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재벌가 장례식장 (2)
(27)
강시혁은 아줌마와 함께 용산역에 있는 이마트로 갔다.
지하에 있는 이마트는 제법 넓었다.
여기서 아줌마는 채소와 과일, 음료수, 일회용 접시, 종이컵 같은 것을 샀다.
강시혁이 카트를 끌고 다니며 아줌마가 사는 물건을 주워 담았다.
가만히 보니 이런 큰일을 당하면 아줌마 혼자는 일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방그룹의 이건용 회장이나 자녀들은 궂은일은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남에게 일을 시키기만 했을 것이다. 이들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 아줌마들이 모든 일을 해야 하는데 남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회사직원에게 지원요청을 해도 되지만 아줌마는 만만한 강시혁이 편했다.
“삼촌! 저 맥주 박스도 카드에 싣고, 콜라 박스도 실어요.”
카트도 한 대가지고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두 대나 사용했다.
심지어는 향초나 향 같은 것을 사기도 했다. 과일도 샀다. 밤이나 대추 같은 것도 샀다.
밤은 까 논 밤은 맛이 없다고 껍질이 있는 밤을 샀다.
“삼촌, 오늘은 첫날이니까 문상객이 별로 없을 거야. 그래서 오늘 준비를 다 해야 되요. 오늘은 상가집에 회사 직원들 밖에 없잖아.”
“그런 것 같더군요.”
“할머님 댁에 있는 가정부도 내가 추천한 사람인데 뭘 통 몰라 걱정이야. 문상객들에게 밥은 해먹이지 못해도 차는 대접해 줘야 하거든. 그래서 대추차도 준비해야하고 그러는데 그런 게 안 되어 있네.”
“그래서 대추를 많이 사셨군요.”
“갈아서 잣을 띄우고 대접하면 손님들이 좋아하지. 재벌가에서 종이팩에 든 녹차나 대접해서 쓰겠어?”
“역시 회장님 댁 상사에는 이모님 같은 분이 계셔야 합니다.”
“호호, 고마워. 그런데 삼촌. 내가 삼촌한테 반말해도 되지?”
“아이고, 어머님 같은 분인데 당연히 반말하셔야지요. 더구나 우리는 고향도 이웃 아닙니까?”
“그런데 내일은 비가 좀 내릴 거라고 하네.”
“그래요?”
“출상하는 날은 비가 오지 말아야할 텐데.”
“출상은 모레 아침인가요?”
“맞아. 모레야. 할머님이니까 3일장을 치루지만 전에 창업 회장님 돌아가셨을 때는 5일장을 치르느라 내가 죽다 살았어.”
“5일장요?”
“창업 회장님이 돌아가시니까 재계나 관계 인사들이 다 오고 해외에서도 문상객들이 오니까 5일장이었지. 역시 귀족들은 우리하고 달라.”
“번거롭네요.”
“우리 같은 서민들이 볼 때 좋은 건 아니야. 사체는 빨리 치워야 하는데 5일장을 하니까 출상하는 날 관에서 냄새도 나더라고.”
“그, 그런가요?”
“광장시장도 한번 들렸으면 좋겠는데. 전 부침 같은 것은 거기 가야 좋아.”
“그럼 거기 들렸다 갈까요?”
“호호, 그럼 좋지. 그리고 삼촌도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내가 사줄게. 회사 법인카드 가지고 왔거든.”
“오, 그래요?”
“그룹의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나에게 법인카드를 주면서 상 치르는데 식자재 구입비로 쓰라고 하더군.”
“그랬군요.”
“돈 아끼지 말고 마음대로 쓰라고 했어.”
강시혁은 속으로 픽 웃었다.
[한 해에 수십조 원을 벌어들이는 삼방그룹 입장에서 장례식 경비 정도는 껌 값이겠지.]
강시혁은 용산역 이마트를 나왔다.
K3 렌트카 트렁크와 뒷좌석에는 물건들로 꽉 찼다.
종로5가 광장시장을 가면서 강시혁이 물었다.
“그런데 이모님! 제가 왜 갑자기 삼촌이 되었어요?”
“삼촌이 부르기 좋잖아? 회사 직원들도 많이 나와 있는데 강 기사라고 부르면 되겠어? 내가 다른 일도 부탁하는데 강 기사라고 부르면 안 되지. 회사 직원들이 기사를 다른 일에 막 부려먹는다고 흉볼 것 아닌가?”
“하하, 말이 되네요. 저도 삼촌 소리가 듣기 편합니다.”
“삼촌!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고! 같은 충청도 사람끼리!”
“아이고, 이모님! 제가 부탁할 소리입니다. 이번 장례가 끝나더라도 자주 불러주세요.”
“그런 일이 있을 거야. 아무래도 재벌가는 집도 커서 일도 많아. 우리는 그런 집 공짜로 줘도 못살지만.“
강시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도 이태원 이영진 상무 댁을 드나들다보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더라도 부잣집 근처에서 기웃거리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종로5가 광장시장에 가서 전 같은 것도 많이 샀다.
