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삼방그룹 문화재단 (3)
(35)
문화재단의 신종화 라는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님!”
역시 여자는 예쁘다면 다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강시혁은 자기도 어르신 주간 보호센터에 가면 복지사에게 예쁘다고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누가 예쁘다고 말하면 성희롱 하는 거냐고 하면서 성을 벌컥 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강시혁은 이 신종화라는 여자가 괘씸했다.
이럴 경우 자기가 남자니까 자기 눈치를 슬쩍 보는 게 일반적인 여자들의 태도이겠지만 이 여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흠. 이 여자는 지금 나를 남자로 인정하지 않는군. 그냥 지나가는 하찮은 대리 기사 정도로 아는군. 할 수 없지. 이 여자는 삼방 문화재단의 정규직원이고 나는 알바니까!]
금산 아줌마가 갑자기 강시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삼촌! 이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아요?”
“예? 삼방 문화재단에 계신 분 아닙니까?”
“이 아가씨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미술 박사야. 그리고 지금 대학교 교수야. 미술품에 대하여 모르는 게 없어!”
신종화가 얄밉게 굴비 살만 발라먹다가 호호 웃으며 말했다.
“호호. 이모님! 저는 교수는 아니고 지금 출강만 하고 있습니다.”
강시혁이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학교에 계시냐고 물을 뻔했다.
만약에 물었으면 이 여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으리라.
[감히 대리기사 주제에 뭘 물어? 삼방 문화재단의 정규직원의 신상은 왜 물어?]
강시혁은 고개 숙이고 밥만 먹었다. 고개 숙인 남자였다.
밥을 다 먹고 커피까지 마셨다.
신종화가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강시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사님! 사장님 사모님이 물건 싣고 지금 오라는데요? 큰 차 가지고 오셨죠?”
“예, 스타렉스 가져왔습니다.”
“그럼 청색 테이프가 붙은 물건은 전부 차에 실어요. 고가의 물건들이니까 조심해서 실어요.”
“예,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년이 꼭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말하듯이 하네.]
옮기는 물건들은 청자와 소나무 분재와 고미술 몇 점이었다.
강시혁이 물건을 나르는 동안 신종화는 물건 숫자만 세고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강시혁이 혼자 땀을 흘리며 뺑이 쳤다.
“다 실었어요?”
“예, 스티커 붙은 건 다 실었습니다.”
신종화가 물건과 품목 리스트를 대조해 보았다.
“그럼 회장님 댁으로 출발하시죠. 제가 앞에 타겠습니다.”
신종화가 길 안내 때문에 운전석 옆자리에 탔다.
옆자리에 여자가 타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미녀가 탔으니 말이다.
주방 식탁에서 나지 않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아저씨! 뭐하세요? 빨리 가세요!”
아저씨라고 부르니 조금 기분이 나빴다.
차라리 그냥 기사님이라고 부르면 좋았겠는데 아저씨라고 부르니 정말 출장 기사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삼방그룹 이건용 회장댁은 이영진 상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인적이 완전히 없는 언덕에 있는 대 저택이었다.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는 잘 다듬어져 있었다.
옆자리에 탄 신종화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아저씨는 잠깐 기다리세요.”
신종화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나오면서 말했다.
“짐 옮겨주세요!”
강시혁이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청자인지, 이조시대 청자인지는 모르지만 청자 항아리부터 옮겼다.
물건은 차에서 내려 현관 앞까지 옮겼다. 여기서도 신종화는 옮기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강시혁이 군방도(群芳圖)가 그려진 큰 액자를 들고 들어가자 웬 부인이 거실로 나왔다.
흰머리 새치가 난 50대 후반의 여자였다. 무릎이 아픈지 무릎을 계속 주무르고 있었다. 회장 사모님인 것 같았다,
강시혁이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사모님이 신종화를 쳐다보며 먼저 물었다.
“이 청년은 누구인가?”
“아, 예. 짐 옮기는 것 때문에 금산 아줌마가 부른 분입니다.”
