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태원 클럽 (2)
(46)
강시혁이 기타리스트 윤진형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맥주병을 들며 말했다.
“한 잔 합시다.”
“저는 연주를 해야 되기 때문에 반 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철이 친구니까 말씀 놓으세요.”
“그런데 기타는 언제부터 배운 거요?”
“대학 다닐 때부터 동호회 활동을 했습니다. 제대 후 홍대에 있는 클럽에서 보컬로 출발했는데 재주에 한계를 느껴 기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옆에 있던 변상철이 오징어 버터구이 안주를 씹으며 말했다.
“얘는 기타뿐 아니라 악기는 못 다루는 게 없어. 다 잘해. 춤도 잘 춰. 뜨질 못해서 그렇지.”
강시혁도 웃으며 말했다.
“언제 뜰 때가 있겠지.”
윤진형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삼방그룹 형님께서 많이 도와주세요. 직장 동료들을 많이 데리고 여기에 오세요. 요즘 클럽 사장님이 장사가 안 된다고 울상입니다.”
[직장 동료? 나는 혼자 지하실에서 외롭게 근무하는 사람인데?]
강시혁은 옆에서 변상철이 한마디 할 줄 알았다.
우리 형은 지하실에서 기생충처럼 사는 사람이란 소리를 꼭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변상철은 다행히 그 말은 하지 않고 열심히 술만 마셨다.
강시혁은 여기를 벤츠차 기사나 한번 데려올까 했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벤츠차 기사는 이런 분위기는 안 맞을 것 같았다. 삼겹살집에서 배를 내놓고 소주나 마시는 아재 타입이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생각난 것이 문화재단의 설운동 대리와 큐레이터 신종화였지만 이들도 강시혁과는 안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 직원들이 잡급직 경비원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겠는가? 만만한 후배 변상철과 가끔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일하는 업소에 자주 와달라는 윤진형에게 립 서비스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하하. 기회 있으면 동료들과 한번 오죠.”
동료란 소리에 옆에 있던 변상철이 웃음이 나는지 풋 하고 마시던 맥주를 입에서 뿜어냈다.
윤진형이 고개를 돌려 변상철을 쳐다보자 강시혁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영빈관에서 야간 당직이라도 하면 심심할 때가 있습니다. 기타를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학원에 다니면 되겠죠. 취미로 하는 정도라면 요즘 유튜브 같은 데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통기타는 요즘 얼마나 하는지.....”
“취미로 하는 통기타야 20만원 내외면 되겠지요. 온라인으로 구매 하셔도 되고 아니면 낙원상가 같은데 가셔서 사도됩니다.”
강시혁은 수유리 원룸 주인아줌마에게서 보증금이 입금되면 기타를 하나 사기로 마음먹었다.
밤에 무서움도 떨치고 이 기회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취미생활도 하면 좋으리라고 보았다.
기타리스트 윤진형이 일어났다.
윤진형은 무협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선배님! 다음 연주 때문에 저는 이만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강시혁도 웃으며 앉은 채로 포권을 취해 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손님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홀의 열기가 슬슬 익어가는 것 같았다. 드럼이 빨라지고 윤진형의 기타도 빨라졌다.
술 마시던 손님들의 어깨도 들썩이는 것 같았다.
드럼을 치는 사람은 신이 나는지 미친 사람처럼 드럼 채를 두드렸다.
전자기타를 둘러맨 윤진형은 아예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몸을 흔들 때 마다 여자처럼 긴 머리가 춤을 추었다.
변상철이 웃으며 말했다.
“형, 저 노래 알지? 딥 버플의 Machine Head야.”
이제는 홀에 앉았던 손님들도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강시혁도 변상철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나와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그동안 이혼문제와 자영업 실패로 인한 신불자 전락, 그리고 대리 기사를 하며 받았던 스트레스가 몽땅 날아가는 것 같았다.
