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벤츠 마이바흐 배정 (2)
(61)
백석읍의 어르신 자택에 도착했다.
전에 왔을 때는 이 집이 그렇게 넓어 보이고 정원수도 좋아보였다. 150평정도 되는 전원주택이었다.
하지만 강시혁이 300평이 넘는 영빈관에서 살다보니 이제 이 주택도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인간의 눈은 참 간사한 것이었다.
오늘은 어르신이 완전 정장을 한 채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삼방그룹 영빈관에 들려 미팅에 참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시혁이 인사를 하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르신! 오늘은 굉장히 젊어 보이십니다.”
“하하, 그래? 강 기사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쳐 좋아.”
“강 기사가 아니고 강 반장입니다.”
“기사나 반장이나 다 도토리 키 재기지. 강 기사가 과장정도 된다면 그때는 과장이라고 불러주지.”
“제 인생에 삼방그룹 같은 대기업에 과장이 되겠습니까?”
“직위에 연연할 필요는 없네. 일에 연연하는 것이 성공이 빠르다네. 나를 보게. 지금 아주 직위도 없는 지방에 사는 늙은이지만 이렇게 재벌기업에 초청을 받아서 가지 않는가.”
“하하. 그러네요. 차에 오르시죠.”
어르신이 차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이쿠! 웬 벤츠차가 다 있네.”
“어르신처럼 유명하신 분을 모시려면 적어도 이런 차로 모셔야 한다며 상무님께서 특별 배차를 해주셨습니다.”
“이런 황송할 데가 있나!”
그러면서 어르신이 차에 올랐다.
차가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서자 어르신이 말했다.
“차가 정말 좋군. 진동이 없어.”
“음악 틀어드릴까요? 어르신은 클래식을 좋아하시죠?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드릴까요?”
“실은 오늘이 내 결혼기념일이네. 죽은 마누라와 미국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는데.....”
“아, 그럼 그걸 틀어드리죠.”
“옛날 노래라서...... 참, 강 기사가 영문과 출신이라니 알지도 모르겠네.”
“어떤 노래죠?”
“나나무스쿠리의 하얀 손수건이네.”
“아, 저도 그 노래 압니다. 한국 가수도 부른 것 같던데요?”
“나는 나나무스쿠리가 좋아.”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그리스의 여가수 나나무스쿠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칸델라를 켜고 양초를 끌 것입니다.
눈을 감고 당신의 꿈을 꿀 것입니다.“
어르신은 눈을 감았다.
죽은 아내에 대한 추억이 젖는 듯 했다.
그런데 눈을 감고 당신의 꿈을 꿀 것입니다 라는 가사가 원어로 흘러나오자 강시혁은 이상하게 이영진 상무가 떠올랐다. 헤어진 와이프 심은혜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영진 상무가 떠올랐다.
아마 심은혜가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애정 없는 결혼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미 결혼한 여자가 떠오르다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가 끝나고 어르신과 강시혁은 한참 말이 없었다.
무료한 정적을 깨고 강시혁이 먼저 말했다.
“저. 어르신! 어르신은 미국에서 몇 년간 계셨습니까?”
“글쎄... 20년은 안된 것 같고 한 17년 되었나?”
“아휴, 오래 계셨네요. 이영진 상무님 말씀을 들으니 예일대에 계셨다고 하던데.....”
“국제법 강의를 했었네.”
“그럼 이영진 상무님도 어르신 강의를 들은 겁니까?”
“내가 강의할 때는 이영진 상무는 한국에서 중학생이었겠지.”
“하하, 그런가요?”
“또, 이영진 상무는 법률 쪽이 아니고 MBA를 다닌 걸로 알고 있네. 거기 사내 변호사로 있는 임원 하나가 나한테 강의를 들었다고 하더군.”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려면 국내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해야죠?”
“그렇지는 않아. 입학자격시험인 LSAT점수가 중요하겠지. 그런데 지금 건물관리도 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영빈관 관리는 제가 다 합니다.”
“영빈관은 용산에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용산구 동빙고동에 있습니다. 돌아가신 창업 회장님 저택을 영빈관으로 꾸민 것입니다.”
