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재벌그룹 영빈관 (2)
(40)
강시혁은 사무실 공기가 참 맑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이 근무해도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오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공기청정기나 가습기 같은 것을 설치한 것만 같았다.
전에 다니던 아연테크 사무실은 공장하고 붙은 사무실이라 좀 지저분했다.
하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역시 재벌기업 비서실다웠다.
임 과장이 명함을 주자 강시혁도 자기 명함을 꺼냈다. 어제 큐레이터 신정화에게 받은 명함이었다.
임창영 과장 명함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삼방그룹 회장 비서실, 과장/임창영]
이 정도 명함이라면 어디 가서 외상술을 오지게 퍼먹어도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정식으로 인사합시다. 나 임창영입니다.”
“강시혁입니다.”
강시혁은 임창영 과장의 명함을 보고 얼른 속주머니에 넣었으나 임 과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강시혁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강시혁이 약간 주눅이 든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어제 와서 인사를 하려고 했었지만 집기가 들어오는 날이라 못했습니다.”
“아아, 괜찮습니다. 거기 영빈관은 회장님 지시로 상서원(祥瑞園)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상서원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복되고 좋은 기운이 일어나는 동산이란 뜻이랍니다.”
[복되고 좋은 기운이 일어나는 동산이라면 내가 그 기(氣)를 받겠는데? 나는 거기서 아예 상주하는 놈이 아닌가!]
“그럼 앞으로 상서원이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에게 상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를 우리 비서실에서 부탁했습니다.”
강시혁이 아부하는 웃음을 띠고 말했다.
“상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를 달면 더 폼이 날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근간 상서원을 들릴 예정입니다. 우리 비서실은 위로 사장급인 비서실장님이 계시고 임원도 한 분이 계시지만 회장님 수행은 통상 내가 담당합니다.”
강시혁은 이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잘 보여야 미리 회장님이 영빈관에 오시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이 자기를 엿 먹이는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리 연락을 안 해주어 혹시 자기가 낮에 낮잠이라도 자는데 회장님이 온다면 자기는 찍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는 공채 직원도 아니라 바로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면 날아갈 파리 목숨이 바로 임시 잡급직이 아니던가!
강시혁은 명절에 양주라도 이 사람에게 슬며시 선물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은 돈이 없어 못 사고 17년 산이라도 한 병 사서 선물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임 과장이 테이블 위에 있는 강시혁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강시혁씨는 어디에 있다가 문화재단에 들어오신 겁니까? 건물을 관리하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빌딩관리업체에 근무하신 겁니까?”
“아연테크라는 작은 중소기업에 근무했습니다. 제조업체라 공무 일이 많습니다.”
“아, 공무를 담당하셨군요.”
강시혁은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 않고 미소만 날려주었다.
자기는 공무 쪽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을 한 관리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조업체 공무 직이라면 작은 중소기업이라도 최소한 용접기능사 자격증 정도는 있어야 한다. 자격증만 있어도 안 된다. 실무경력도 있어야 했다.
임 과장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내가 바쁜 일이 좀 있습니다. 강시혁씨는 인상이 좋네요. 앞으로 일을 잘 하실 분같이 보이네요.”
“과장님도 인상이 참 좋으십니다. 제가 나이도 몇 살 아래인 것 같으니 동생처럼 편하게 대해 주셔도 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과장이 일어서자 그의 벨트를 보았다.
벨트 디자인이 처음 보는 것이었고 상당히 고급스러워보였다.
그리고 와이셔츠도 강시혁이 입은 와이셔츠보다 더 눈부시게 흰 것 같았다. 넥타이도 고급 실크넥타이였다.
강시혁의 벨트나 넥타이는 모두 마트에서 산 것이라 싸구려 냄새가 났지만 임 과장은 그게 아니었다.
해외 출장이라도 다녀올 때 모두 면세점에서 고급 브랜드가 달린 제품을 사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시혁은 임 과장과 악수를 하고 나왔다.
