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재벌 아들과의 만남 (2)
(57)
이영남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접견실에 있는 호화스럽게 생긴 의자에 앉아보았다.
“여기서 보니까 유리창 너머로 정원의 나무들이 그대로 보이는군요.”
“시야를 좋게 하려고 전면을 헐고 문을 넓혔습니다. 유리문도 전부 슬라이딩 방식이라 부드럽습니다. 요즘은 인테리어 기술도 좋은 것 같습니다.”
“내가 가운데 의자에 앉았네. 여기는 아빠 회장님만 앉는 자리일 텐데.”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외국 손님들이 왔을 때 회장님이 지금 그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럼 옆자리에 앉아야겠네.”
“그냥 앉아계세요. 잡급직 반장으로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이영남 씨가 그 자리에 앉을 것 아닙니까? 그대로 앉아계셔도 됩니다.”
이영남이 약간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회장 같은 것 적성에 안 맞아요. 영진이 누나가 앉아야 되겠죠.”
“왜, 그런 말씀을!”
“회의 때 회장님이 여기 앉았다는 것을 아는걸 보니 그날 여기 들어와 보셨겠네요. 이제 보니 반장님이 서빙업무도 하는 것 같네요.”
“서빙업무는 비서실 직원들이 나와서 합니다. 손이 딸려 제가 잠시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반장님은 장례식 때 외국인 안내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여기서 외국인 서빙업무도 잘할 것 같은데요?”
“비서실 직원들처럼 잘하지는 못합니다. 외국어 발음들 보니까 환상적이던데요?”
“아까 지하에 있는 관리실 책상에서 반장님의 책들을 보았습니다. 미국문학사나 영미희곡론 같은 책들이 있던데 혹시 영문학 전공을 하셨나요?”
“졸업은 했지만 학교 다닐 때 내내 알바만 해서 공부는 잘 못했습니다.”
“어학연수는 어느 나라로 다녀오셨어요?”
사실 이영남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의외였다.
재벌의 아들은 종업원들에게 목에 힘만 주면 된다.
그런데 하찮은 잡급직의 개인문제까지를 시시콜콜하게 묻고 있었다. 강시혁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학연수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가보려고 했지만 당장 알바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못했습니다.”
“학교는 서울서 다녔나요?”
“그렇습니다. K대를 졸업했습니다.”
“어? K대라고요? 나도 그 학교 잠깐 다녔었는데!”
“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사무직이 아니고 이렇게 경비원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나는 K대학 다니다가 반수해서 Y대학을 들어갔어요. 졸업도 못하고 미국 유학을 갔었지만 어쨌든 반갑네요.”
“예, 저도 반갑습니다.”
“그럼 내 선배님이시네요.”
“송구합니다.“
“반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선배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영남 씨는 회장님의 아드님이고 저는 잡급직 경비 반장입니다. 조직체계가 있으니 그냥 강 반장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선배면 선배인거지.”
강시혁은 이영남의 이런 행동이 귀엽게 보이기도 하였다.
이영남이 이제 가려는지 의자에서 일어섰다.
“새로 꾸며 논 영빈관 잘 보았습니다. 반장님, 아니 선배님은 여기서 상근하면 언제라도 여기 있겠네요.”
“장거리 미술품 수송을 하거나 전기기능사 교육을 받으러 갈 때는 자리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또 오신다면 전화를 하고 오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은 문화재단 사무국에서 만들어준 명함을 이영남에게 주었다.
“제 명함입니다.”
“난, 명함 없어요.”
강시혁은 이영남에게 왜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이 젊은이는 음악에 미쳐있는 사람같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벌 아들이면 고상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해야 어울릴 텐데 이영남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실용음악 쪽인 것 같았다.
실용음악을 하면서 향정신성의약품에 손을 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다음에 여기 놀러 와서 투약이나 한다면?
그건 안 될 말이었다. 그때는 재벌 아들이고 뭐고 몽둥이찜질을 해야 할 것이다.
반장 일을 못하더라도 그런 건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있는 이곳에서 이영남이 그 짓은 못할 것으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영남이 짠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영남이 이영진과 배가 다른 남매라는 것을 금산 아줌마한테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재벌가에서 혼자만 외톨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으로 보았다.
거기다가 유학을 갔지만 실용음악이나 한다고 이건용 회장은 이영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약물에 의존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이영남이 간다고 하여 강시혁이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이영남이 후드티 모자를 머리에 덮어쓰며 말했다.
“정말 놀러 와도 되죠?”
“그럼요. 저는 이영남 씨 아버님 되시는 이건용 회장님의 고용인일 뿐입니다. 그 아드님이 온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때고 오세요.”
강시혁과 이영남은 둘이 똑같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작별했다.
며칠이 지났다.
이날은 빗방울이 조금 뿌리는 날이었다.
강시혁이 노량진 학원에서 전기설비 강의를 받고 노량진역으로 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영진 상무의 전화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일까? 또 산정호수 가라는 건 아닐까? 홍 사장이 일본을 갔다고 하더니 돌아온 건가?]
“강시혁입니다.”
“지금 우리 집에 올수 있겠습니까?”
“아, 지금 노량진역인데요. 전기기능사 학원 수업마치고 가는 길입니다. 상무님 댁에 가려면 30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집에 올 때 영빈관에 있는 차를 가지고 오세요.”
“산정호수에 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양주 백석읍에 살고계신 박 변호사님 아버님 댁에 가시면 됩니다.”
강시혁은 그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나 하였다.
어디가 또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나 하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라면 그 아들인 박 변호사가 전화를 하지 왜 이영진 상무가 전화를 하나 하였다.
강시혁은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동빙고동 영빈관으로 왔다.
강시혁은 바로 카니발을 끌고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갔다.