“돌아가신 창업 회장님 저택을 수리해 영빈관으로 했다면 큰 빌딩 같은 것은 아니겠군.”
“빌딩은 아니지만 웅장한 저택입니다. 대지만 해도 300평이 넘습니다.”
“빌딩 경영관리 스펙이 있으면 MBA들어가긴 좋겠지. MBA는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을 교육한다는 취지가 강하니까. MBA는 이공계 출신들도 많이 입학해요.”
“그렇습니까?“
“왜? 유학가려고?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돈이 많이 들지. 그래서 미국 로스쿨이나 MBA는 가재나 붕어는 들어가기가 힘들다오.”
“하하. 돈 없어 안갑니다. 붕어도 못되는 송사리는 여기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요.”
어르신을 모시고 강남 성모병원으로 왔다.
오늘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만 타오는 진료라 일찍 끝났다.
강시혁은 어르신을 모시고 동빙고동 영빈관으로 갔다.
어르신이 영빈관 마당의 정원수와 화단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관리를 잘해놓았군. 바지런한 사람이 관리를 하니까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 같군.”
“인터넷보고 흉내만 낸 정도입니다.”
“아니요. 훌륭해.”
이영진 상무의 카톡이 왔다.
[어르신 병원 진료가 끝났습니까?]
[벌써 진료 끝내고 영빈관에 와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곧 가겠습니다.]
강시혁은 어르신을 1층 접견실로 모셨다.
그리고 정원이 잘 보이도록 커튼을 치워주었다.
“역시 재벌이 살던 곳이라 명당이군. 그럼 여긴 강 기사가 혼자 관리하나?”
“그렇습니다. 혼자 있습니다. 지하에 관리실도 있고 제 숙소도 거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24시간 관리체제입니다.“
“이 집은 풍수학상 아주 좋은 길지(吉地)요. 여기서 혼자 있다니! 이 집의 기운을 강 기사가 혼자 다 받겠는데? 그래서 전보다 강기사의 얼굴 찰색이 좋아졌어.”
“하하. 그래요?”
강시혁이 주방에 들어가 차를 내왔다.
금산 아줌마가 만들어 보낸 대추차를 타서 내왔다.
약간 한약 냄새가 나는 차를 보고 어르신이 물었다.
“이게 무슨 차요?”
“여러 가지 약재가 들어간 대추차입니다. 금산 인삼도 들어갔습니다.”
어르신이 한 모금 마시고 신음소리를 냈다.
“흠, 좋군! 이 차는 어디서 파는지 알고 있소?”
“삼방 가문에서 직접 만든 차입니다.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재벌들은 역시 이런 좋은 차를 마시는 것 같군.”
잠시 후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강시혁이 뛰어나갔다.
이영진 상무와 중년의 남자 2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년 남성들은 삼방그룹 사내 변호사들 같았다.
강시혁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상무님!”
“수고 많네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가 방긋 웃어주었다.
중년남자 한 사람이 어르신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현재 삼방그룹 사내 변호사로 있습니다.”
또 한사람도 어르신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삼방그룹 법무팀장입니다. 교수님의 교재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반갑소.”
강시혁이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내왔다. 역시 대추차였다.
이번엔 왼손에 흰 수건을 걸치고 호텔 보이처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그리고 절도 있게 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변호사들이 강시혁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회의가 진행되었다.
강시혁은 조용히 목례를 하고 주방 쪽으로 물러나왔다.
주방 식탁 의자에 앉지도 않고 두 손을 모은 채 회의실을 응시했다.
부르면 바로 뛰어갈 준비를 하고 서 있었다.
그런데 주방에서 회의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더군다나 어르신의 귀가 잘 안 들릴까봐 변호사들은 톤을 약간 올려 말하였다.
그래서 더 잘 들렸다.
“교수님이 검토해 주신 소송서류는 잘 보았습니다.”
“소송서류는 어느 법원에 제출할 거요?”
“그걸 교수님과 상의하고 싶습니다.”
