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37화 (37/199)

37화 잡급직 채용 (2)

(37)

이날 오후

강시혁은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의 센터장을 면담했다.

“저, 센터장님. 제가 여기서 일을 계속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요?”

“네, 다른데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저런! 어르신들이 모두 강시혁 씨를 좋아했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강시혁 씨가 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여기서 정직원으로 일했으면 했는데...... 우리 복지사도 많이 서운하게 생각하겠는데?”

센터장은 복지사가 강시혁을 좋아한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 같았다.

“에효, 송영 업무를 할 기사 모집공고를 또 내야겠군.”

“정말 죄송합니다.”

강시혁은 센터장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자기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복지사에게도 미안했다.

“내일까지는 나올 수 있죠?”

“예, 내일 오전까지는 나올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동료기사인 김 기사에게 업무나 인계해 줘요. 그리고 강시혁 씨 이달치 일한 급여는 나중에 은행계좌로 보내드리죠.”

“감사합니다.“

강시혁은 흰 봉투에 든 사직서를 센터장에게 주었다.

사직서를 주어야 담당직원이 4대 보험 상실 신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마지막으로 송영할 어르신을 자택에 모셔드리고 돌아오다가 문자를 받았다.

복지사가 보낸 문자였다.

[어쩌면 그렇게 말도 없이 그만두세요? 다른데 좋은 일자리가 생겼다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서운해요.]

강시혁은 상계 주공 16단지 상가 앞에 차를 세워놓고 답신을 보내주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렇게 되었네요. 그동안 복지사님이 저에게 잘해 주신 것은 잊지 않을게요.]

다시 출발 기어를 넣고 동일로 쪽으로 빠져나가려는데 또 문자가 왔다.

[잘해 드린 것도 없는데요.]

그런데 뒤에서 오는 택배차가 빨리 가라고 클랙슨을 빵! 하고 울렸다.

그래서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이날 저녁에 강시혁은 대리 일을 나가지 않았다.

저녁에 서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타렉스 차를 보호센터에 반납하고 동네 사진관에서 즉석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피시방에 가서 이력서도 작성하고 온라인으로 대학 졸업장을 발급받았다.

[성적증명서 내라는 소리가 없어 다행이네. 학부 성적이 개판이라 쪽팔렸을 텐데]

다음으로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도 인터넷으로 발급을 받았다.

가족관계증명서에 심은혜와 이혼사실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그런 것은 없어 다행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강시혁은 약속대로 어르신 송영 업무를 해주었다. 오전 근무는 한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들이 소식을 들었는지 손을 잡아주었다.

“강 기사가 다른데 간다며? 강 기사가 싹싹하고 잘했는데!”

“하하. 새로 오시는 분은 더 잘할 겁니다. 건강들 하세요.”

“자주 놀러와.”

“하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시혁은 동료기사에게 스타렉스 키를 주었다.

동료기사가 자동차 긁힌 곳이 있는 가 자동차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강 기사! 새로 간다는 곳이 어디야?”

“아, 조그만 회사입니다.”

“물류담당인가? 그런데는 급여가 세지? 좋은 자리 있으면 우리에게도 소개해줘.”

“하하. 선배님들은 여기 계셔야지요.”

“어르신을 모시는 건 항상 조심이 가. 우리도 나이가 많아 어쩔 수없이 이 일을 하지만 기회 있으면 옮기고 싶어.”

강시혁은 정말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 계신 분들은 봉사정신이 없으면 근무하기 힘든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복지사를 비롯하여 요양사나 간호사, 송영 업무를 하는 기사들의 일이 모두 그랬다.

오후에 강시혁은 집에 가서 말쑥한 옷으로 갈아입다.

그리고 어제 준비한 서류들을 들고 삼방 문화재단으로 갔다.

문화재단 사무국장이 자리에 없었다.

삼방그룹 본사에 일이 있어 들어갔다고 하였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국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서류 가지고 왔습니다.”

“나를 오래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얼마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서류 한번 봅시다.”

사무국장이 서류를 찬찬히 보았다.

“어머나! 대학을 다니셨네. 내 친구 하나가 이 대학교 음대 교수로 있는데!”

“아! 그러십니까?”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시지 왜 나왔어요?”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 후 자영업을 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재취업을 하려고 했는데 나이도 들고..... 그래서 운전을 했습니다.”

국장이 이해하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나하고 같이 동빙고동으로 가요. 마침 인테리어 공사를 했던 업자와 만나기로 했어요. 큐레이터 신종화 씨도 같이 갈 거예요.”

사무국장이 직원들을 불러 인사를 시켰다.

“이 분은 우리 재단에 공무직으로 들어오신 분이에요. 여기서 근무하지 않고 동빙고동 영빈관에서 근무하실 분이에요.”

직원들은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였다.

관리직이나 큐레이터나 학예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자기들과는 분야가 틀리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공무직이면 보일러나 전기시설 같은 것을 관리하는 기술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직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자기가 전에 근무했던 중소기업 아연테크의 직원들보다는 더 세련되고 지적인 모습을 보여 그건 좋았다.

강시혁은 자기 레벨에 맞는 직장을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진을 계속할 수 있는 관리직도 아니고 공무 잡급직이라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사무국장이 눈썹이 짙은 젊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이 재단의 총무와 회계업무를 담당하는 설운동 대리에요. 앞으로 일하시면서 업무연락은 설 대리하고 하면 되요.”

강시혁이 보니 설 대리는 자기 또래나 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내가 부탁해야죠.”

직원들과 인사를 마치자 이번엔 국장이 관장님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3층에 있는 관장실로 갔다.

관장도 여자였다. 50대 후반으로 보였다. 문화재단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사무국장이 관장에게 말했다.

