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회장의 분노 (1)
(52)
후배 변상철의 전화가 왔다.
“형, 지난번에 맞았다는 사람 얼마 받았데?”
“모르겠는데.”
“3주 정도 진단 나왔으면 200만 원 이상은 받으라고 했지?”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상대방에서 쌍방 폭행으로 고소하면 어떻게 되나?”
“그럼 좀 골치 아프게 되겠지. 소송전으로 가겠지. 가급적 소송은 하지 마.”
“하지 말라니?”
“괜히 변호사 좋은 일만 시켜. 나홀로 소송도 가능하지만 그럼 오래 걸려.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법률적 지식도 없어 패소할 가능성도 많아.”
“그런가?”
“그래서 웬만하면 합의하는 게 좋아. 병원에도 오래 누워있을 필요 없어. 의사들 좋은 일만 시켜.”
“에고, 이놈의 세상은 의사와 변호사만 좋은 세상이네. 아무튼 200이상 받으라고 했으니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상철아, 너는 모르지? 이 형님은 벌써 700만원을 받아 은행에 곱게 저축해 놓았단다.]
“그런데 삼방 직원들이 합의금 문제를 형한테 물어? 잡급직에게 물어본다니 수상한데? 형이 삼방그룹의 법무팀에 근무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약 좀 팔았지. 내 주변에 로스쿨 다니는 친구가 있고 경찰 간부시험 준비하는 후배도 있다고 했지.”
“형, 너무 뻥치지 마. 나중에 버릇돼. 그리고 기타는 샀나?”
“샀어. 밤마다 연습하고 있어.”
“영빈관 놀러갈까?”
“오지마라.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을 막느라고 내가 여기 있는데 내 친구나 후배 불러들이면 되겠니?”
‘하긴, CCTV에 내 모습이 찍힌다면 형한테 이로울 건 없겠지. 나중에 그 근처에서 생맥주나 하지. 이번엔 내가 살게.“
다음날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를 만나러 이영진 상무 집을 갔다.
[김치를 준다니 받아와야지. 요즘 김치 값도 비싸서 금치라고 하는데 받아 놓으면 좋겠지. 더구나 금산 아줌마가 손수 담갔다면 맛이 좋을 거야.]
이영진 상무 집은 문이 열려져 있었다.
아마 강시혁이 온다니 금산 아줌마가 미리 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금산 아줌마는 넓은 집에 혼자 있었다.
나훈아 뽕짝 노래를 틀어놓고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이모! 혼자 계세요?”
“응, 왔어? 지금 혼자 있어. 그런데 괜찮아? 다쳤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번 아가씨가 삼촌하고 나갔던 날 울고 왔거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했지. 그래서 물어보니 그날 삼촌이 홍 사장에게 맞았다며?”
“별건 아닙니다. 합의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대들지도 않고 맞기만 했다며? 잘 했어. 맞기만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다른 사람 같으면 저도 머리로 받아버렸지요. 상무님 배우자라 차마.....”
“잘했어. 우린 그렇게 살아야 해. 우리 아들놈 봐. 참을성 없어 상사가 뭐라고 한다고 회사 뛰쳐나오는 것 봐.”
“하하. 아드님이 그런가요?”
“내가 남의집살이하면서 애들 대학까지 보낸 사람인데 애들이 지 애비 닮아서 참을성이 없어. 그래서 걱정이야. 그거 보면 삼촌의 인내심이 참 대단해.”
“하하, 고맙습니다.“
“참, 김치 줘야지.”
아줌마가 김치 냉장고에 있던 통을 들고 나왔다.
묵직한 것이 5키로는 될 듯싶었다.
“어휴, 많네요, 잘 먹겠습니다.”
“벤츠차 김 기사가 나하고 사이가 나빠도 이집 김치 하나는 맛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모님하고 김 기사님은 왜 사이가 먼 거예요?”
“그 인간이 영빈관 할머니님 댁 가사도우미를 집적거려 내가 못하게 했더니 날 원수처럼 보는 거야.”
“집적거리다니요? 지난번 삼방화학 화성공장 구내식당 맡으신 이모님 말씀입니까?”
“맞아. 애까지 있는 인간이 남편 버젓이 있는 여자에게 집적거리니 말이 되겠어?”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참, 영빈관 변한 것 구경을 못했는데 오늘 같이 가볼까? 여기서 거기가려면 걸어서 가기엔 좀 먼 거리야. 그래서 내가 그동안 못 갔어.”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강시혁은 아줌마를 카니발에 태우고 영빈관으로 왔다.