변상철 역시 계속되는 공무원시험 실패를 여기 와서 푸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마 위에서 땀이 나도록 흔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강시혁과 변상철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목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야, 상철아! 이제 가자. 너무 많이 놀았다.”
이날 계산은 강시혁이 했다.
수유리에서 삼겹살 먹을 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값이 나왔다.
속은 쓰렸지만 후배 위로도 해주고 자기도 스트레스를 풀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강시혁은 어제 이태원 클럽에서 술을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아팠다.
하지만 여기는 수유리의 비좁고 낡은 원룸이 아니었다. 지하실이라 음습한 기분이 들지만 바로 마당으로 나가면 넓은 잔디가 보여 속이 확 뚫렸다.
강시혁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스트레칭을 했다.
강시혁은 책상에 앉아 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전에는 음악을 들으려면 꼭 헤드폰을 사용해야 했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꽃밭에 물을 주었다.
꽃밭에 물을 주다가 어제 회장이 한 말이 기억났다.
[화단의 꽃이 잘 자랐군. 지난번에 장례식 때 보니까 우중충 했는데 관리를 잘 하는 것 같군. 정원수도 쓸데없는 가지가 자란 것 같은데 잘 다듬어 놓았어. 여기 관리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한 건가?]
강시혁은 날마다 꽃을 보기 때문에 전보다 잘 자랐는지를 잘 몰랐다.
하지만 회장은 오래간만에 와보고 꽃들이 많이 핀 것을 느낀 것 같았다.
그것은 강시혁이 물을 잘 주어서 그럴 수도 있었고 아니면 꽃이 필 날자가 되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회장의 칭찬을 들었으니 당분간 모가지 잘릴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자 문화재단 설운동 대리가 전화를 했다.
“강 반장이요?”
“아, 대리님.”
“업무일지에 보니까 카니발 튜닝작업이 끝났다고 하던데 다 된거요?”
“예. 다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큐레이터 신종화씨 지시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기분이 나빴다.
[뭐? 큐레이터 신종화씨 지시가 있을 거라고? 내가 신종화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지시라니! 아무리 잡급직이라지만 너무하네. 빌어먹을 이거 때려치울까?]
[삼방그룹 근무했었다는 스펙가지고 다른 직장 찔러볼까? 이제는 잡급직이 아닌 대졸 경력사원 모집하는데 넣어볼까?]
강시혁이 이러고 있는데 신종화의 전화가 왔다.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을까 했지만 이내 성질 죽이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받았다.
“예, 삼방 문화재단의 상서원 관리인입니다.”
“신종화에요. 무슨 전화를 그렇게 거창하게 받아요?”
“저에게 무슨 지시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큐레이터 님!"
“지시라니요. 나한테 감정이 있는 건 아니죠? 회장님 오셨을 때 차 심부름을 내가 도맡아 했다고 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그런 것 없습니다. 오늘아침에 설 대리님이 큐레이터 신종화 씨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어휴, 그 인간! 그건 은근히 날 엿 먹이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오늘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카니발 튜닝작업 끝났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업무일지에 작업 끝났다고 정확히 보고도 올렸습니다.”
“그럼 관장님 지시도 있으니까 지금 차 가지고 오세요. 판교에 한번 다녀오실 일이 있어요.”
“미술품 수송입니까?”
“맞아요.”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강시혁은 복장을 단정히 하고 머리도 빗었다.
그리고 카니발을 몰고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 갤러리에선 오늘은 전시를 안 하는 것 같았다. 떼어낸 미술품만 테이블위에 놓여있었다.
큐레이터 신종화를 만났다. 신종화는 오늘도 다른 옷을 입고 나왔다.
[이 여자는 옷이 도대체 몇 벌이야. 볼 때마다 옷이 다르네. 나는 이 양복 하나로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지내는데!]
“판교에 있는 삼방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소에 갖다 줄 그림이에요. 연구실 오 차장이란 분 만나서 전달해 주시면 되요.”