다시 1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삼방그룹 직원 몇 명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들은 강시혁과 같은 양복을 입었지만 때깔이 달랐다.
이들은 월급도 많이 받고 좋은 환경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피부도 좋아보였다.
하지만 강시혁은 그동안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투잡을 뛰어왔기 때문에 피부도 거칠었다.
양복도 싸구려라 옷감부터가 틀린 것도 같았다.
강시혁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화장실엘 들렸다.
소변을 본 후 화장실 거울을 보았다.
조금 전에 본 비서실 직원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본 직원들 얼굴과는 사뭇 다른 초라한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저게 난가? 참 더럽게 찌질이처럼 생겼네. 딱 대리 기사 아니면 건물 경비나 하는 잡급직 얼굴이야. 아무리보아도 내가 이런 빌딩에서 와이셔츠만 입고 엘리트들과 함께 근무할 얼굴은 아니야.]
[아니지. 여기에 있는 놈들은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놈들이지만 나는 대지 300평짜리 대 저택에 사는 놈이 아닌가! 희망을 갖자.]
그러면서 강시혁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다음날 강시혁은 카니발을 몰고 인사동 문화재단 사무실로 갔다.
직속 상관격인 설운동 대리를 만났다.
“어제 비서실의 임창영 과장을 만났습니다.”
“그래요? 잘 했네요. 회장님의 움직이는 일정은 그 사람이 다 알기 때문에 여기에 사무국장님이나 관장님도 그 사람에게는 깍듯이 대합니다. 아마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들도 임창영 과장에겐 잘 할 겁니다.”
“그렇겠네요. 회장님이 뜨는 것은 그 사람이 다 알 테니까요.”
“그리고 컴퓨터는 저기 구석에 있으니 가져가세요. 프린터도 있으니 가져가세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비용 나간 것 영수증 가져왔으면 주고 가세요.”
“오다가 카니발 주유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영수증 주고가면 결재 후 내일 강시혁 씨 계좌로 보내드리죠. 그리고 엑셀 다룰 줄 알죠?”
“아연테크에 있을 때 조금 해보았습니다.”
“지출 현황은 매일매일 엑셀에 입력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컴퓨터 연결되면 업무일지 보내주는 것도 잊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강시혁은 컴퓨터를 차에 실었다.
설운동 대리가 사무실에서 내려와 카니발 승합차를 구경했다.
“이 차 마음에 들어요?”
“주행키로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새 차 같습니다.”
“일요일 내가 낚시 갈 때 빌려도 되겠네.”
강시혁이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일요일 이차를 빌려가다니! 그건 안 되지! 회사 차를 마음대로 개인적으로 쓰면 되나!]
그런데 강시혁은 안 된다는 소리를 못했다.
그냥 난처한 웃음만 지었다. 아직은 새로 들어온 쪼렙 신세이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큐레이터 신종화도 만났다. 신종화에게도 공손히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큐레이터님!”
“오셨어요? 영빈관 벽에 걸 그림은 저기 포장해 놓았어요.”
“제가 들고 내려가지요.”
“아니에요. 같이 들어야 해요. 혼자 들고 가다가 벽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안돼요. 비싼 그림이에요.“
강시혁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짜리 그림인데요?”
“억대 넘어요.”
[억대? 그럼 이 그림 한 점이면 내 빚을 다 갚고도 남는단 말인가? 하,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붓놀림 한번하고 내가 5년은 갚아야 할 돈을 버네!]
강시혁이 인턴과 함께 그림을 들고 주차된 차로 왔다. 신종화도 따라 내려왔다.
“조심해서 차에 들여놓으세요. 어머나! 차의 시트가 아직 그대로네. 그리고 이게 뭐야! 컴퓨터도 실려 있네. 조심해서 실어요.”
“조심히 싣고 있습니다.“
“주행 중 컴퓨터와 부딪치지 않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원래 고가의 미술품은 항온 항습 기능을 갖춘 무진동 차량으로 운반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실 때 급브레이크는 밟지 않도록 하세요.”
