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상무의 부탁 (2)
(48)
덩치 큰 두사람의 목덜미에 있는 문신이 불빛에 보였다.
등이 갑자기 켜지는 바람에 문신을 볼 수 있었다.
덩치가 다시 큰 소리를 냈다.
“당신 누구야?”
“예, 저, 저, 혹시 대리 안 불렀습니까?”
“대리?”
“대리 호출이 와서 왔는데요?”
덩치 한 사람이 건물 안에 대고 소리쳤다.
“누가 대리 불렀나?”
안에서는 안 불렀다고 하는 것 같았다.
“여기, 대리 부른 사람 없어요!”
“그, 그럼, 저 아래 팬션에서 불렀나?”
“그리고 당신! 고양이처럼 그렇게 살금살금 들어와 남의 집 창문을 넘겨다보는 게 아니요!”
“대리 부르신 분이 조용히 오라고 해서..... 그, 그럼 실례했습니다.”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하고 닫는 소리가 들렸다.
강시혁이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휴! 10년은 감수했네!]
강시혁은 카니발을 몰고 산정호수 한화콘도앞 주차장까지 왔다.
조금전 팬션에서 찍은 사진을 확인해 보았다.
모두 일곱 명의 사람들이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있는 사진인데 빛의 반사로 사진 상태는 좋지 않았다.
강시혁은 금산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영진 상무의 전화번호는 모르니 금산아줌마에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모님? 접니다. 산정호수에 와 있습니다. 상무님 계신가요?”
“오, 그래? 잠깐 기다려봐.”
한참 후에 이영진 상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바꾸었습니다.”
“강 반장입니다. 조금 전 팬션에서 확인했습니다. 홍 사장님이 칠팔 명의 친구분인듯한 분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요?”
말끝에 이영진 상무가 옅은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였다.
“같이 계신 분들 중에는 외국인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진을 찍었는데 좀 희미하지만 전송해 드릴까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후 이영진 상무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됐습니다. 거기 계신다는 것 확인했으니 되었습니다. 강 기사님은 그냥 돌아오시면 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사진은 희미하다니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이모님 전화 바꾸겠습니다.”
강시혁은 조금 아쉬운 감이 들었다.
사진을 보내준다고 하면 이영진 상무가 자기 전화번호라도 알려줄 줄 알았다. 그러면 사진 전송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영진 상무는 자기 전화번호도 가르쳐주지 않고 사진을 삭제하라고 하였다.
금산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수고했어. 이제 그냥 돌아오면 돼. 그리고 오늘 삼촌이 거기 갔다온 건 다른 사람에게 일체 말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혼자 근무하는 사람이라 말할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기름 값 나간 건 내일 아침에 보내줄게.”
“주유비는 문화재단에서 정리해 줍니다. 보낼 필요 없습니다.”
“아니, 별도로 보내줄게. 문화재단에서 왜 이렇게 휘발유 사용을 많이 했냐고 하면 안 되니까!”
“고맙습니다. 이모님!“
“우리가 남이가? 삼촌과 나 사이인데?”
“하하, 고맙습니다. 이모님!”
강시혁은 자기가 팬션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스듬히 누워있지? 아, 술 마시고 격렬하게 춤을 추다가 뻗은 상태 아닌가? 맞아. 나도 이태원 클럽에서 상철이와 몸 흔들고 온 날 바로 숙소로 돌아와 뻗었잖아!”
다시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사진 속 사람들 중 의외로 외국인들이 몇 사람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강시혁의 머리를 언 듯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거 정말 약 먹은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후배 변상철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이태원 클럽의 기타리스트 윤진형에게도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가 사진을 삭제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갈등이 되었다.
삭제는 오늘 하지 말고 며칠 후에 하기로 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강시혁은 아침 청소와 화단에 물을 주고 아침을 먹었다.
지하실 자기 룸에서 갓 지은 밥을 먹고 있으니 꿀맛이었다.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강시혁은 음악을 틀어놓고 아침에 커피 마실 때가 제일 좋았다.