떡은 아줌마가 낙원상가 떡집에 주문해서 번개 택배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강시혁과 아줌마가 한 바퀴 돌고 오니 상갓집 앞에 차들이 더 많이 모여 있었다.
강시혁이 비상 라이트를 켜고 들어갔다.
직원들이 또 제지를 하였다.
아줌마가 창문을 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안집 차요! 시장보고 오는 길이예욧!”
직원들이 다른 외제차를 제지하고 털털거리는 소형차 K3를 우선 통과시켰다.
역시 재벌가는 식모차도 위세가 대단했다.
아줌마와 같이 일하는 다른 가정부 아줌마들도 강시혁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삼촌! 이것 좀 들어줘요.”
“삼촌! 저 선반 위에 있는 소쿠리 좀 꺼내줘요.”
“삼촌! 이 뚜껑이 잘 안 열리네요.”
아줌마들 입장에서 삼방그룹에서 지원 나온 직원들은 어려웠다. 하지만 강시혁은 만만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삼촌을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강시혁은 주방 근처에서만 알짱거렸다.
삼방그룹의 젊은 직원들은 주로 밖에서 일했다.
주차 정리나 손님 안내 같은 일과 신발 정리 같은 일들을 했다.
거실엔 회사 임원급들이 앉아 있었고 각 방에는 계열사 사장들과 문상객들이 들어와 앉아있었다. 안방에는 오너 가족들이 있었다.
강시혁은 주방 옆 식탁에서 밤 까는 일을 했다.
다른 직원들처럼 밖에 있지 않고 주방 옆 식탁에 앉아 일을 하니 대우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이영진 상무가 주방에 볼일을 보러왔다가 강시혁을 보았다.
강시혁이 후다닥 일어나서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였다. 농노가 성주님의 딸을 보듯 하였다.
“어머, 수고하시네요.”
그런데 이영진 상무가 눈을 크게 뜨고 강시혁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정장에 검정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리 기사가 아니고 완전히 회사의 직원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방으로 가버렸다.
[역시 예쁘네. 검정색 상복을 입고 있으니 또 다른 매력이 있네.]
이영진 상무는 검정 상복을 입어서 그런지 창백한 흰 피부가 더 드러났다.
완전히 옥빛 그 자체였다.
밤 1시가 넘었다.
문상객들은 하나둘 모두 가버렸다.
회사의 임원들은 거실에 아무렇게 앉아 졸기 시작했고 밖에 있는 직원들은 마당에 천막을 치고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졸았다. 일부는 스마트 폰을 보았다.
직원들은 자기들 회사의 사장과 임원들이 망자의 혼령을 지킨다고 가지 않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기들도 함께 밤을 새우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가 강시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삼촌. 밤은 많이 까야 해요. 회장님이 생밤을 좋아하셔.“
“알겠습니다. 열심히 까겠습니다.”
강시혁은 속으로 까는 데는 내가 선수지 하였다.
“삼촌. 그리고 내일 아침에 용산역에 있는 이마트에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네.”
“그러지요. 뭐 살 것이 있습니까?”
“위생백하고 호일하고 식용유 좀 더 사와요.”
“이모님은 같이 안갑니까?”
“나는 일해야 하니까 삼촌 혼자 다녀와요.”
“그런데 화투 몇 벌 사오면 안 될까요? 틀림없이 방에 계신 사장님들이 화투를 찾을지 모르니까요.”
“화투? 좋지. 화투하고 트럼프 몇 벌 사와요. 지난번 창업 회장님 돌아가셨을 때 사장님들이 무료하니까 화투 많이 치더군.”
“그리고 혹시 모르니 우산도 하나 사올게요. 내일 비 온다는데 손님 접대용으로 필요할지 모르니까요.”
“그래요. 역시 삼촌이 나보다 생각하는 게 낫네.”
강시혁은 밤을 다 까고 나서 자기가 끌고 온 K3 차로 갔다.
그리고 운전석 의자를 눕혀놓고 토끼잠을 잤다.
새벽에 잠시 잠이 깨었다.
마당의 천막 안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잠이 들지 않은 직원들이 서로 소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을 내리니 말소리가 잘 들렸다.
낮이면 소음 때문에 안 들릴 텐데 밤이라 잘 들렸다.
“건설 사장님하고 철강 사장님은 지금 회장님계신 방에 계시지?”
“그럴 거야. 화학 사장님은 해외 출장 중이라 내일 오신다는 이야기가 있어.”
“너 이영진 상무 얼굴 봤니?”
“못 봤어. 홍 사장 얼굴만 봤어. 몇 번 낮에 담배 피우러 마당에 나왔었잖아.”
“홍 사장 보니까 이영진 상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데?”
“왜? 그래도 이 나라 최대 보수 언론의 장남인데.”
“우리도 용인 장지까지 가야 하나?”
“모르겠어. 총무이사님이 무슨 지시를 해주겠지.”
“야, 우리 그냥 여기서 어영부영하다가 용인 장지까지 따라가자. 그래도 우리 월급 나오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강시혁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월급쟁이 새끼들은 생각이 저래.]
강시혁이 창문을 열고 저택의 2층을 쳐다보았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에 그 유명한 삼방그룹 이건용 회장이 있겠지.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