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재벌그룹 영빈관 (4)
(42)
강시혁은 오늘 업무일지를 작성했다.
오전에 각 방 물청소와 각종 전기시설을 점검했다고 적었다. 또 정원수와 화단에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했다고 적었다.
오후에는 파출소에 들려 소장을 면담하고 영빈관이 있는 골목길 순찰을 강화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적었다.
소장을 만나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오고서는 강력히 요청했다고 적었다.
[뭐, 업무일지란 것이 따로 있나? 이렇게 적으면 되는 거지. 설운동 대리도 자기가 쓰던 컴퓨터를 나에게 주고 새로 사서 지급한 것으로 위에는 보고했겠지.]
업무일지를 다 쓰고 나서 메일로 설운동 대리에게 전송했다.
[그런데 삼방그룹은 자체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없나? 업무일지를 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지? 재벌그룹에는 그런 게 있다던데. 아마 문화재단은 계열사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네.]
업무일지를 보내고 나서 기지개를 펴고 있는데 밖에 대문 비디어 폰이 울렸다.
사람 모습이 잘 안보여 혹시 문화재단에서 왔나 하고 뛰어나갔다.
온 사람은 뜻밖에도 이영진 상무를 모시고 다니는 벤츠차 기사였다.
“아! 과장님! 맹호!”
그러면서 강시혁이 맹호부대 거수경례를 붙였다.
강시혁은 혹시 이영진 상무가 왔나 하고 벤츠차 기사 뒤를 보았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무님 모시고 온 것이 아닙니까?”
“아냐. 상무님은 조금 전에 자택에 모셔다 드렸어. 퇴근하다가 자네 생각이 나서 들린 거야. 어때 할만 해?”
“할 만 합니다. 이리 들어오세요. 지하에 내 방이 있습니다.”
벤츠차 기사가 지하에 있는 관리실과 강시혁이 쓰는 방을 둘러보았다.
“혼자 심심하겠는데?”
“수시로 점검도 하고 문화재단 사무국에서 전화도 와서 낮에는 심심할 새도 없습니다. 밤에 좀 외롭기는 합니다.”
“그럴 테지.”
강시혁은 이 사람이 회사와 오너 가족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리라고 보았다. 삼방그룹에서 짬밥이 20년은 넘었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저.... 과장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슈퍼에 가서 맥주 좀 사올까요? 우리 둘밖에 없고 업무시간도 끝났으니 한잔하고 가실래요? 차는 여기에 놓고 가면 될 것 아닙니까?”
“하하. 오늘은 가봐야 돼. 딸년하고 약속한 게 있어.”
“과장님은 좋은 아빠인 것 같네요. 자택이 어디세요?”
“나는 약수동에 살아.”
“약수동이면 여기서 지하철 서너 정거장 아닙니까? 그럼 토요일 저녁에 제가 약수동에 가서 과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그건 좋지.“
“사실 삼방 문화재단 애들 보다는 과장님이 더 정감이 갑니다. 과장님은 제 군대 선배이고 또 같은 운짱 출신이 아닙니까? 하하. 그래서 과장님이 집안 형님처럼 느껴집니다.”
“자네는 그래도 선배를 아네. 요즘 새로 들어오는 자식들은 모두 건방지기 짝이 없는데 말이야.”
“그럼 제가 이번 토요일 퇴근하고 저녁 7시경 약수역에 가서 과장님께 전화 올리겠습니다.”
“하하. 알아서 하게.”
사실 회사 사장님들 차 기사는 과장급 대우를 받아도 관리직 사원들은 인정을 안 해준다.
물론 과장급 대우를 받기 때문에 급여가 일반 과장들하고 같겠지만 공채 대졸사원이나 대리급들은 과장이라고 잘 부르지도 않는다.
사장차 기사는 기사들 세계에서는 목에 힘을 주어도 사실상 좀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강시혁이 계속 과장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주니 어찌 싫어하겠는가!
[이렇게 해 둬야 이 사람이 이영진 상무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좋게 해주겠지.]
벤츠차 기사는 2층엔 올라가지 않고 1층 접견실만 구경했다.
