.”
“화성시에 있는 삼방화학 공장은 다녀오셨어요?”
“갔다 왔네.”
“친구는 만났어요?”
“응? 마, 만났지.“
“구내식당에서 일한다는 아줌마도 만났어요?”
“아줌마? 난 여자들에겐 관심이 없어서..... 구내식당엔 안 들어가고 친구만 만나고 왔네.
[흉물스런 인간! 만나러 갔다가 아줌마 남편이 있어서 말도 못 붙이고 오고서는!]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벤츠차 기사의 처를 보고 세상에 그렇게 못생긴 여자는 처음 봤다고 한말 말이다.
아마 앞에 앉아있는 벤츠차 기사는 어려울 때 부인을 만났다가 지금은 밥 먹고 살만하니까 자꾸 다른 여자를 넘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벤츠차 기사가 밥을 다 먹고 나서 말했다.
“혹시 비서실 임창영 과장이 강 반장한테 전화 안했나?”
“없었는데요?”
“혹시 그 교활한 놈이 이영진 상무 일에 대하여 물으면 모른다고 하게. 그 인간 항상 정보는 자기만 독점 하려는 친구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높으신 분이 저 같은 사람한테 전화 하겠습니까?”
“높기는 개뿔! 어린놈들이 과장 달아주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있지.”
둘은 다시 주차장으로 왔다.
강시혁이 가려고 하는데 벤츠차 기사가 추리닝 한 벌을 주었다.
“웬 추리닝을?”
“삼방전자에는 종업원들 복리후생차원에서 가끔 이런 물건이 나와. 가서 입어.”
“이걸 날 주면 어떻게 합니까? 과장님 입어야지요.“
“나는 있네. 기사 하나가 그만 두어서 옷이 한 벌 남았네. 그러니 가져가.”
“아이고, 고맙습니다. 역시 저를 챙겨주는 건 과장님뿐입니다.”
“흠, 흠.”
강시혁이 영빈관으로 왔다.
공구를 내려놓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우편물이 왔다.
임창영 과장이 보낸 것이다.
뭘까 하고 보았는데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이 두 장 들어있었다.
강시혁은 바로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카톡을 보냈다.
[우편물을 방금 받았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고 놀랐습니다.]
바로 답신이 왔다.
[추석도 다가오니 구두나 한 켤레 사세요.]
강시혁은 쓴 웃음이 났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금산 아줌마는 나에게 햇과일을 한보따리 주고, 벤츠차 기사는 추리닝을 주고, 임 과장은 구두 표를 보냈네. 영빈관 반장 자리도 괜찮은 것 같군. 대리기사 뛸 때나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 있을 땐 없던 일들이 나타나는군. 그래서 사람은 큰 그늘 밑에서 있어야 하는 거야!]
토요일이 되었다.
포천 침대공장에서 일하던 후배 변상철이 왔다.
“형! 오늘은 내가 살게.”
“얼마나 벌었는데 그래?”
“일주일 일하고 형 월급의 절반은 벌었어.”
“나보다 낫네.”
둘은 변상철의 친구가 있는 클럽으로 갔다.
이태원에는 여러 스타일의 클럽이 있지만 이 집은 재즈 바에 가까웠다. 광란의 춤을 추는 요란스러운 집은 아니었다.
물론 춤을 추기도 하지만 그것은 밤 9시가 넘어서 클라이맥스에 올랐을 때였다.
보통은 점잖게 앉아 칵테일에 라이브 연주를 즐겼다.
변상철의 친구 윤진형은 오늘도 기타를 치고 있었다.
강시혁은 자기도 언제나 저렇게 기타를 칠 수 있나 하였다.
휴식 타임에 윤진형이 변상철에게 왔다.
“오래간만이다. 난 네가 하도 소식이 없어 죽었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포천에 있는 아버지 공장에 갔다가 뺑이 치느라 죽을 뻔했다.”
이번엔 강시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도 여전하시죠? 삼방 영빈관에 그대로 계시죠?”
“영빈관이 꿀 보직인데 내가 가면 어딜 가나?”
“조금 있다가 내 후배가 오기로 했습니다. 합석해도 되겠죠? 춤을 아주 잘 추는 아이입니다.”
“그러지 뭐.”
밤 9시 쯤 되자 손님들이 많아졌다.
휴식타임에 윤진형이 저쪽 구석에 혼자 앉아있던 젊은이를 데리고 왔다.
헐렁한 옷을 입고 온 젊은이를 보고 강시혁은 눈을 크게 떴다. 이영진 상무의 동생 이영남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