외부사람을 들이지 못하지만 오너의 집에서 20년 이상 일해 온 가정부라 같이 왔다.
아줌마가 집을 둘러보고 탄성을 질렀다.
“좋은데? 잘해놨어. 돈 많이 들어갔겠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오마, 정원수가 잘 다듬어져 있네. 저건 삼촌이 한 건가?”
“그렇습니다. 화단에 꽃은 요 며칠간 물을 못 줘서......”
“아휴, 그래도 활짝 폈네. 돌아가신 할머님도 수리 좀 하고 사시지. 이렇게 꾸며 놓으니 얼마나 좋아.”
금산 아줌마는 지하실 구경도 했다.
관리실 모니터를 보고 놀라는 표정도 지었다.
“아휴, 저게 다 뭐야?”
“여기는 고가의 미술품이 있어 이런 시설을 해놓아야 합니다.”
금산 아줌마가 강시혁이 쓰는 방도 구경했다.
“아휴, 홀아비 냄새. 빨리 장가 가. 내가 여자 하나 소개해줄까?”
“아, 아니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기 옷에는 뭘 저렇게 덮어놨어?”
“삼방 갤러리 관장님이 오셔서 덮으라고 해서 덮었습니다. 보기 흉하다고 해서요.”
“미친. 나는 옷에다 보자기를 일일이 씌운 게 더 보기 흉하네.”
“오신 김에 커피 한잔 하시죠.”
“호호. 총각이 타는 커피 맛 좀 보고 갈까?”
강시혁이 커피를 마시며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홍 사장님은 지금 이영진 상무님 댁에 같이 계시죠?”
“삼촌만 알아. 지금 별거 중이야.”
“에효, 한참 신혼의 즐거움을 나눌 분이.”
“아가씨가 처음엔 결혼 안 하려고 했어. 그런데 회장님이 강하게 밀어붙였지. 언론재벌의 장남이니 일등 신랑감으로 본거지. 더구나 미국에서 공부한 분 아닌가?”
“회장님도 홍 사장님이 그런걸 아시나요?”
“처음엔 몰랐는데 요즘은 알아. 실망이 많겠지. 에효, 회장님도 사위 복이 없어. 아들도 그러더니 사위도 그럴 줄 누가 알았나?”
“아드님은 지금 뭐하세요?”
“영남이? 모르겠어. 음악을 한다고 돌아다니는데 모르겠어. 가끔 낮에 우리 집에 와. 내가 만든 배추김치가 생각난다고 가끔 와.”
“그래요?”
“회장님 사모님이 잘해주는데 거긴 잘 안가.”
“회장님 만나면 야단 맞을까봐 그런가요?”
갑자기 금산 아줌마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삼촌 혼자만 알아. 영남이는 이영진 상무와 배가 달라.”
“예엣?”
“사모님이 어려서부터 데려와 친엄마처럼 길러주었지. 그런데 영남이는 사모님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어 탈이야.”
“그런 사연이 있군요.”
“사모님이 친자식처럼 길렀는데 서운하겠지. 에효, 사모님도 안됐어.”
강시혁은 이영남이란 아들도 따지고 보면 외로운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인줄 알았던 사람이 친엄마가 아니고 누나인줄 알았던 사람이 친누나가 아니니까 더 소외감을 느끼리라고 보았다.
또, 아버지는 친아버지만 거대한 그룹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 늘 바쁘고 무섭기만 한 존재였을 것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디서 주워온 자식이라고 정을 쏟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럼, 이모님. 이영남의 친엄마는 어디에 계십니까?”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다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
[이영남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그 엄마의 피를 많이 받았겠네.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는 건 모계 쪽 유전자가 강해서 그런 것이겠군.]
“그럼 이영남은 이 집안에 언제 온 겁니까?”
“첫돌 지나고 사모님이 바로 데려왔지. 사모님이 그 여자에게 아기는 길러줄 테니까 새 출발을 하라고 했다는군.”