월급 280만원을 받아도 빚만 없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강시혁은 커피를 마시고 운동 삼아 이번엔 대문 앞 골목까지 깨끗이 쓸었다.
그리고 골목에 먼지가 안 나도록 물까지 뿌렸다.
책상에 앉아 전기기능사 교재를 보고 있는데 문화재단 설운동 대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 반장이요?”
“예, 접니다. 강시혁입니다.”
“업무일지 양식이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방금 이메일로 변경된 양식을 보냈으니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대리님.“
“관장님 지시로 카니발 일일 주행키로 현황 란을 첨가했습니다. 앞으로 카니발 일일 주행키로 현황도 보고하셔야 합니다.”
[일일 주행키로 현황을 보고해 달라고? 관장이라는 이 여자가 내가 어제 산정호수 간 것을 알았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퇴근 후 사적으로 카니발을 끌고 다닐까봐 그런가?]
“알겠습니다. 주행키로 현황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일일 주행키로 하고 누적 주행키로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효, 나도 일요일 카니발을 빌려 대부도에 낚시 좀 다녀올까 했는데 다 틀렸네.”
“하하, 렌트카 빌리시죠. 대리님.“
“월급이 적어서.... ”
[이 사람이 잡급직 앞에서 월급 타령하네. 대리면 적어도 연봉 6천은 될 텐데?]
전화를 끊고 다시 전기 기능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금산 아줌마가 20만원을 보내주었다.
산정호수 다녀온 기름 값이 5만원도 안될 텐데 20만원이나 보내주었다.
그래서 강시혁은 바로 금산 아줌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모님! 웬 돈을 그렇게 많이 보냈어요?”
“호호. 내가 보낸 것이 아니고 상무님이 보내주신 거야. 어제 수고도 많이 했고 목이라도 축이라고 보낸 거야.”
“너무 미안한데요? 대리 뛰는 사람도 아니고 지금은 삼방 종업원인데.”
“삼촌! 우리가 남이가?”
“하하. 맞습니다. 우리가 남은 아니죠! 고맙습니다. 이모님!”
강시혁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변상철이 여길 왔을 때 이태원 클럽에서 돈 많이 써서 속이 아팠는데 돈이 들어왔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돈은 돌고 도는 거야. 나가는 수도 있지만 이렇게 들어오는 수도 있잖아!]
토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다니는 벤츠차 기사를 만나는 날이었다.
강시혁은 벤츠차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접니다. 강시혁입니다.”
“오, 강 기사인가? 아참. 이제는 기사가 아니지.”
“하하.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여기서는 강 반장이라고 보통 부르네요.”
“그래, 강 반장. 오늘이 만나기로 한 날이지?”
“저녁 7시까지 약수역으로 갈게요.”
“조금 앞당길 수 없을까? 6시 어떨까?”
“저는 좋습니다.”
“그럼 약수역 3번 출구에서 만나세.”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강시혁은 벤츠차 기사에게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딸에게 줄 선물이라도 사줄까 하였다. 그래서 이태원 상점가로 갔다.
여학생들이 좋아할만한 예쁜 지갑이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았다.
물 건너온 제품이라 너무 비쌌다. 그래서 지갑은 포기하고 작은 병에 든 향수를 한 병 샀다.
약수역에서 벤츠차 기사를 만났다.
그런데 오늘 보니 벤츠차 기사는 유난히 똥배가 나와 있었다.
전에는 그걸 못 느꼈는데 저만치서 걸어오는 모습이 꼭 배가 먼저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운전만하고 운동을 자주 안 해서 그런 것 같았다.
“과장님!”
“오, 일찍 나온 모양이네!”
“아닙니다. 저도 이제 막 왔습니다.”
“가세. 내가 잘 아는 식당이 있네.”
“과장님 댁은 이 근처이십니까?”
“요 위의 약수 하이츠 아파트에 살아.”
역시 과장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 그런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자기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면 중산층이 아닌가!