“이번에 동빙고동 영빈관 공무를 맡을 사람입니다.”

“공무가 아니라 영선(營繕)이겠지. 영선업무 해봤어요?”

강시혁은 영선이란 용어를 잘 몰랐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적당히 알아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서 사무국장이 보여주는 강시혁의 이력서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교만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같이 보였다.

관장실을 나오면서 사무국장이 말했다.

“관장님은 XX대학 미대 학장을 하다가 오신 분이에요.”

강시혁은 속으로 그래서 이 여자가 그렇게 교만스러운 것 같이 보이는구나 하였다.

까탈스런 이 여자들 밑에서 근무할 생각을 하니 앞으로 근무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큐레이터도 여자, 사무국장도 여자, 갤러리 관장도 여자, 그 위에 부이사장인 이영진 상무도 여자,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이사장이 회장님 사모님이니까 그분도 여자. 내가 완전히 여인국인 아마조네스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네!]

사무국장이 말했다.

“그럼 오늘은 들어가시고 내일 아침 9시까지 출근하세요.”

“여기는 출퇴근이 몇 시에 시작하고 몇 시에 끝납니까?”

“오전9시 출근하고 오후 6시에 끝납니다. 삼방그룹 계열사는 업무량이 많아 오후 7시, 8시까지 근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테지. 그놈들은 월급 많이 받는 놈들이니까 빡세게 일하겠지. 문화재단하고는 분위기부터 틀리겠지.]

사무국장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강시혁이 시계를 보니 아직 퇴근시간은 한시간정도 남아있었다.

강시혁은 남자 대리인 설 대리라는 사람하고 저녁식사라도 할까 하였다. 하지만 첫날부터 저녁 먹으러 가자면 오히려 설 대리라는 사람이 자기를 경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두고 아래층 전시실로 갔다.

전시실에는 관람객들이 몇 명이 있었다.

그래서 강시혁도 그림을 구경했다.

그런데 그림이 서양화 비구상이라 무슨 그림인지 몰랐다.

[이게 그림이야? 낙서야? 통 모르겠네. 저기 그림을 구경하는 남자는 그림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네. 뭘 알고 저러는 걸까? 괜히 문화인인척, 고상한척 하느라고 이구아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아닐까?]

강시혁도 뒷짐을 쥐고 천천히 그림을 구경했다.

삼방 문화재단의 직원들이 이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건물 지킴이로 들어온 잡급직이 뒷짐을 쥐고 서양화 비구상을 구경하네? 꼴값 떠네.]

강시혁이 집으로 왔다.

저녁에 대리 일을 안 나가고 집에 일찍 들어오니 그것도 이상했다.

갑자기 생활패턴이 바뀌니 그런 것 같았다.

마침 후배 변상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전화해도 돼? 아직 대리 운전 중 아니지?“

“나, 대리 그만두었어.”

“뭐라고? 그럼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 아주 정규직으로 들어간 거야?”

“아니, 삼방 문화재단에 들어가기로 했어.”

“뭐, 뭐라고? 삼방 문화재단? 삼방그룹 산하의 문화재단인가?”

“맞아.”

“그으래?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데?”

“영빈관 관리담당이야.”

“여, 영빈관? 문화재단에 영빈관이 다 있나?”

“자세한 거 알고 싶으면 이리 와라. 내가 삼겹살 사줄게.”

“알았어. 내가 당장 수유역으로 나갈게. 한 시간 후에 만나.”

한 시간 후에 강시혁과 변상철은 수유역 7번 입구에서 만났다.

“형?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일하게 된 거지.”

“그럼 거기 시험 봐서 들어간 거야?”

“가자!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둘이 먹자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원두막이라고 간판이 있는 삼겹살집 있다. 들어가자.”

“형, 오늘은 이상하게 삼겹살보다는 족발이 땅기는데? 족발 먹지. 돈 없으면 내가 보탤게.”

“아냐. 내가 낼게. 내가 비록 귀신이 나를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여 신불자가 되었지만 너 족발하나 못 사주겠냐. 가자.”

강시혁은 소주를 마시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변상철이 감탄한 투로 말했다.

“햐, 그런 만화 같은 일이 다 있군.”

“그래서 내일부터 그 큰 재벌의 저택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거야.”

“혼자 근무한다니 누가 갈구는 놈은 없어서 좋겠군. 그런데 혼자 심심하겠는데?“

“혼자 있으면서 자기개발에 힘써야지. 그동안 먹고사느라 독서를 못했는데 읽고 싶은 책도 보고 특히 영어공부도하고 자격증도 하나 따놓으려고 그래.”

“다 좋은데 연봉이 너무 작은 게 흠이네. 삼방 공채직원들 대졸 신입사원이 5,200만원이라고 구직 정보사이트인 사람인에 나왔던데.”

“뭐, 내가 시험 봐서 들어간 게 아니니까 그건 감수해야지. 무엇보다도 오너 가족을 자주 볼 테니 그거 하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어?”

“하긴..... 오너 가족 앞에서 알짱거리면 무슨 기회가 생길수도 있겠지.”

“이번에 돌아가신 창업회장 부인이었던 할머님 댁 가정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삼방화학 화성공장의 구내식당을 통째로 도급 맡았어. 자그마치 종업원이 600명이 있는 공장이야.”

“흠. 그런 것 하나 맡으면 회사 임원보다 낫겠지. 그 가정부는 이제 돈방석에 앉았겠는데. 회사 구내식당이니 임대료나 전기세 같은 것도 낼 필요가 없을 것 아닌가?“

“그렇겠지.“

“형! 앞으로 거기 근무하면서 좋은 자리 있으면 나도 하나 알려줘. 내가 이태원에 가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살게.“

“너는 침대공장 사장 해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