달라진 인테리어와 고급 가구들을 보고 좋다는 말을 연발하였다.
[이 사람이 내일 자기가 여기 왔다 간걸 이영진 상무에게 보고하겠지.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더 보여줘야지.]
“밤에는 여기 관리실에 앉아서 꼬박 모니터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 낮에는 이곳 파출소 소장을 만나서 이곳 순찰을 강화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도 했습니다.”
“오, 그런가?”
“그리고 저도 밤에는 꼭 두 번 플래시를 들고 집안 안팎을 한 바퀴 돕니다. 여기는 고가의 미술품이 있거든요.”
“여기 영빈관 지킴이 하나는 똑 부러진 사람이 들어온 것 같네.”
“열심히 해야죠. 대리 뛰다가 모처럼만에 얻은 직장인데요.”
벤츠차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빈관 구경 잘 했네.“
“그런데 금산 아줌마도 여길 한번 구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좀 건방진 데가 있어. 식모면 음식이나 잘 만들면 되지 어딜 구경하겠다는 거야?”
강시혁은 이 기사가 금산 아줌마와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가정부와 운전기사가 서로 으르렁대는 것 같군. 같은 고용인끼리 그러면 되나?]
강시혁은 벤츠차 기사가 과장이라고 무게 잡고 있지만 가방끈은 길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은 지난번 만났던 비서실의 임창영 과장과 벤츠차 기사를 비교해 보았다.
둘 다 같은 삼방그룹의 과장이다.
[같은 과장이지만 이 사람은 임 과장보다 10년이나 나이가 많은 것 같네. 그게 가방끈 차이겠지.]
강시혁은 벤츠차 기사가 간다고 하여 문밖까지 따라 나왔다.
강시혁이 벤츠차 기사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상사에게 인사하듯이 크게 허리 꺾어 인사를 하였다. 벤츠차 기사는 기분이 좋은지 왼손을 흔들었다.
“과장님! 토요일 저녁에 꼭 약수역에서 전화 드릴게요.”
“기다릴게!”
강시혁은 대문을 잠그고 지하실로 들어왔다.
너무 집안이 껌껌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마당에 있는 전등은 켜두었다.
전등을 켜면서 강시혁은 정말 전기기사 자격증이라도 따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 자격증이라도 따두면 문화재단에서 누가 내 자리 노리지는 않겠지.”
강시혁은 책상에 앉아 전기기사나 건물관리인 학원이 어디에 있나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그런데 건물관리는 빌딩 경영관리사라 전기기사 자격증을 따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기기사는 굉장히 따기가 어려운 분야였다.
우선 자격부터가 넘사벽이었다.
4년제 대학 전기관련학과를 졸업했거나 실무경력 4년 이상자로 제한하고 있었다.
[이크! 이거 전기기사는 만만한 자격이 아니네.]
그런데 더 뒤져보니 전기 기능사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다.
[전기 기능사 자격을 따야겠군!]
강시혁은 전기 기능사 학원이 가까운 용산구에 있나 했더니 없었다.
노량진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나 등록을 해야 되겠네. 국비 지원받는 게 없나?]
학원 사이트에서는 내일배움카드로 교육비 지원이 가능하다고 되어있었다.
[내일배움카드를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 있을 때 만들어 놓을 걸 그랬네.]
그래서 삼방 문화재단 재직자 자격으로 내일배움카드를 신청하기로 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 포털 사이트인 직업훈련포털 HRD-NET에 들어갔다.
강시혁은 이날 저녁 내일배움카드를 온라인으로 신청했다.
교육은 온라인 강좌도 있지만 실습 때문에 학원에 나가기로 하였다.
[인문학 전공자가 팔자에 없는 전기 기능사 시험공부를 하게 되었네! 뭐, 배워두면 나쁠 건 없겠지. 피가 되고 살이 되겠지.]
다음날도 일어나 화단에 물을 주었다.
[이거 물을 너무 자주 주어 뿌리가 썩는 건 아니겠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문화재단 신종화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거기 점심시간 지나서 들릴 거예요. 접견실에 커튼을 달아야 하니 커튼업자와 함께 갈 거예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종화의 목소리는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남자 애인이라도 생겼나? 전보다는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네.]