“요즘 국내 기업들도 미국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많이 늘고 있소.”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50개주에 있는 연방 법원은 각 법원마다 특색이 있소. 어느 법원은 비영어권인 아시아 기업의 소송이 불리한 곳도 있으니 잘 파악해야 할 것이요.”
“그래서 저희는 미국 국제 무역위원회의 제소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저희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특허와 같은 지적 재산권 침해나 국제 무역 불균형은 국제 무역위원회로 가져가는 것도 괜찮겠지.”
이후 발언을 강시혁이 듣고 있자니 전문 법률 용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강시혁은 자기가 계열사에 들어간다면 저런 고급업무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기랄, 나는 회사의 정규직원으로 일하긴 힘들 것 같네. 역시 기업은 경영학과 출신이나 법학 전공자들이 유리하겠어. 영어만 나불거리며 잘한다고 해서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그런데 법무팀장이라는 사람이 힐긋거리며 강시혁을 자꾸 쳐다보았다.
국내의 유명한 S그룹을 상대로 소송을 하려는데 강시혁이 옆에 서있으니까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강시혁이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으로 나오니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온 벤츠차 기사가 정자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처량해 보였다.
“과장님! 차 한 잔 드릴까요?”
“되었어. 차 너무 많이 마시면 운전할 때 오줌 마려워.”
“접견실에서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서빙업무가 있어 늦게 나왔습니다.”
“그럼 그냥 일 보지 그랬어.”
“과장님 오셨는데 차라도 대접해 드려야죠.”
“하하. 나는 됐네. 이 사람아!”
“앉아 계세요. 차 가져올게요.”
강시혁이 1층 접견실 주방으로 다시 가기가 어려워 지하에 있는 주방으로 갔다.
지하에도 싱크대는 있었다.
강시혁이 얼른 대추차를 타서 벤츠차 기사에게 가져왔다.
사실 벤츠차 기사는 과장 대우를 받는 기사지만 어디가면 이렇게 살가운 대접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너 따님을 모시고 다니는 기사라 그냥 월급 좀 많이 받는 기사 정도로만 인식했다. 강시혁처럼 과장님, 과장님, 하면서 대우를 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벤츠차 기사는 강시혁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는 정보들을 강시혁에게 가끔 말해주기도 했다.
“강 반장! 다음 주 화요일 저녁에 내가 여기 올 테니 한잔 하세.“
“화요일요? 그날이 좀 시간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화요일 이영진 상무가 일본에 가네. 한 이틀 일본에 머무르다가 오실거야.”
“오, 일본에요? 홍 사장님이 일본에 계신다고 하니까 만나러 가시는 것 같네요.”
“홍 사장이 이영진 상무를 일본으로 부른 것 같아. 별거중인데 서로 잘해보자는 취지로 불렀겠지.”
“정말 두 분이 다시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별거중이라는 소리가 외부로 새어나가면 안 좋잖아요? 언론이나 유튜버들이 그런 정보를 들었다면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 뻔합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되면 두 분의 사회적 이미지도 나빠지게 되겠지.“
“그래서 과장님이나 저같이 상무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은 보안유지를 잘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 그런 놈들이 접근한다면 차단해줘야 할 의무도 우리에겐 있는 거지. 그래서 상무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은 들어올 때 철저하게 신원조회를 했다는 소문이 있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강 반장도 벌써 신원조회를 했을 거야.”
“그랬겠지요.”
강시혁은 미소를 띠우며 벤츠차 기사에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벌써 신원조회 다 했습니다. 아마 내가 신불자가 되어 신용회복위원회 조정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겁니다. 삼방의 정보력은 국가 정보력보다도 좋다는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너무 오랫동안 마당에 내려와 있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았다.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 저는 접견실 회의장으로 가보겠습니다. 혹시 저를 찾을지 모르니까요.”
“응. 그래. 가보게.”
“차는 다 마시고 빈 찻잔은 여기 정자에 두고 가세요. 나중에 제가 치우죠.”
강시혁은 다시 1층 접견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주방 옆에 다시 섰다. 꼿꼿한 부동자세로 서서 대기하였다.
흰옷을 입고 접견실에 앉아있는 이영진 상무를 슬쩍 보았다.
옆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한 송이 흰 백합꽃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