“그래? 난 또 문화재단에 새로 들어온 직원인줄 알았네.“
“새로 들어온 직원은 아닙니다. 이사장님.“
강시혁은 문화재단 직원이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사모님이 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런데 보행에 문제가 있는 분 같이 보였다.
사모님이 강시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혼자 애쓰네. 이거 음료수 하나 들고 일해요.“
그러면서 사모님이 캔 음료 하나를 강시혁에게 주었다.
강시혁이 두 손으로 캔 음료를 받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사모님!“
사모님은 대체로 인자해 보였다.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옷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이영진 상무가 이 사모님을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였다.
분재 화분까지 다 나르고 나니 강시혁은 힘이 쪽 빠졌다.
문화재단 신종화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정중히 사모님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짐은 다 옮겼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려, 그려. 가봐. 그럼.”
사모님은 강시혁에게도 한마디 했다.
“젊은이가 고생 많이 했군.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정리를 못해드리고 가서 죄송합니다.”
“정리는 내가 쉬어가며 하면 돼요. 어서 가 봐요.”
그러면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강시혁은 문화재단 직원을 태우고 다시 동빙고동 할머니 집으로 왔다.
이번에는 붉은색 스티커가 달린 짐을 실었다. 이 짐들은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갈 물건들이었다. 다행히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갈 물건들은 많지 않았다.
문화재단 신종화가 말했다.
“이모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무님 댁은 두 분이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그래요. 상무님 댁은 우리 둘이 가면 되니까 신종화씨는 이만 들어가 봐요. 오늘 수고 많이 했어요.”
“이모님도 수고 많이 했어요. 기사님도 수고했고요.”
이제는 또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기사님이라고 불렀다.
신종화가 자기 차가 있는 차고 쪽으로 가려다가 강시혁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참, 기사님 시급은 우리 문화재단에서 보내주기로 했죠? 혹시 계좌번호 아세요?”
“계좌번호는 집에 가야 알 수 있는데요?”
“그럼 나중에 제 전화로 문자 보내주세요.”
그러면서 신종화가 자기의 명함을 강시혁에게 주었다.
강시혁이 명함을 쳐다보았다.
[삼방 문화재단/ 삼방 갤러리. 큐레이터 신종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 이 여자가 미술관 큐레이터였구나!]
신종화가 차고에서 차를 끌고 나왔다. 기아K7 이었다.
신종화는 금산 아줌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강시혁이 금산 아줌마와 함께 이영진 상무 집으로 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영진 상무나 남편 홍사장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강시혁이 차에서 짐을 내려 이영진 상무 집 거실까지 옮겨주었다.
처음으로 이 집에 들어와 본 것이다. 동빙고동의 할머니 저택처럼 넓었고 정원수가 잘 다듬어진 집이었다.
동빙고동의 할머님 댁이나 회장님 댁은 오래된 것 같았으나 이 집은 신축건물인 것 같았다.
다음날 월요일 강시혁은 신종화 큐레이터에게 계좌번호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돈은 내일 보내주겠다는 답신이 왔다.
화요일 오후에 돈이 들어왔다. 역시 만족할만한 돈이 들어왔다.
생각 같아서는 후배 변상철이나 불러내어 삼겹살이나 먹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평일 날은 투잡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또, 다음 주 일요일은 밀린 빨래도 해야 했고 곰팡이 제거제를 사와 벽에 바르는 일도 해야 했다.
집에 습기가 차 곰팡이가 슬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강시혁은 일상으로 돌아와 낮에는 열심히 어르신 송영 업무를 수행했고 밤에는 대리를 뛰었다.
대리를 뛰고 집에 돌아와 토막잠을 잘 때는 언제나 궁궐 같은 이태원이나 동빙고동의 대 저택을 생각했다.
곰팡이 냄새나는 낡고 비좁은 이 원룸은 지옥이 연상되었고 동빙고동과 이태원의 저택은 마치 궁궐 같았다.
이영진 상무는 궁궐 속에 사는 아리따운 공주님이었다.
