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44화 (44/199)

44화 재벌 회장 첫 대면 (2)

(44)

강시혁이 회장차 운전기사에 물었다.

“이사님은 삼방그룹에서 몇 년 근무하셨습니까?”

“나? 30년 근무했어요.”

“에엣? 30년요? 아이고 그럼 삼방의 산 역사이시네요. 레전드 이사님이십니다.”

강시혁이 일부러 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좀 과장된 제스처지만 세상 살다보면 이게 먹혀들어갈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리 할 때도 이런 제스처를 써주면 대리비가 후하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 오기 직전에도 강남에서 응암동까지 모셔다 준 손님이 있었다. 손님은 차에 타자마자 강시혁에게 불쑥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오늘 기분 좋아 한 잔 했소.”

“아, 예.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내가 드디어 별을 달았다는 거요?”

“예? 별을요?”

강시혁은 이 손님이 장군이라도 진급을 한줄 알았다.

운전을 하면서 룸미러로 손님을 보았다.

그런데 이 손님은 머리도 길고 군인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손님은 딸꾹질을 하고 나서 또 말했다.

“마침내 임원을 달았어요. 이사가 되었다 이 말씀이요.”

“아, 그래서 한 잔 하셨군요.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몇 년 하신 겁니까?”

“12년 되었소.”

“예? 12년요? 그렇게 빨리요?”

이번에도 강시혁은 과장된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손님은 더욱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허허. 12년이면 빠른 거요?”

"빠른 거죠. 며칠 전 모신 손님은 20년 만에 이사가 되었다고 하던데! 손님은 능력이 아주 대단하신 것 같네요.“

“하하, 능력은 무슨!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거지.”

그래서 이 손님은 내릴 때 강시혁에게 잘 가라고 2만원 팁을 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다소의 아부는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았다. 손님이 12년 되었다고 했을 때 강시혁이 제가 아는 분은 10년 만에 되었다는데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팁은커녕 운전 엿같이 한다고 성질이나 부렸을 것이다.

강시혁은 회장차 기사에게 허리를 90도 각도로 구부려 인사하며 말했다.

“이사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부탁은 뭘. 내가 해야지.”

그러면서 회장차 기사는 턱을 쓱쓱 문지르며 무게를 잡았다.

사실 회장차 기사 정도 되면 회사의 사장이나 그 밖의 임원들도 함부로 못한다.

회장님을 모시고 가다가 고춧가루 뿌리는 발언이라도 한다면 자기 출세에 지장이라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임원들은 명절이면 회장차 기사에게 구두표라도 몰래 손에 쥐어주곤 한다.

과장급 정도의 젊은 측은 회장차 기사가 지나가면 아예 허리 굽혀 먼저 인사를 하기도 한다.

강시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사님. 저는 그럼 현관 앞으로 가겠습니다. 안에 계신 분들이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까요.”

“그려, 그려. 가 봐요.”

강시혁이 현관 앞으로 갔다.

건물 안에서는 계속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리문 너머로 보니 관장과 신종화도 말석에 앉아 웃고 있었다.

강시혁은 문을 열고 들어가 ‘제가 여기 관리인입니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회장과 사장들이 담소를 나누는데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예의도 없는 사람이라고 당장 해고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시혁은 신발 정리를 다시 했다.

구두코가 밖을 향하게 일렬로 늘어놓았다. 그리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스탠 구두주걱을 세워놓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 누가 구두 정리를 잘해 놓았네.”

강시혁이 현관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있었다.

회장은 강시혁을 힐긋 한번 쳐다보고는 그냥 마당으로 내려왔다.

뒤에 따라오는 사장들은 회장만 보일뿐 강시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누구 하나 당신이 여기 관리인인가? 하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회장이 마당 한구석에 있는 화단을 보았다.

“화단의 꽃이 잘 자랐군. 지난번에 장례식 때 보니까 우중충 했는데 관리를 잘 하는 것 같군. 정원수도 쓸데없는 가지가 자란 것 같은데 잘 다듬어 놓았네. 여기 관리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사람이 한 건가?”

관장이 또 입을 막고 교태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새로 온 관리인에게 날마다 시간 맞추어 물을 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호호.”

한쪽에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강시혁을 보고 회장이 말했다.

“저 젊은이가 새로 온 관리인인가?”

이영진 상무가 옆에 있다가 말했다.

“장례식 때 호루라기를 불던 그 사람이에요. 운전도 잘한다는 이야기도 있어 미술품 수송 겸 관리인으로 채용했었죠.”

“흠. 그렇지. 맞아. 그때 주차를 잘 하던 젊은이였지!”

그러면서 회장은 강시혁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였다.

강시혁은 황송해 두 손으로 회장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처음으로 회장과의 상면이었다.

“선하게 생긴 친구군. 이름이 뭔가?”

“가, 강시혁입니다.”

“흠. 그래. 강군! 열심히 일하게. 열심히 하다보면 급여도 올라가고 또 다른 자리로 갈수도 있는 기회도 생길 거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시혁은 하도 감격해 말까지 더듬었다.

이때 회장 뒤에 있던 60대 초반의 남자가 강시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로 삼방전자의 사장이었다. 회장의 오른팔이란 소리를 듣는 사장으로 그룹에서 부회장 대우를 받는 사람이었다.

[저 친구는 장례식 때 빗속에서 호루라기를 불던 친구 아닌가? 그때 보니까 주차실력도 대단하고 영어도 할 줄 아는 것 같았는데! 회사직원이 아니고 이영진 상무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불러서 온 사람이라고 했지?]

