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재벌 회장 첫 대면 (1)
(43)
전화 속에서 부드러운 임창영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은 인물만 잘난 것이 아니고 목소리까지 성우처럼 부드러웠다. 같은 남자로서 은근히 질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강시혁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상사나 다름없었다.
“비서실 임창영 과장입니다.”
“아, 과장님! 영빈관의 강시혁입니다.”
“영빈관이 아니고 상서원이라고 해주세요.”
“상서원의 강시혁입니다.”
“내일 회장님께서 여의도 전경련 회관을 들렸다가 상서원을 방문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회장님은 내일 전경련 회관의 컨퍼런스센터에서 재계 간담회가 있습니다. 회의 끝나고 여의도에서 식사 후 오후 3시경에 상서원에 들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리 비우지 말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강시혁이 전화통화 하는 걸 큐레이터 신종화가 들었다.
“전화한 사람이 누구세요? 혹시 비서실 임 과장 아니에요?”
“맞습니다. 내일 회장님이 여의도의 중요 행사에 참석 후 오후 3시경에 여길 들릴 가능성이 많답니다.”
“그래요?”
갑자기 신종화의 눈이 반짝였다.
강시혁은 지난번에 문화재단의 설운동 대리가 비서실 전화가 오면 미리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설운동 대리에게 전화를 했다.
“강시혁입니다.”
“무슨 일이요?”
“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 회장님께서 여의도 행사 후에 오후 3시경쯤 여기를 들리겠답니다.”
“흠. 그래요? 연락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신종화도 돌아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관장님이세요? 전 신종화입니다. 지금 동빙고동 영빈관에 나와 있는데 내일 오후 3시경쯤 회장님이 여기에 오신답니다.”
조그맣게 상대방 전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방금 비서실 과장이 여기 계신 반장님에게 전화했습니다. 커튼 달러 나왔다가 옆에서 들었습니다.”
강시혁은 이 여자가 자기도 점수를 따려고 재빨리 문화재단 관장에게 전화한 것을 알았다.
[이 여자는 그런 건 빠르네. 그런데 직접 관장에게 바로 전화하면 사무국장과 설운동 대리가 싫어할 텐데? 그래서 설 대리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닐까?]
회장이 뜬다는 소식은 문화재단에서 담당인 설운동 대리가 먼저 알고 맨 꼭대기에 있는 관장이 먼저 알았다. 정작 알아야할 사무국장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강시혁은 사무국장에게도 전화를 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면 또 설운동 대리가 싫어할 것 같았다. 조직 체계의 질서는 지켜야 했다.
큐레이터 신종화는 확실히 조직체계의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
강시혁은 내일 회장이 온다니 긴장은 되었다.
회장을 장례식 때 보았지만 가까이서 본 것은 아니었다. 회장도 자기의 얼굴을 잘 모를 것이다.
회장이 삼방그룹의 수만 명 직원들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는 영빈관, 아니 상서원의 관리인이라 얼굴을 익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내일 어떻게 자기를 어필할까 하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무리하게 하면 오히려 역효과 나겠지. 조용히 평상시대로 내 일만 하면 되겠지.]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문화재단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 반장? 내일 회장님 오신다는 소식 들었죠?”
[하, 이 여자 보소. 회장이 오신다는 소식은 내가 제일 먼저 전화를 받았는데 소식 들었냐고 묻네. 설운동 대리가 이제야 보고를 한 것 같군.]
“예, 들었습니다.”
“접견실 청소도 잘해 놓으시고 화장실 점검도 해 놓으세요. 회장님이 오신다니 실수 없도록 해야 되요.”
“알겠습니다. 국장님.”
강시혁은 업무일지에 기록할 것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했다.
[업무일지에 내일 회장님 오실지 모르니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사무국장 전화를 받았음. 이라고 한줄 기재해 줘야겠군. 그러면 내일 설운동 대리가 결재 올리는 업무일지를 보고 사무국장이 만족한 미소를 짓지 않겠어?]
강시혁은 내일 오신 분들 구두라도 정리하려면 긴 구두 주걱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백화점에 가서 스텐 롱 구두 주걱을 두 개나 사가지고 왔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강시혁은 화단에 물을 주고 접견실과 화장실 청소를 했다.
주방의 차를 끓이는 도구 같은 것도 점검했다.
심지어 강시혁은 주차장이나 대문 밖 골목까지도 깨끗이 청소했다.
점심을 먹고 지하실 자기방과 관리실도 청소를 했다.
그리고 입에서 냄새가 안 나게 양치질도 했다.
넥타이가 단정히 매어 졌나 거울에 비추어보았다. 회장에게 너무 찌질이 같은 인상은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 반쯤 되었을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살짝 열어놓고 있는 중이라 차 소리가 잘 들렸다.
강시혁이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그런데 온 차는 회장 차가 아니라 큐레이터 신종화의 차였다.
신종화의 차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누가 내리는데 자세히 보니 갤러리 관장이었다.
신종화는 관장과 함께 온 것이다.
강시혁은 문화재단 잡급직이지만 이 관장은 문화재단의 상근자로는 최고책임자였다. 이사장과 부이사장은 상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강시혁이 관장 앞에 와서 공손히 허리 꺾어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관장님.”
“별일 없죠?”
“예, 별일 없습니다.”
관장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관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화분은 왜 저기 있죠? 당장 안 보이는데 치워요.”