동빙고동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두 달이 되었다.
삼방그룹 회장이 이영진 상무를 불렀다.
“동빙고동 할머니 집 인테리어공사는 잘 되어가지?”
“예,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삼방 문화재단의 이사장은 너희 엄마인데 건강 때문에 그곳엘 자주 못가니 너라도 자주 가봐라. 너는 삼방 문화재단의 부이사장이 아니냐? 갤러리 관장이나 사무국장에게만 일을 맡기지 마라.”
“알겠습니다.”
“동빙고동 영빈관은 앞으로 삼방그룹의 얼굴이 될 것이다. 내가 외국의 VIP나 정부의 고관을 만날 때는 그곳을 많이 이용할 것이다. 호텔보다는 그곳으로 모셔 담소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할 것이다.”
“아빠, 공사 끝나면 영빈관을 관리할 직원을 비서실에서 배치해야겠네요.”
“건물 관리도하고 미술품 관리도 한다면 한사람 정도는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지.”
“비서실장에게 사람 보내라고 제가 이야기 할까요?”
“비서실 직원들은 공채 정규직원들인데 그런 일을 하게 할 수 있나? 그런 일은 문화재단의 공무직 한사람을 보내면 되겠지.”
“문화재단에 있는 사람들은 공무 쪽 일은 잘 모르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건물관리도 하고 운전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채용해야겠네요.”
“없다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아빠. 그때 그 사람을 오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때 그 사람이라니?”
“장례식 때 호루라기를 불던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은 건물관리보다는 차량관리가 전문일 것 같은데.”
“제가 개인적으로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홍 서방 일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어디 가야할 때가 있으면 벤츠차 김 기사는 좀 부담스러워요.”
“부담스럽다니?”
“김 기사는 회사의 과장 대우를 받는 사람이잖아요. 잘못하면 회사에 제 사생활이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처럼 약물에 취한 영남이를 데리러 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영빈관이 날마다 문을 여는 것도 아니잖아요. 필요할 때 잠깐 그 사람을 제가 쓰고 또 엄마가 계신 집이나 제집에 가끔 남자가 필요한 일을 시킬 때 불러 쓰면 되겠지요.”
“뭐, 신원조회도 한 사람이니까 써도 좋겠지.”
“계열사 소속으로 하면 급여를 공채직원에 맞춰야하지만 문화재단 잡급직으로 채용한다면 크게 인건비 부담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해라. 그런데 아예 널 보호하게 보안업체 요원을 부르면 어떻겠냐?”
“보안업체 요원은 싫어요. 지난번에도 제 경호원으로 보안업체 요원을 불렀지만 불미스러운 일만 있었잖아요.”
“파견 나온 놈이 직원을 폭행하고 삼방그룹에 자기가 아는 사람을 취업시켜주겠다고 여러 사람에게 돈을 받았다고 했지?”
“예, 그런 사실이 있어서 아빠가 해고시켰었죠.”
“그 자식은 허우대는 멀쩡한 놈이 그런 일을 저질렀어. 태권도 5단에 체격도 좋고 인물도 좋은 놈이었었는데.”
“저는 마초 같은 사람은 싫어요. 벤츠 차를 운전하는 김 기사가 저를 잘 보호하고 있으니 경호원은 필요 없어요.”
“인테리어 공사는 언제 끝나지?“
“이달 말이면 끝날 거예요.”
“알았다. 완공되는 날 나도 한번 가 보겠다. 그리고 건물 관리하는 지킴이는 문화재단 소속 잡급직으로 해서 장례식 때 왔던 놈을 채용해라. 건물 관리하고 미술품 수송이라도 하려면 그런 놈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감사해요. 아빠!”
“너하고 나하고 둘이 있을 때는 아빠라고 해도 되지만 공식석상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예, 알겠어요. 실수하지 않고 회장님이라고 부를게요.”
“녀석......”
회장은 그러면서 이영진 상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 그룹 회장이라도 이럴 때는 꼭 딸 바보 같이 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