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회장의 분노 (2)
(53)
이영진 상무가 머뭇거리자 회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강 반장이란 사람이 왜 강남을 갔어?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그, 그것은....."
"말 해봐! 말 못할 거야?"
이영진 상무가 눈물을 보였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고 회장은 이영진 상무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 해 봐라. 잘못하여 이 사건이 그룹 내에 퍼지거나 SNS에라도 퍼진다면 일이 크게 확대 될 가능성이 있다.”
“그 날은 제 생일이었어요. 홍 사장이 집에 일찍 들어오기로 했는데...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밤 10시가 넘어 전화를 했었습니다.“
“약에 취해 횡설수설 했겠구나.”
“처음엔 삼성동 아스테리움 오피스텔 12층 00호실에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뒤에서 사람들 웃음소리가 나고 무언가 이상했어요. 발음도 처음엔 좋았다가 나중엔 분명치 않은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거길 직접 가보려고 했나?”
“그때는 저도 화가 나서 흥분상태였고요. 김 기사를 부르려고 했지만 시간도 늦고 또 소문이 알려지면 안 될 것 같아 가까이 있는 강 반장을 불렀어요.”
“거기 차가 있었나?”
“미술품을 수송하는 승합차 카니발이 있었어요.”
“강 반장을 부르면 더 소문이 날것이 아닌가?”
“여태까지 겪어보니 그런 일은 없었어요. 또 성실한 사람이고 언젠가 아빠도 칭찬해주셨잖아요.”
“그런 것 같군. 장례식 때도 빗속에서 솔선수범했고 상서원 꽃도 잘 가꾸어 놓아 내가 칭찬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군.”
“그 사람은 혼자 근무하는 사람이라 그룹사 직원들과 어울리지 않죠. 또 아빠가 신원조회 했을 때 서울의 K대학을 나온 사람이라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떠들 사람같이 보이진 않았어요.”
“K대학이면 영남이가 한때 다녔던 학교군.”
“또 당장 차를 쓰려면 가까운데 있는 거기밖에 떠오르는데도 없었어요.”
“흠. 그래서 강 반장이란 사람이 가게 됐군.”
“또 만약에 홍 사장이 만취상태거나 약에 취했다면 힘센 남자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갔다가 강 반장이란 사람이 홍 서방한테 맞았군. 흠, 일의 전말이 그렇게 되었군. 합의는 했다며? 얼마나 맞았는데 그래?”
“여러 대 맞았어요. 경찰이 올 때까지 맞았어요. 순천향병원에서 3주 진단을 받았다고 했어요.”
“3주? 적게 맞은 것 같지는 않군. 강 반장이란 사람이 홍 서방에게 대들지는 않았나?”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어요. 오히려 내 눈치만 봤어요.”
“젊은 놈이 대단한 인내심이군. 알았다.”
“A신문사 법무팀장이 나와서 700만원에 합의를 했으니 별 일은 없을 거예요.”
“돈 몇 푼 주었으니 함부로 떠들고 다니진 않겠군. 그런 조건으로 합의했을 테니까. 그럼 지금 홍 서방은 어떻게 하고 있나?”
“별거.... 중이에요.”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조사를 철저히 하고 결혼을 시켰어야 하는데.”
“이제 와서 소용이 없는 일이죠.”
“A신문사 회장 인격만 믿고 혼사를 밀어붙인 나도 후회가 막심하다. 강 반장이란 사람 신원조회를 하듯이 했어야 하는데.....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실은 조금 전에 네 시아버지되는 홍 회장 전화를 받았다. 약물치료로 유명한 강남 을지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더라.”
“거기 치료는 벌써 세 번째에요. 소용없을 거예요. 저에겐 미안하다며 당분간 일본에 가 있겠다고 했어요.”
“일본?”
“A신문사 자회사와 교류하고 있는 가와라(河原) 흥업이란 회사의 초청을 받았다고 했어요.”
“가와라 흥업? 뭐하는 회사인가?”