오후 2시쯤 큐레이터 신종화가 왔다. 커튼 업자와 함께 왔다.
접견실에 커튼을 달았다. 커튼도 고급이고 색깔도 방안 분위기와 어울리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급스러운 홀이 더 고급스럽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이다음에 부자가 되어 아파트를 사면 인테리어는 이 여자에게 부탁해야 겠군.]
강시혁은 또 아부성 발언을 하였다.
“커튼 칼라가 좋네요. 역시 큐레이터님 감각은 짱 입니다.”
신종화는 미소만 지었다.
신종화가 이번엔 식탁의 테이블에 하얀 식탁보를 깔았다.
“식탁보는 나중에 더러워지면 강 반장님이 세탁하셔야 합니다. 이 근처에 세탁소가 있나 잘 찾아보세요.”
“이 위에 아파트가 있어서 세탁소는 있습니다.”
“그런 거 담당하라고 문화재단에서 강 반장님을 배치한 거 아니겠어요?”
“그 그렇습니다. 당연히 제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강시혁이 지하로 내려왔다.
슈퍼에서 사온 캔 커피를 들고 접견실로 왔다. 그 사이에 커튼업자는 가고 신종화는 거실 테이블 의자에 방석을 깔고 있었다.
“이거 들고 하세요. 뜨거운 커피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 캔 커피를 드립니다.”
“고마워요.”
신종화가 방금 자기가 깔아 논 방석이 있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참, 강 반장님은 대학을 다니셨데요? 사무국장님한테 들었습니다. K대학을 졸업하셨다면서요?“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대학을 다니는 세상 아닙니까?”
“그래도 K대학은 들어가기가 쉽지 않잖아요. 서울 강남 학군에서도 중위권 이상이 가는 학교 아니에요?”
[그건 맞다. 내가 대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상위권이었으니까.]
강시혁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런가요? 저는 지방 출신이라 강남학군에 대하여는 잘 모릅니다.”
“삼방그룹에도 K대학 출신이 많아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강시혁 씨는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시험 봐서 정규직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제 이 여자가 강 반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시혁 씨라고 불렀다.
역시 학벌의 위력은 서서히 나타났다.
“졸업하고 취업했지요. 실력이 없어 그룹 사는 아니지만 코스닥 상장기업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왜 나왔어요?“
“들어간 지 석달 만에 상사인 과장하고 싸우고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재취업이 안 되어 아연테크라는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갔죠.”
“과장하고 싸워요? 강시혁 씨 이제 보니 다혈질인 것 같네요.”
“내가 다혈질이 아니라 그 과장이 다혈질 이었죠”
“그런데 그 아연테크도 그만 두신 거예요? 환경적응을 잘 못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설운동 대리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주어도 잘 이겨나가고 있잖아요.”
“환경적응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부도가 나는 걸 어떻게 합니까?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나왔죠.”
“직장 운이 없네요.”
“에효. 저는 소사가 될 팔자인 모양입니다.”
“소사요?“
“옛날에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나같이 잡일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런 사람을 소사라고 불렀답니다.“
“그럼 앞으로 강 반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 소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러면서 신종화는 깔깔 웃었다.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그냥 이름을 막 불러도 되고요. 제가 삼방 문화재단의 제일 쪼렙 아닙니까?”
“열심히 하세요. 삼방그룹 계열사인 삼방레저에는 K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소리도 있어요.”
“그래요?”
“거기는 임원들도 K대학 출신들이 많아 K마피아란 소리도 있습니다.”
“모두 경영대학 출신들이겠지요. 나는 문과대학 어문계열 출신이라.......”
“해외영업부 쪽에 어문계열들 많아요.”
“영어를 특출 나게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젠 늦었겠지요. 나이가 많아져서. 또 경험도 없고.”
강시혁은 신종화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냥 대리운전이나 하고 다닌 사람이 아니라 K대학이라도 나온 사람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혁이 신종화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가 왔다.
스마트 폰을 열어보니 비서실 임창영 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