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운동 시작 (1)
(62)
변호사 한 사람이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서류를 읽었다.
어르신은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한참 후 눈을 뜬 어르신이 뭐라고 질문을 하는데 모두 법률용어였다. 답변하는 변호사들도 난해한 법률용어로 대답을 하고 있어 강시혁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강시혁은 오늘 비로소 자기가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시혁은 그동안 건대 앞에서 분식점을 하거나 대리기사 일을 할 때는 자기가 굉장히 유식한 사람인줄 알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었다.
내가 운이 좀 나빠서 험한 일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너희들과 다른 사람이다 이놈들아! 하는 자만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보니까 자기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실력 탓이란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거 자기개발에 힘 쏟지 않으면 사회에서 그냥 도태되겠는데? 나도 노력해야지 안 되겠어!]
어르신이 자기 앞에 놓인 서류들을 대봉투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회의가 끝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다른 변호사들도 서류를 자기들이 가져온 가방에 담고 있었다.
어르신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그래서 앞으로 해외기업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분쟁시 관할법원을 대한민국 서초동에 있는 중앙지방법원으로 하지 말고 미국 연방법원으로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요.”
“알겠습니다. 저희들도 교수님 말씀대로 미국 50주 연방법원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을 불렀다.
“어르신을 잘 모셔드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상무님. 하지만 여기를 잠그고 나가야 하니까 상무님 일행이 먼저 출발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영진 상무가 어르신에게 먼저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르신이 웃으며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이영진 상무가 어르신에게 봉투 하나를 드렸다.
“오늘 회의 참석비입니다.”
“고맙소.”
어르신은 봉투를 받아 자기 양복 포켓에 넣었다. 사양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하고 봉투를 많이 받아보신 분 같았다.
이영진 상무 일행이 인사를 하고 먼저 가자 그때서야 강시혁은 모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벤츠차 뒷문을 열고 어르신을 뒷좌석에 모셨다.
“피곤하시겠습니다. 어르신.”
“아니오. 나보다는 강 기사가 더 피곤하겠지. 아까 보니까 우리는 앉아있는데 강 기사는 계속 서 있더군. 나를 태우고 오느라고 운전도 많이 했을 텐데 피곤하겠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보니 강 기사가 운전만 하는 게 아니라 영빈관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이제부터 강 기사라고 부르지 않고 강 반장이라고 불러주지.”
“하하. 기사나 반장이나 다 도토리 키 재기 아닙니까?”
“그건 내가 한말 같은데?”
“아직 도토리 신세인데 언제 과일나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토리가 어때서? 도토리가 옛날에는 구황식물이고 땔감의 원료인 참숯 원료였다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강 반장은 도토리처럼 많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일꾼이 될 것이 틀림없소. 희망을 가지시게!”
“반장이 올라가봤자 얼마나 올라가겠습니까? 혓바닥 긴 사람이 가래침도 길게 뱉는다고 했는데 저는 태생부터가 짧은 인생이거든요.”
“희망을 갖으래도!. 이 세상의 영웅들이 모두 처음에는 한미한 말단에서 시작을 했으니까!”
강시혁이 어르신을 태우고 다시 백석읍으로 향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차가 밀렸다.
어르신은 바로 졸았다. 그러다가 차가 중랑천 옆을 달리자 깨었다.
“강 반장이 피곤하겠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강 반장 덕분에 오늘은 올 때나 갈 때나 벤츠 차를 타고 호사를 하는 것 같소.”
“음악 틀어 드릴가요?”
“아니 되었소.”
[그리스 가수 나나무스쿠리가 싫어지셨나?]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우리나라 기업들 간의 소송을 왜 한국법원이 아니고 미국법원에 하나요?”
“유리한 점이 있지.”
“우리나라 법원에서 하면 홈그라운드 이점도 있고 소송비용도 싸게 먹힐 것이 아닙니까?”
“미국법원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받으면 손해배상 금액을 엄청 크게 받아낼 수 있지.”
“그렇습니까?”
“10억 받을걸 100억 받는다면 어디 가서 하는 게 좋을까?”
“아, 그런 게 있군요.”
“미국은 또 손해배상 외에 징벌적 배상이라는 것도 있다오. 그래서 미국법원에 소송하면 합의가 빨라지는 이점도 있지.”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이 미국 재판결과에 승복을 안 하면 어떻게 되지요?”
“패소한 기업의 미국 자산을 압류할 수도 있고 글로벌 기업이라면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을 압류할 수도 있겠지.”
“아, 그런 게 있겠군요.”