“잘은 모르지만 엔터테인먼트 회사란 이야기를 들었어요.”
“알았다. 그렇다면 당분간 별거를 하고 홍 서방은 좀 더 지켜보자. 일본으로 간 것은 차라리 잘되었다. 이번 일에 괜히 쓸데없는 소문이라도 나온다면 일본에 가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영진 상무는 자기 방으로 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지러움 증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날 홍 사장의 투약보다도 옆에 있던 여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디서인가 본 듯한 연예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강시혁은 아침에 일어나 1층 접견실과 2층 각 방을 점검했다.
그리고 지하에 내려와 갓 지은 밥에 금산 아줌마가 보내준 김치로 밥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강시혁은 밥을 먹고 나서 청소를 하고 화단에 물을 주었다.
흥얼흥얼 노래까지 부르며 물을 주었다.
꽃들은 병원에 잠깐 있었을 때 보다는 확실히 좋아졌다.
그것은 강시혁이 시든 꽃송이를 바로바로 떼어내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싱싱한 것처럼 보이는 것인지는 몰랐다.
강시혁은 화단 구석구석에 물을 주며 계속 흥얼거렸다.
초등학교 다닐 때 부르던 동요를 불렀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엔 채송화와 봉숭아는 없었다. 나팔꽃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꽃들은 장미나 백일홍, 그리고 국화 같은 꽃들이었다.
어째 채송화와 봉숭아, 나팔꽃 등은 자기와 같은 흙수저이고 장미와 백일홍 등은 금수저 같았다.
채송화와 봉숭아, 나팔꽃은 가재나 게 같고 장미와 백일홍은 용이나 비단잉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재나 게도 살만한 세상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 찬스나 엄마 찬스 같은 것이 없는 공정한 사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시혁은 이곳에 있는 나무와 화초는 모두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와 화초별로 꽃을 피우는 시기, 토양이나 물주기 시기 등을 꼼꼼히 기록을 해두었다. 주로 인터넷을 보고 자료를 찾았다.
나무나 화초에 따라서는 물을 너무 많이 주어도 안 되고 너무 적게 주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니 좋았다. 보관하고 있는 미술품 목록이 있듯이 그렇게 했다.
국화꽃도 토질이 좋아서 그런지 이제 탐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서실 임창영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래간만의 전화였다.
“비서실 임창영 과장입니다.”
“옙! 강시혁입니다.”
“내일 오후 2시에 상서원(영빈관)에 회장님과 사장님 두 분, 그리고 외국인 손님들 세 명이 올 겁니다. 비서실 두 명이 가기 때문에 모두 여덟 명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는 차를 준비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커피보다는 이영진 상무님 댁에 계신 주방 아줌마가 만든 한방차를 준비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화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와인과 전통한과는 우리 비서실에서 준비해 가지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식사는 거기서 안합니다. 가벼운 와인이나 차를 마시고 한담하는 수준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나 통역은 몇 분이나 따라오는지요?”
“차 3대 갑니다. 그리고 통역은 비서실에서 그냥 합니다.”
[통역도 비서실에서 한다니 비서들 실력 좋네.]
강시혁은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영어 전공자라도 순차통역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해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 언어연수라도 받고 온 친구들은 통역 알바라도 했는데 강시혁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편의점 알바나 피시방 알바 같은 일만 죽어라고 했었다.
전화를 끊고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모님! 내일 여기서 회장님이 손님 접대를 한답니다.”
“응, 나도 전화 받았어.”
“이모님이 만든 한방차를 준비하라고 하네요.”
“만들어 놓은 것 있어. 지금 와. 내가 줄게.”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 댁에 가려다가 회장님 오신다고 했으니 문화재단에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또 보고 빨리 안했다고 갈구면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사무국 설운동 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설 대리님! 내일 회장님이 여기서 외국인 접대를 한답니다.”
“그래요? 몇 분이나 오신답니까?”
“외국인 세분, 회장님과 사장님 두 분, 그리고 비서실 두 분입니다.”
"여덟 분인가요?“
“그렇습니다.”