“몇 층에 계신 분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오인근 차장이에요.”
마침 사무국장이 전시실로 내려왔다.
“강 반장! 오 차장이란 분 만나면 미술품 대금 언제 결제가 가능하냐고 한번 은근히 물어보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같은 삼방그룹 산하라도 서로 간 결제는 하는군요.”
“문화재단도 법인이고 삼방전자도 법인이니까 법인 간 거래하는 겁니다.”
“그렇군요.”
“연구소 회의실에 그림 걸어 연구원들 감상하니 좋고, 몇 년 후 그림 값도 오르니 투자개념으로도 좋은 게 아니겠어요?”
[흠, 그거 말 되네. 작가들에게 산 그림을 전시회를 통해 팔고 그림은 좋지만 미처 팔리지 않은 그림은 계열사를 동원시켜 팔아먹으면 되겠네. 그렇다면 삼방 문화재단이 망할 염려는 없겠는데? 비싼 그림을 척척 사주는 계열사들이 있으니까!]
강시혁은 그림을 싣고 판교로 갔다.
삼방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소는 판교 실리콘 파크에 있었다. 현대식으로 아름답게 지어 논 건물이었다.
여기도 엘리트처럼 생긴 젊은 사원들이 와이셔츠만 입은 채 사원증을 목에 걸고 근무하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은 을지로 본사보다 더 좋아 보이네. 지은 지도 얼마 안 되는 건물 같은데?]
경비가 또 어디 가냐고 묻는다.
“삼방 문화재단에서 왔습니다. 오인근 차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경비가 아래 위를 쳐다보았다.
강시혁도 경비의 아래 위를 쳐다보았다.
경비는 문화재단에서 왔다는 사람이 직원이 맞나? 하는 것 같았고 강시혁은 이 경비가 나하고 같은 잡급직인가 하고 서로 훑어보았다.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3층으로 갔다. 오차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연구원은 아니고 지원부서의 사람인 듯 했다.
“어디 그림 한번 봅시다. 나도 위에서 그림을 사라고 지시만 받았지 그림 구경은 못했습니다.”
사실은 강시혁도 이 그림을 구경하지 못했다.
문화재단에 그림을 실러 갔을 때는 그림이 이미 포장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동양화 비구상이었다.
분명 먹으로 그림을 그린 것 같았는데 무슨 그림인지 잘 몰랐다.
오 차장이라는 사람이 물었다.
“이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예? 저, 저는 수송만 하는 사람이고 큐레이터는 아닙니다.”
“그래도 문화재단에 계신 분이라 잘 알 것 아닙니까?”
“글쎄요? 이쪽은 어둡고 이쪽은 밝게 칠해놓은 것으로 보아 천지창조를 뜻한 것 아닐까요?”
오차장이라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게 말하니까 천지창조 같군.”
이때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무슨 그림이야?”
“천지창조라는 그림이랍니다. 상무님.”
“나도 그림은 볼 줄 모르지만 그런 것 같군.”
강시혁은 이 말을 듣고 픽 웃었다.
[헤, 내가 대충한 말을 이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듣네. 나도 큐레이터나 한번 되어볼까? 큐레이터라는 직업도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관람객 앞에서 구라만 잘 치면 되는 것 아닌가?]
상무라는 사람이 그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림은 또 구매해야 하나? 다음 달부터 연구소 R&D비용이 많이 들어갈 텐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사장님 지시니까요.”
“하긴 그림이야 사두면 자산으로 잡히고 투자 개념이니까 들여놔도 괜찮겠지.”
강시혁이 또 쓴 웃음을 지었다.
부사장 지시라고 하니까 상무라는 사람은 깨갱거리고 말을 금방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강시혁의 바지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 차장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전화 온 것 같은데요? 받아보세요.”
그래서 강시혁이 얼떨결에 받았다.
“여보세요?”
“강시혁 씨죠?”
모르는 여성의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