“그래서 삼방그룹 같은 대 재벌이라면 직원들에게 국제법이나 국제분쟁에 대한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할것이요.”
“정말 대기업 사원들이라면 공부 많이 해야겠네요.”
“강 반장도 삼방그룹이라는 울타리 속에 들어왔으니 공부 많이 하시게.”
“헤헤. 저는 잡급직 반장인데요. 뭘.”
“공부하는 반장! 얼마나 멋이 있나!“
어느새 차가 백석읍에 도착했다.
강시혁이 인사하고 가려는데 어르신이 5만원을 주었다.
“오늘 정말 수고 많이 했소. 이거 가다가 식사라도 하시게.”
“아닙니다. 됐습니다. 회사 규정에 돈 못 받게 되어있습니다.”
“어른이 주는 건 받는 거네. 자 받으시게.”
강시혁은 마지못해 돈을 받았다.
강시혁은 오면서 후배 변상철과 함께 맥주 한잔을 하고 싶었다.
5만원 생겼으니 통닭에 생맥주는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주유소가 있어 주유소에 들어가 전화를 했다.
“상철이냐? 뭐하냐?”
“멍 때리고 있어.”
“젊은 놈이 멍이나 때리고 있으면 돼? 지하철 타고 이태원 와라. 맥주나 한잔 하자.”
“나, 돈 없어.”
“이번에도 내가 사지. 네 친구가 있는 클럽에는 가지 못하지만 너 통닭 한 마리 못 사주겠냐?”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내가 지금 출장을 와서 영빈관에 가고 있는 중인데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 한 시간 후에 이태원역으로 나와라.”
강시혁이 영빈관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장에 집어넣고 이태원역으로 갔다.
변상철은 벌써 도착하여 역 앞에 있는 옷가게 진열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상철아!”
“어, 형! 시험 잘 봤어? 전기 기능사 필기시험 봤다며?”
“그럭저럭 봤어. 저기 뒷골목으로 가면 치킨 바비큐 포차가 있으니 거기로 가자.”
이 바비큐 집은 강시혁이 물건 사러 가끔 나올 때 본 집이었다.
가게는 작고 테이블이 10개 정도밖에 안되지만 오며가며 맥주 한잔하기는 딱 좋았다.
연예인들도 자주 들리는지 벽에 연예인들의 싸인이 많이 있었다.
“연예인들도 여기 자주 오는 모양이지?”
“돈 잘 버는 연예인들도 이런 델 오는 것 같네.”
강시혁이 생각하기에 이영진 상무는 이런데 안 올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여기서 가까운 이태원에 살고 있었다. 걸어서 와도 될 거리였다. 그래도 서민들이 노는 이런 곳에는 안 올 것 같았다.
“형, 삼방그룹 이영진 상무는 이런데 안 오겠지?”
“이태원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불량한 놈들을 만나면 안 되겠지. 여기 이태원엔 찌라시 잡지사 기자들도 있고 먹잇감 찾아다니는 유튜버들도 있잖아.”
“형이 뒤따라 다니면서 보호해주면 되잖아. 영빈관 보안요원이 뭐하는 거야. 그런 것이나 해야지.”
“난 건물관리야. 보안요원이 아니야. 그리고 수송 업무 요원이야.”
“그런데 오늘은 어딜 갔다 온 거야? 털털거리는 카니발 끌고 피곤하겠는데?”
“카니발 아니야. 벤츠 마이바흐를 끌고 갔다왔어. 역시 차가 좋으니 피곤한 것도 없더라.”
“벤츠 마이바흐?”
“회사에서 영빈관 손님들 접대용으로 배치해 줬어. 내가 관리해.”
“와, 형 대단하네. 벤츠 마이바흐를 끌고 다니니까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네.”
“이영진 상무가 쓰던 차야. 앞으로 가끔 이영진 상무 심부름도 하게 될 것 같아.”
“잘되었네. 오너를 모시고 다니면 계열사 간부들도 함부로 못하지.”
맥주와 안주가 나왔다.
맥주를 마시고나서 강시혁이 말했다.
“너 친구가 있는 클럽은 장사 잘 되니?”
“잘 될 리가 있겠어? 전화만하면 손님 끌고 오라는 소리에 내가 요즘 전화도 안 해.”
“언제 한번 가줘야겠구나.”
“형, 그런데 형이 이영진 상무를 모신다면 머리 스타일부터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머리 스타일을 바꾸다니?”