벤츠차 기사가 강시혁을 끌고 간 곳은 허름한 돼지 갈비집이었다.
벤츠차 기사 같은 아재에게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아니, 흙수저인 강시혁에게도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돼지갈비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소주잔이 오고갔다.
“과장님! 진작 모셨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모시긴 뭘. 다들 바빠서 그렇지.”
그러면서 벤츠차 기사는 기분이 좋은지 강시혁이 따라두는 소주잔을 벌컥대고 마셨다.
강시혁이 보기에 벤츠차 기사는 주량은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높은 사람을 모시고 다니느라 제대로 술을 못 마셔서 그런지 오늘 밑천을 뽑으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영진 상무님 남편 되시는 홍 사장님 차 기사도 삼방그룹 소속입니까?”
“아니야. 홍 사장님은 신문사 차를 이용해.”
역시 벤츠차 기사는 홍 사장이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려도 님 자를 붙였다. 안 듣는데서야 님 자를 안 붙여도 되는데 꼭 님 자를 붙였다. 상전을 모시는 기본자세는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삼방그룹에서 과장 대우를 받겠지]
강시혁은 홍 사장이 왜 산정호수에 가 있었는가를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상무님 부부는 결혼한지도 얼마 안 되어 깨가 쏟아지겠습니다.”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러면서 벤츠차 기사는 말을 얼버무렸다.
“회장님에게 아드님이 계신 것 같은데 경영참여는 안 하는 모양이죠?”
“영남이는 미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왜요? 거기서 공부해야 글로벌 리더가 되는 세상 아니에요?”
“영남이는 이태원에 살아서 그런지 고등학교 때부터 이태원 클럽을 드나들었지.”
“조숙했군요.”
“그러더니 자기도 대학은 음악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회장님 속을 뒤집어 놓았지.”
“재벌 집안에서 경영대학을 안 가려고 해서 그렇겠군요.”
“결국 영남이는 시카고에 있는 종합예술대학이라는 곳을 들어갔어.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유명한 대학이라고 하더군.”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동생 이영남이 들어간 학교가 ‘콜롬비아 칼리지 시카고 (CCC)' 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클래식은 아니고 실용음악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결국 회장님이 허락을 했군요.”
“영남이가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은 MBA과정을 들어가겠다고 했지. 그래서 허락했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잘못되다니요? 유명한 대학이고 영화음악으로 세계적 명성이 있는 대학인데요.”
“거기서 약쟁이가 되었으니 그렇지!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이야기 하지 말게. 자네는 내 후배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네.”
“약쟁이요? 회장님이 아시고 난리가 났겠군요.”
“난리가 났지. 삼방그룹 미국 법인장 보고를 듣고 당장 영남이를 귀국시켰지.”
“에효. 그래서 경영참여를 안하게 되었군요.”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야. 마리화나 같은 것도 편의점에 가면 3달러나 4달러를 주면 산다며? 그런 개 같은 나라가 어디 있어? 그러니 청소년들이 탈선 하는 거지.”
“아마 학생들이 시험 스트레스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더욱이 유학생이라면 더 그러지 않겠어요? 말도 틀리고 문화도 틀리니 더욱 스트레스를 받겠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 와서 좋아진 게 아니고 더 나빠졌으니 문제야. 그래서 회장님 사모님 건강이 나빠진 것도 그 이유야.”
“에효. 그렇군요.“
“소주 한 병 더할까?”
“두 병 째인데요?”
“한 병 더하세. 오늘 술값은 내가 내니까!”
벤츠차 기사는 술을 한 병 더 시켰다.
강시혁이 새로 가져온 소주의 뚜껑을 땄다.
그리고 벤츠차 기사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이영진 상무님과 결혼한 홍 사장님은 미국대학을 나오셨어도 그런데 손을 댔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공부만 열심히 하신 것 같네요.“
이 말은 강시혁이 슬쩍 떠보는 말이었다.
벤츠차 기사가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만 알아. 지금 홍 사장님도 이영진 상무님의 속을 많이 썩여드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