“그런데 이영남씨가 사모님이 생모가 아니란 건 언제 알았나요?”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알은 거지. 그 이후에 저렇게 되어 나도 속상해. 사모님도 길렀지만 나도 길러주었거든. 내 등에 업혀 재롱 떨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러면서 정말 금산 아줌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강시혁은 회장님도 정말 걱정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거대한 그룹을 지키려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들은 빗나가기 시작하니까 딸이나마 튼튼한 집안 신랑을 붙여주려고 했었겠지. 그래야 삼방그룹을 강하게 끌어갈 테니까. 그런데 사위가 뽕쟁이니 기가 막히겠군. 그걸 보면 돈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 아버지가 행복한지도 몰라.]
강시혁은 몇 달 전에 아버지와 통화한 적이 있었다.
너무 전화한지가 오래되어 전화했을 때 아버지는 목소리가 밝았다. 시청에서 추진하는 공공 취로사업에 선정되었다고 좋아하셨다. 아마 지금쯤은 동료 근로자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돌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을지로에 있는 삼방그룹 회장실은 언제나 조용했다.
오늘도 이건용 회장은 종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많이 보지만 회장은 구세대라 종이 신문을 선호하고 있었다.
회장이 보는 신문은 보수 일간지와 경제신문이었다. 진보계열 신문은 잘 보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 있는데 A신문사 회장 전화가 왔다.
“잘 계셨습니까?”
“핫핫. 홍 회장님이 전화를 다 주셨네요.”
“요즘 건강하시죠? 필드에는 자주 나가십니까?”
“하하. 요즘 미세먼지가 많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골프장이나 갔다 올까 하고 생각 중에 있습니다.”
“자식의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자식들 일이야 어디 우리들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지난주에 그 소란을 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남 을지병원 입원을 권했습니다. 약물치료는 거기하고 국립부곡병원이 제일 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리로 권했습니다.”
“지난주 그 소란이라니요?”
“아, 모르셨습니까?”
“모르는데요.”
“며늘아기를 태우고 강남 삼성동으로 온 삼방의 기사를 우리 아이가 손찌검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서로 원만히 합의했다지만 제가 송구스러워 회장님 낯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나요. 저는 딸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안 해서......”
“앞으로는 저도 개입을 해서 치료에 적극성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미주지사에 연락해 캘리포니아의 약물 회복 프로그램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신경을 써주시니 잘 되겠지요. 감사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건용 회장은 전화를 끊고 보던 신문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뭐? 삼방의 기사를 폭행해? 그럼 벤츠를 몰고 다니는 김 기사가 사위에게 맞았다는 건가? 중년의 김 기사가 젊은 홍 사장에게 맞았다면 회사에 나쁜 소문이 나겠는데”
이건용 회장은 화가 나서 생수를 벌컥대고 마셨다.
“영남이란 녀석도 그 짓을 해 내 속을 뒤집더니 이제 사위까지 나서서 그 지랄을 하네. 남들은 미국을 갔다 와서도 그런데 손 안대고 잘만 일들을 하는데 어째 우리 집안만 그럴까! 에잇 빌어먹을!”
그러면서 테이블을 주먹으로 꽝하고 쳤다.
소리를 듣고 여비서가 뛰어왔다.
“무, 무슨 일 있으십니까? 회장님?”
“아니다. 저리 가거라! 물이나 더 가져와라.”
회사의 전무이사 한 사람이 회장의 결재를 받기위해 결재판을 들고 왔다.
회장이 식식대며 물을 벌컥대고 마시는걸 보고 얼른 도망갔다.
회장이 화가 났을 때 결재판을 들이밀면 틀림없이 결재판을 집어던질 확률이 많기 때문이었다.
회장이 큰 소리로 여비서를 다시 불렀다.
여비서는 이화여대 얼짱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다. 삼방그룹 젊은 사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오늘은 회장이 무서워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가서 이영진 상무 좀 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잠시 후 이영진 상무가 회장 방으로 들어왔다.
평상시대로 차분한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지난주에 홍 서방이 무슨 일 있었다며?”
“예?”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 안했어? 김 기사가 홍 서방에게 많이 맞았나?”
회장은 김 기사를 과장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김 기사라고 불렀다.
기사들이 이사 대우도 받고 과장 대우도 받지만 회장 눈에는 그냥 기사일 뿐이었다.
“맞은 사실이 없는데요?”
“거짓말 할 거야? 내가 다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 기사가 아니고 강 반장이 좀 맞았지만 원만히 끝났어요.“
“강 반장? 강 반장이 누구야?”
“상서원 지킴이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왜 강남까지 가서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