“관장님께 보고하셨나요?”
“절차가 있는데 관장님께 제가 직접 보고할 수 있나요. 저는 제 직속 상사인 설 대리님에게만 보고 합니다.”
“알겠어요. 관장님께 보고는 내가 하지요. 그리고 비서실에서 온다니 큐레이터 신종화 씨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종화 한테는 아직 이야기 안했지요?”
“제 직속 상사는 신종화 씨가 아닙니다. 오로지 설 대리님뿐입니다.”
설 대리의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잘했어요. 걔는 이런 일이라면 또 자기가 가겠다고 설칠 거예요. 하라는 큐레이터 일은 안하고 높은 사람 앞에서 낯내는 걸 좋아하는 아이니까!”
“비서실에서 전화 온 이야기는 업무일지에 기재해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오늘 내가 빡세게 일해야겠네요.”
“예?”
“해외 아트 전시회에 보낼 미술품 포장이 있어요. 인턴들도 손이 딸려 사무국 직원들도 도와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실은 강 반장도 와서 도와주라고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에고, 어쩌지요? 저는 내일 접대 자리에 쓸 한방차를 가지러 이영진 상무님 댁에 가야하는데요? 미안합니다.“
“뭐, 할 수 없지요. 내일 접대 지원업무나 잘 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대리님.”
강시혁이 차고로 내려가 카니발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문화재단 관장의 전화가 왔다.
“강 반장? 나 관장이에요.”
“아, 예. 관장님!”
“내일 상서원에 회장님 오신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죠?”
[회장님 오신다는 이야기는 내가 이야기했는데 뭔 뜬금없는 소리야?]
“예, 잘 들었습니다.”
“내가 내일은 거기 안 가게 될지도 몰라요.”
[이게 또 무슨 소리야? 비서실에서 문화재단 관장 오라는 소리도 없었는데!]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러니 내일 접견실은 물론 2층 미술품 보관실도 정리정돈도 잘해놓고 청소도 잘 해놓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원 손질도 다시하고 낙엽 같은 것 떨어진 것도 잘 치워놓도록 하세요.”
[아니, 이 여자가 누굴 초딩으로 아나? 별 시시콜콜한 소리를 다 하네. 대학교 학장을 지냈다니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잔소리깨나 했겠군.]
강시혁이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갔다.
이영진 상무 집 정원에도 국화가 피었다. 하지만 이곳의 국화는 영빈관 국화만큼 잘 자라지 못했다. 아무래도 금산 아줌마가 음식 만드는 데만 신경을 써서 그런지 화단 가꾸기는 소홀한 것 같았다.
[언제 한번 와서 정원수 가지치기도 해줘야 할 것 같군. 내가 삼방 가문의 소사라면 마땅히 해야 될 일이 아니겠어?]
금산 아줌마는 자기가 만든 차를 작은 유리병에 담아서 포장까지 해 놓았다.
“삼촌! 이거 분말로 되어있으니 뜨거운 물을 넣고 두어 번 저었다가 내가면 돼.”
“알겠습니다. 그런데 냄새가 좋네요.”
“그리고 여기 잣하고 대추는 따로 마지막에 넣어드리면 돼. 대추는 한 알, 잣은 작은 커피 스픈으로 한 스픈 넣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인삼 냄새도 나네요.”
“호호. 내가 누군가? 금산 아지매 아닌가? 그래서 금산 인삼을 조금 갈아 넣었지.”
“제가 통역들한테도 그렇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뭐, 할 말 있어?”
“혹시 이영남 씨가 자기 드럼 세트 버린 것에 대하여 다른 말 없던가요?”
“없어. 또 안다고 해도 오래되어 다 부서진 것 버렸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강시혁은 삼방 가문에서 겉돌고 있는 이영남에게 슬슬 접근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가의 사람에게 접근해서 손해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영남 씨가 이모님한테 들리면 영빈관에 한번 놀러오라고 하세요. 이제는 시끄럽다고 야단치는 할머니도 없으니까요.”
“호호,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