“그동안 운전으로 밥 먹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크게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저 컴퓨터는 강 기사, 아니 강 반장님이 사용하실 거예요?”
“그렇습니다.”
“흥! 그 한남충이 새로 산 컴퓨터는 자기가 쓰고 또 자기가 쓰던 컴퓨터를 준 것 같네.”
“한남충이라뇨?”
“누구긴 누구예요. 설운동이란 높으신 양반이지!”
강시혁은 설운동 대리와 이 큐레이터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속으로 픽 하고 웃었다.
강시혁은 컴퓨터와 그림을 싣고 동빙고동으로 왔다.
그림을 걸고 컴퓨터를 설치하니 이제 거의 모든 게 다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컴퓨터는 처음에 잘 안 들어와 인터넷이 안 들어오나 걱정했는데 공유기를 껐다가 켜니까 들어왔다.
이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강시혁은 또 카니발을 끌고 용산 이마트에 가서 소모품을 사왔다.
쓰레기통이나 슬리퍼, A용지, 야간 순찰용 플래시와 드라이버와 망치 같은 소형 공구도 샀다. 정원수 나무를 자르는 전지가위 같은 것도 샀다. 시설물을 관리하면 모두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제 일요일 수유리 원룸에 있는 짐만 옮기면 되었다.
아직 퇴근시간이 남아 지하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인데 어디서 본 듯한 전화번호인 것 같기도 하였다.
“여보세요?”
“강 기사요?”
탁한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래서 노원구에 있는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 계신 어르신 중 한분이 전화를 한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 양주 백석동 사는 사람이요.”
서초동 박 변호사의 아버지였다.
“아,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다음 주 월요일 여기 올수 있겠소? 내가 또 강남 성모병원을 가야할 것 같소.”
이 분은 아직도 강시혁이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는 줄 알았다.
“아이고, 어쩌지요? 제가 어디 취업이 되어 어르신을 모시기가 어렵게 되었네요.”
“오, 그래요? 취업이 되었다니 축하해요.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나? 운전을 잘 하니까 혹시 택배회사에 들어가셨나?”
“택배회사는 아니고 어느 회사 별관 건물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럼 소사 같은 일을 하나?”
“예? 소사요?”
“옛날 국민학교에서 학교 건물도 관리하고 종 같은 것도 치고 하던 사람 말이요.”
“아, 예. 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알겠소. 당신이 운전도 곱게 하고 사근사근하여 좋았는데.”
“죄송합니다. 어르신.”
전화를 끊고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기랄, 일요일 원룸 이사만 하지 않는다면 한탕 뛰어도 되는데. 일요일 일하는 거야 삼방 문화재단에서도 뭐라고 말하지 않겠지.]
이번엔 이영진 상무 댁의 금산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산 아줌마 전화번호는 자기 핸드폰에 입력을 해 놨었다.
“아이고, 이모님!”
“할머님 댁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이모님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님한테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바빠서 못했습니다.”
“거기 인테리어도 다 다시하고 영빈관으로 꾸몄다며? 나도 한번 가봐야지.”
“예. 오십시오.”
“거기 상주할건가?”
“혼자 있으니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여기 지하에 방도 많이 있네요.”
“창업 회장님 살아계실 때는 거기서 운전기사나 가정부들이 지하에서 살림도 했어. 주방시설 다 있지?”
“예, 있더군요.”
“밤에 잘 때 조심해. 가스 같은 것 차면 안 되니까.”
“가스 감지기 같은 것 다 있습니다. 하지만 통풍 잘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삼촌이 가깝게 있어 나도 위안이 되네. 여기는 전등이 나가도 와서 달아줄 사람도 없었는데 잘되었네.”
가만히 보니 이 아줌마가 자기를 자주 불러 부려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 댁의 일이라면 기꺼이 가서 해주고 싶었다.
그곳은 나의 공주님이 사시는 곳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