[그런데 여기 관리인으로 들어왔네. 저놈이 말도 어눌하고 찌질이처럼 행동하는데 속에는 이무기가 들어있는 무서운 놈일 것 같네. 내가 오래간만에 물건을 하나 보는 것 같군.]

역시 인재는 인재를 알아보았다.

삼방전자 사장은 사원에서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고 올라간 사람이다. 원래부터 부잣집 아들인 회장보다도 인재를 보는 눈은 한수 위였다.

이 사람이 강시혁을 알아본 것이다.

[꽃이 정말 장례식 때보다는 생생해. 이놈은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노부나가 밑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놈이군.

히데요시가 최하급 무사로 화장실을 담당한 후 화장실이 윤이 났다고 했지? 그리고 겨울철 주군인 노부나가의 신발을 따듯하게 하기 위해서 더러운 신발을 가슴에 품었다고 했지?]

[아까 보니 우리가 신고 온 구두의 코가 밖을 향하게 한건 이놈 짓이었어. 요즘 우리 회사의 MZ세대 직원 중 누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 회식 때 자기 앞의 고기도 안 자르는 놈들인데! 삼방의 정규직은 똑똑하기는 한데 쓸 만 한 놈이 없었는데 확실히 이놈은 다르군.]

[이놈의 근무방식에는 확실히 자기 영혼이 들어가 있어. 빗속에서 솔선하여 호루라기를 불 때나 꽃을 가꾸거나 신발정리를 하거나 모두 온 보딩(on boarding: 신입사원 적응교육 프로그램)이 필요 없는 놈이야. OJT교육(직장내 직무교육)도 필요 없는 놈이야. 자기가 알아서 솔선하지 않는가!]

[거기에 비하면 지금 삼방전자의 직원들은 자기 업무는 능숙하게 처리하지만 영혼은 담지 않은 소울리스(soulless)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실 전자 사장은 강시혁을 본 것이 딱 두 번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자사장은 그동안 조직 내에서 여러 사람을 보아 와서 그런 가 관상까지 보는 것 같았다.

전자사장은 계속 강시혁의 이마와 콧날 위의 준두(準頭)를 쳐다보았다.

강시혁은 회장을 따라온 사장이 자꾸 자기를 유별나게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전자 사장은 또 다시 자기 직원들을 생각했다.

[삼방전자의 기획실 직원들에게 신발정리를 시킨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회사를 그만둔다고 떠들겠지.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 사원을 신발정리나 시키는 꼰대는 물러가라고 성토하겠지.]

전자사장은 팔짱을 끼고 쓴 웃음을 지었다.

[찌질이 같은 이놈. 무서운 야망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친구군. 아무래도 지켜봐야 할 놈일 것 같네.]

회장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쪽으로 향했다.

대문 밖에는 회장과 사장을 모시고 온 기사들이 차의 엔진을 걸어놓고 일제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운전석에 앉아있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주인을 모시기 위하여 뒷좌석의 문을 반쯤 열고 서 있었다.

회장이 성큼 거리며 먼저 대문 밖으로 나오고 뒤를 따라 사장들이 나왔다.

꼭 조폭 두목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회장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회장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찮은 말단 잡급직이라도 이렇게 대해주니 수만 명의 종업들이 회장을 잘 따르는 것 같았다.

회장 가방모치인 임 과장은 회장차 앞좌석에 탔다.

임 과장은 차에 타면서 강시혁을 행해 오른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왼쪽 눈을 질끈 감으며 윙크를 해주었다. 오늘 일은 잘되었다는 신호이리라.

강시혁은 뒤따르는 사장차에도 일일이 인사를 했다.

칼같이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전자 사장이 출발 직전 차 문을 반쯤 열고 강시혁에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처럼 하면 되네.”

[지금처럼 일 하라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꿀 보직에 날마다 인터넷이나 하고 지냈는데? 저렇게 말씀하시는 사장님은 어느 계열사 사장님이지?]

강시혁의 옆에 서서 역시 공손히 떠나는 회장과 사장을 배웅하는 신종화에게 말했다.

“방금 가신 사장님은 누구십니까?”

“몰랐어요? 전자 사장님이세요. 현재 삼방그룹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는 분이에요. 회장님 오른팔로 소문나신 분이에요.”

뒤에서 갑자기 큐레이터 신종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관장이었다.

“신종화씨!”

“예, 관장님!”

관장을 처다 보니 조금 전 회장 앞에서 교태를 부리던 태도는 없어지고 까칠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야지?”

“접견실 정리를 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여기 남아있는 강 반장에게 시켜.”

“예?”

관장이 강시혁을 불렀다.

“이봐요. 강 반장.! 우리가 지금 시내에서 아티스트들과 중요한 미팅이 있어요. 접견실 정리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제가 정리는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한대로 화단에 날마다 물주는 것 잊지 말아요.”

[언제 이 여자가 나한테 화단에 물주라고 지시했었나? 회장 앞에서도 자기가 화단 물주는 걸 나에게 지시했다더니 또 그러네. 미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는 분이 왜 이러실까?]

하지만 강시혁은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은 채 말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특히 가운데 있는 백일홍 관리를 잘 해요. 비싼 나무니까!”

“알겠습니다. 날마다 물주는 것 잊지 않겠습니다.”

“강 반장은 이영진 상무 댁의 가정부가 추천했다고 했나?”

“예? 고, 고향이 이웃이라서요.”

“알겠어요. 우리는 갈 테니 문단속 잘해요.”

그러면서 관장은 약간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하찮은 가정부 추천이니 말 안 들으면 바로 날려버릴 거야 하는 태도인 것만 같았다.

강시혁은 관장과 신종화가 탄 기아K9의 뒤꽁무니를 향해 크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아직은 찌질이 짓을 좀 더 해야 할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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