그래서 강시혁이 화분을 치워주었다. 화분 덩치가 커서 옮기는데 힘도 들었다.
“저 석등은 두 발자국 왼쪽으로 옮겨 봐요.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 석등을 배치했으니 저런 모습이 나오지!”
그래서 강시혁이 또 마당 잔디 위에 있던 석등을 옮겨주었다.
손이 금방 더러워졌다.
관장이 1층 접견실과 2층 방을 점검했다.
지하에 내려와 관리실을 구경하고 강시혁의 방도 보았다.
강시혁의 방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기 벽에 걸린 옷가지들은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으세요.”
“여기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게 바로 아티스트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매카닉들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면서 관장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는 모습은 꼭 북한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 같았다.
[제기랄, 이 여자가 별걸 다 가지고 트집을 잡네!]
하지만 자기의 상전인 관장의 지엄하신 명령이 아닌가!
강시혁은 꼬리를 내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회장이 왔다.
회장은 혼자오지 않고 계열사 사장인듯한 사람들 몇 사람을 대동하고 왔다.
뒤에는 놀랍게도 이영진 상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가방을 든 임창영 과장의 모습도 보였다.
[임 과장이 가방을 들고 회장 뒤를 따라오는걸 보니 가방모치란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그런데 삼방그룹 직원들은 가방모치 저 자리에 가고 싶어 모두 안달을 하겠지. 과장급에서 회장의 최 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아닌가!]
강시혁이 회장 앞에 달려가 인사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틈에 관장과 신종화가 앞을 가로막고 회장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호호,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오, 관장도 와 계셨구먼. 관장은 점점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호호, 회장님도 점점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관장은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몸을 비틀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시혁이 속으로 픽 웃었다.
[나이든 여자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니 그것도 못 봐주겠네. 나를 향해 도도한 표정을 지은 건 다 어디가고 회장 앞에서 저렇게 아양을 떨까!]
강시혁은 인사할 기회를 놓쳤다.
회장은 관장의 안내에 따라 강시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은 덩치도 컸다. 그리고 무섭게도 생겼다.
수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삼방그룹의 수장다웠다. 풍기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강시혁은 저렇게 생긴 사람이 딸은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낳았을까 하였다.
뒤에 따르던 이영진 상무를 보고 강시혁이 인사를 하였다.
이영진 상무가 방긋 웃으며 아는 체를 해 주었다.
이어 뒤 따르던 임창영 과장에게도 인사를 하였다. 임창영 과장도 웃으며 왼손을 들어주었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강시혁도 따라 들어왔다.
회장은 접견실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반달곰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옆으로 계열사 사장들이 앉았고 이영진 상무도 앉았다.
임창영 과장은 회장 옆에서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었다.
강시혁이 준비된 차를 내오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는 벌써 신종화가 와서 찻물을 따르고 있었다.
차를 나르는 심부름이라도 하려고 서 있는데 신종화가 말했다.
“강시혁씨는 내려가 보세요.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자기가 알아서 해? 그럼 나는 뭐지? 여기 관리인은 내가 아닌가? 이 여자도 회장 앞에서 눈도장 찍고 싶어 하는구나!]
강시혁이 우물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관장의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강 반장은 내려가 봐요. 여기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두 여자가 이렇게 공격을 하나 어쩔 수가 없었다.
강시혁은 비실비실 물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강시혁은 지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마당을 맴돌기만 하였다.
건물 안에서는 하하, 호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장과 신종화도 회장과 사장님들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당 구석의 정자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과 사장님들을 모시고 온 기사들이 모여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다니는 벤츠차 기사도 있었다.
[그렇지! 내가 저 사람들을 깜빡했네.]
강시혁은 지하로 내려가 음료수 통을 들고 왔다.
“안녕하세요? 여기 관리인입니다. 음료수 하나씩 드세요!”
“고맙소.”
“과장님도 하나 드세요.”
강시혁이 벤츠차 기사에게도 비타500 음료수를 주었다.
벤츠차 기사가 옆에 앉은 늙은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 반장! 인사드려. 회장님을 모시고 다니는 이사님이셔.”
강시혁은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이사급 운전기사인 것을 알았다.
이사급이면 연봉 억대가 넘는 기사다.
운전기사로서는 최고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강시혁이라고 합니다. 여기 건물 관리인으로 있습니다.”
회장차 기사는 빙긋 웃으며 일어나지도 않고 앉은 채로 강시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이 앙상한 것으로 보아 연배가 거의 회장님이랑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츠차 기사가 회장 기사를 향해 말했다.
“형님!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내 후배였습니다.”
“후배? 어디 후배?”
“같은 맹호부대 출신입니다.”
강시혁도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선배님을 만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회장 기사가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해병대 X기요.”
“아, 그러세요?”
옆에 있던 눈이 작은 어떤 기사가 말했다.
“이사님!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군대를 갔다 왔는데 저기 안에 있는 사장님들은 군대를 몇 사람이나 다녀왔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회장님 수행비서인 임 과장도 안 갔다 왔겠지요.”
회장차 기사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이 사람아!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네!”
“예?”
“자네는 아직 남의 집 밥을 먹을 자세가 안 되어 있네. 더 배우게!”
역시 노장(老將) 다운 말이었다.
강시혁도 빙긋 웃었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노장이네. 기사들은 입이 무거워야하고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삼방그룹에 오래 붙어있으면서 이사 대우를 받는 건 그냥 된 것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