이영진 상무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금산 아줌마는 잠을 자러 자기 방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시혁은 이 넓은 집에 여자 두 명이 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서 빨리 별거하는 홍 사장도 돌아오고 아기도 생긴다면 이 집은 더욱 활기가 찰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적막감만 돌았다.
강시혁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거실로 올라갔다.
“혹시 백석읍에 계신 어르신이 갑자기 몸이 아픈 것은 아닙니까?”
“아니에요. 이 서류를 전달하고 오시면 됩니다.“
“이 서류를요? 급한 서류인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급한 서류이니 빨리 번역을 해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번역을요?”
강시혁은 그 어르신이 번역가 출신인가 했다.
교양이 있어 보이는 어르신이었지만 번역가인줄은 몰랐다.
그런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번역은 서울에도 젊고 유능한 사람이 많이 있다.
왜 먼 곳에 있는 노인에게 부탁할까 하였다.
“영문 소송서류에요. 어르신은 젊었을 때 예일대에서 강의를 하신분이에요.”
“아, 그래요?“
강시혁은 상당히 놀랐다.
그래서 그 아들도 서초동 변호사구나 했다. 역시 유전자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예일대 교수였다니 아들도 서초동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될 만도 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서류를 가지고 출발하겠습니다.”
“그 어르신 집을 아는 분은 강 반장님만 알기 때문에 부탁하는 겁니다. 늦은 시각에 피곤할 텐데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지금 서류를 가지고 사람이 가고 있다고 어르신께는 전화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발하겠습니다.”
강시혁은 백석읍으로 향했다.
한번 가봤던 곳이라 내비도 켜지 않고 달렸다.
강시혁이 가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그 어르신이 예일대 교수였다니 놀라운데? 이제 은퇴하고 공기 맑은데 사신다고 거기로 간 것 같네. 그런데 경치 좋은 양평이나 북한강이 흐르는 가평 같은 데를 가지 않고 백석으로 갔을까? 거기는 강도 없던 것 같던데.]
강시혁은 이 어르신이 미국생활에 대하여는 달통했을 것으로 보았다.
친해 놓으면 나쁠 건 없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인맥 다이어리에 올려야할 인물로 보았다.
강시혁이 백석읍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창문 너머로 보니 어르신은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강시혁은 현관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삼방 문화재단의 소사가 왔습니다.”
어르신이 안경너머로 강시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책은 놀랍게도 영문으로 된 책이 아니고 한문 원서 책이었다.
“대리 기사로구먼.”
“지금은 상방그룹 영빈관 지킴이로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는 에너지가 넘치는군. 생기발랄하다는 건 좋지. 운이 열릴 징조야.”
“고맙습니다.”
“앉으시오.”
강시혁이 소파에 앉아서 이영진 상무가 준 영문서류를 전달해 주었다.
서류를 보고난 어르신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국내기업의 국제소송이 부쩍 느는 것 같네. 알겠소. 서류는 번역해서 내일 택배로 보내주지.”
“제가 서류 받으러 다시 안와도 되겠습니까?”
“올 필요 없어요. 요즘 우체국 등기 속달도 다음날이면 바로 들어가니까.”
“그런데 어르신은 영문학자 출신인 것 같네요. 실은 저도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그렇습니다. K대학 영문과를 나왔습니다.”
“영문과 나온 사람이 왜 대리기사를 하나?”
“취업했다가 나와 자영업을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대리기사 알바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삼방문화재단 영빈관 관리인으로 있습니다.”
그러면서 삼방문화재단 로고가 박힌 자기 명함을 드렸다.
“영문학 전공을 헸으면 제길 찾아가야지 왜 또 여기서 소사 일을 하나?”
“엄격히 따지면 소사 일도 아닙니다. 영빈관이라 외국 손님들도 오기 때문에 제가 그분들을 모실 때도 있습니다. 영어를 못하면 제 일을 못합니다.”
그러면서 강시혁은 수송이나 경비 일보다는 외국인 접대 업무를 강조했다.
“흠. 그렇다면 제길 찾아 갔군.”
“앞으로 제가 어르신께 배울 것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배우긴! 요즘은 나보다도 인터넷에서 배울게 더 많지. 번역도 구글에서 다 하잖아?”
“아닙니다. 구글 번역은 엉터리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영진 상무님도 소송서류를 번역기 안 돌리고 어르신을 찾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K대학을 나왔다고 했나? 거기 김XX 교수가 내 제자인데.”
“아, 김XX 교수님요? 제가 그분한테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럼 어르신은 제 은사님의 은사십니다. 무협지 용어로 말하면 태사부이십니다.“
"태사부? 허허. 재미있는 젊은이군. 그런데 나는 문학을 한 사람이 아니고 법학을 한 사람이요.“
“미국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인생 살아가면서 혹시 어르신께 자문 받을 일이라도 생긴다면 달려와 묻겠습니다.”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는 좋지.”
강시혁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네. 어두운 밤길 조심해서 가시오.”
강시혁은 백석읍을 나와 자동차 전용도로로 들어가기 전에 길가 공터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이영진 상무에게 카톡을 보냈다.
전화 메신저 문자는 보낸 적이 있지만 카톡을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직접 전화를 걸까 하다가 카톡으로 보냈다.
[백석에 도착하여 어르신께 서류를 전달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번역된 서류를 내일 택배를 이용하여 회사로 보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답신이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비가 오는 것 같은데 조심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강시혁은 이제 이영진 상무가 자기에게 지시할 것이 있으면 카톡으로 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삼방그룹 미래의 실세에게 접근하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올 때는 소니 클라크의 피아노 연주곡인 쿨 스트러팅을 들으면서 왔다.
그러다가 강시혁은 자기도 모르게 장국영의 영웅본색 OST 주제가를 틀었다.
아주 크게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