“머리를 깍두기처럼 길러. 그리고 운동 좀 해서 팔뚝 근육도 늘리고 팔뚝에 문신도 해.”
“내가 조폭이냐?”
“이 동네 보니까 거리에 문신한 놈 천지네. 다투(tattoo)도 요즘은 예술이야.”
“예술 같은 소리하네!”
“형이 머리를 깍두기처럼 기르고 운동 좀 해서 근육 키우고 문신 좀 해봐. 누가 감히 이영진 상무를 건드리겠어? 파파라치라도 쫓아오면 형이 문신 보여주며 ‘샤꺄! 저리 꺼져!’ 하면 다들 비실비실 물러나지.”
“하하. 그러다가 진짜 운동 좀 하는 애들 만나면 어쩌려고.“
“운동했다고 다들 주먹질 하나? 걔들도 깜방 가는 것 무서워서 함부로 주먹질 못해. 형은 스타일을 바꾸어 겁만 주는 일만 하란 말이야.”
“지성이 충만한 내가 그러면 되겠냐? 자자, 쓸데없는 노가리 까지 말고 술이나 들어라!”
“진짜라니까! 한번 해봐! 전기 기능사 시험도 끝났다며? 당장 바벨 사다가 오늘부터 연습해. 거기 영빈관은 마당도 운동장 같아서 운동하긴 딱 좋던데 뭘.”
“아아, 시끄러워. 닥치고 술이나 마셔.”
“나 같으면 그렇게 하겠다. 주군의 따님을 모시려면 그렇게 해야지. 그래야 이영진 상무도 형이 든든해 보여 자주 부를 것 아닌가?”
“그런 일 아니더라도 운동은 좀 하려고 해. 몸이 좀 무거워진 것 같아.”
“형은 기본 체력이 있으니까 바벨 연습하면 바로 알통이 나올 거야. 해봐.“
강시혁은 술을 마시다가 잠시 상상을 해보았다.
깍두기 머리에 가슴이 떡 벌어진 사내가 백합 같은 이영진 상무를 옆에서 모신다면 멋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검은 선 그라스를 끼고 검은 양복을 입은 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면?
누가 이영진 상무에게 얼씬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삼방 문화재단에서 모가지 잘리지 않고 오래 근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기기능사 필기시험도 끝났으니 정말로 운동을 해봐? 이영진 상무를 모실 기회가 없더라도 운동이야 해두면 좋겠지.]
일요일 아침이 되었다.
강시혁은 음악을 들으며 화단에 물을 주었다. 일요일은 일을 안 해도 되지만 일을 했다.
화단의 꽃들은 오늘도 주인을 만나 물을 더 달라고 아우성대는 것 같았다.
꽃이 활짝 펴서 그런지 어디서 벌까지 날아와 윙윙거렸다.
강시혁은 오늘 예술의 전당이나 다녀와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중일 유명 갤러리 출품 전시회의 미술품 수송이 아니라 오늘은 관람객으로 참여를 하고 싶었다. 명색이 문화재단 소속인 놈이 그런 고상한 전시회를 구경 안하면 되겠나?
또,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렇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날이라 큐레이터 신종화나 인턴들, 그리고 설운동 대리도 특근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차고로 내려갔다.
차고에는 벤츠 마이바흐와 카니발이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벤츠 마이바흐를 끌고 가면 욕먹겠지? 카니발을 끌고 가자.]
그래서 강시혁은 카니발을 끌고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전람회장 입구에는 삼방그룹 회장이 보낸 화환이 있었다.
관람객들이 많지는 않았으나 일요일이라 그런지 어린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간혹 있었다.
신종화와 인턴들, 그리고 설운동 대리가 있었다.
신종화는 누군가에게 그림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강시혁이 설운동 대리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림 구경 왔습니다.”
“문화재단 직원이라면 당연히 관람해야겠지. 둘러봐요.”
강시혁은 출입구에서 팸플릿을 팔고 있는 인턴에게 팸플릿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림을 구경했다.
[이건, 뭘 이렇게 그린거야? 통 알 수가 없네. 제목도 요상하네. 제목이 ‘매듭에 대한 단상’이네. 자세히 보니 그림이 매듭처럼 생기긴 했네.]
그러면서 그림을 구경하는데 특근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입구 쪽으로 몰려나갔다.
[VIP가 오나?]
놀랍게도 이영진 상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벤츠차 기사도 들어오고 있었다.
화요일 일본을 간다고 하니까 미리 오늘 관람하러 온 것 같았다.
강시혁도 뛰어가 인사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그림을 구경하는 척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