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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17화 (17/199)

17화 미아리 점집 (1)

(17)

어르신 보호센터 일이 끝나고 강시혁은 바로 강남으로 넘어갔다.

저녁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편의점에서 우유와 삼각 김밥으로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 대리 일에 들어갔다.

이날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손님도 많이 나오지 않는다. 잡콜 몇 개가 있어서 몇 번 뛰었다. 2만 원 짜리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논현동에서 정릉까지 가는 손님을 잡았다.

차가 좀 오래된 소나타였는데 핸들쏠림이 심했다. 휠 밸런스에 문제가 있는 듯이 보였다.

술 취한 손님을 모셔다 드리고 성신여대역 앞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대학로에 가서 콜을 잡을까 하다가 배도 고프고 이상하게 기운도 없어 그냥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더구나 성신여대 역에서 집까지 바로 가는 4호선 열차가 있으니까 더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집이 있는 수유역까지 왔다.

마침 순대국 집에 문이 열려있어 포장으로 2인분을 샀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은 따듯한 순대국이 최고지.]

강시혁은 수유동 원룸에 들어와 순대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소주도 한잔 곁들였다.

식사를 하면서 노트북을 켜고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들어갔다. 그리고 장명건설의 재무구조를 보았다.

역시 매출액이 해마다 감소하고 자본잠식에 경상이익 마이너스의 회사였다.

그나마 최근에 단일판매 공급 계약체결 공시가 하나 떴는데 삼방그룹의 계열사 지하주차장 건설공사였다.

아마 삼방그룹에서 일감 하나를 밀어준 것 같았다.

[제기랄! 경상이익 마이너스 회사가 장기 노사분규까지 있으니 이제는 경상이익이 아니라 영업이익도 마이너스 나겠네.]

그런데 이놈의 회사가 삼방에 완전히 넘어가거나 아니면 출자지원만 조금 받아도 당장에 주가가 요동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 이 회사의 노사분규는 어떻게 되는 거야? 타워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농성한다는 조합원이 있다는데 안전에 괜찮을까?]

A일보 오너의 사위인 장명건설 사장 김장명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장은 뜨듯한 방에서 지금쯤 양주나 마시고 있을지 몰라. 회사야 팔고 좀 쉬었다가 또 하나 만들면 되겠지. 매도대금 주머니에 쏟아져 들어올 테니까!]

그러다가 강시혁은 탁자를 쾅하고 쳤다.

“역시 돈은 장명건설 사장처럼 벌어야 돼. 자본금 100억인 회사를 200억 받고 판다면 잘한 것 아닌가? 그동안 월급 타먹고 법인카드 쓰고 온갖 누릴 것은 다 누리고 200억이 들어오니 돈 번거지. 역시 대리 운전해서는 늙어 뒈질 때까지 쇼부가 안나.”

그런데 오늘까지도 이 회사가 팔린다는 인터넷 기사는 없다.

[매매협상은 나가리 된 것이 틀림없어. 아니야. 양해각서 체결하고 발표만 늦추는 것 아닐까? 노조 놈들이 지금 지랄하고 있으니까 조용해진 다음에 전격 발표하는 것 아닐까?]

강시혁은 혼자 이 생각 저 생각해 보았지만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소주나 입에 털어 넣었다.

불쌍한 중생은 소주나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낮에 주간보호센터의 수송 일을 하고 잠깐 쉴 때였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이 생각났다.

“지금쫌 퇴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보고 오라는 소리가 없네?”

강시혁은 박 변호사에게 전화로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사람들이 자기를 꼭 이용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리회사에 다른 사람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가 그 집 가는 길을 잘 알기 때문에 편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불러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좀 서운한 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박 변호사 같은 사람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어야 더 중요한 고급 정보도 알 텐데 그게 없어지니 말이다. 또 삼방그룹의 이영진 상무를 다시 한 번 모시고 싶은데 그럴 기회는 영영 없을 테니 말이다.

삶의 의욕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강시혁은 노인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수술이 끝나고 회복중이라 전화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전화가 한참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혹시 주무시고 계신건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 대리기사 강시혁입니다.”

“누, 누구라고?”

“대리기사입니다. 강남 성모병원까지 어르신을 모셨던 대리기사입니다.”

“아아, 기억나요. 그런데 웬일이요?”

웬일이라니! 이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퇴원하는 날짜를 알려주시면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난, 퇴원했소.”

“예? 퇴원했어요?”

“며느리가 그랜저를 이용해 나를 백석읍까지 데려왔소.”

“아, 그러셨군요. 저는 아직 병원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어제 아들이 와서 며느리도 데려갔소.”

“목소리 들으니 건강해보이십니다. 퇴원 축하드립니다.”

“기사님도 고생 많았소.”

“그럼 건강하십시오. 어르신.”

“고맙소.“

전화를 끊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이것으로 끝인가 하였다.

아무래도 끝인 것 같았다. 자기와 상류사회가 다시는 엮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영진 상무는 다시 한 번 모시고 싶었다.

자기보다 나이어린 사람을 모신다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그 정도의 여신급 인물이라면 종이나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이 되었다.

이 날은 후배와 함께 미아리로 점 보러 가는 날이었다.

미아리 점집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몇 번 보기는 하였었다. 저런 곳은 도대체 누가 가나 하였던 적이 있었다.

점집 간판을 단 집이 늘어서 있는데 과연 손님은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후배와 함께 거길 가는 것이다.

후배도 계속 백수노릇만 하니 자기의 장래가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강시혁은 오전 11시쯤 성신여대입구 역 7번 홈으로 갔다.

여기서 후배 변상철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변상철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나왔네.”

“내 운명을 보러가는 날이니 일찍 나와야지.”

“그 사람들이 뭘 알겠어?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둘은 미아리 고개를 올라갔다.

계속 늘어선 점집들이 나왔다. 간판이름도 무속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은하수 점집, 천도화 점집, 학사 역술원, 모란 점집, 많기도 하네.”

후배가 선화원 점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집 앞에 섰다. 허술한 집이었다.

이런 데는 월세도 몇 푼 안 될 것 같았다.

“형이 먼저 들어가.“

후배도 이런 데는 처음 와보기 때문에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쑥스러운 것은 강시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러다가 강시혁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사무실도 아니고 옛날식 가정집이었다.

“여보세요? 뭐 좀 보러왔는데요.”

“올라오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한복을 입은 60대 여자가 앉아있었다. 놀랍게도 장님이었다.

기분이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역 근방에 있는 타로 점 치는 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앞에 앉으세요.”

강시혁과 변상철이 얌전히 앉았다.

“뭘 물어보러 오셨나요?”

변상철이 먼저 말했다.

“저.... 제가 공무원 시험을 보려는데 합격 운이 있나 봐주세요.”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

변상철이 생년월일을 불러주자 여자가 흰 종이 위에 송곳 같은 것으로 쿡쿡 찍기 시작했다.

[아! 저것이 점자구나!]

여자는 점자 글씨를 쓰는 것 같았다.

점자 글씨 쓰는 걸 마치자 여자가 요구루트 병 같은 것을 꺼내 흔들었다.

사기로 된 작은 병인데 속에 모래가 있는지, 아니면 쌀이 들었는지 흔들 때마다 소리가 났다. 그런데 그냥 흔드는 것이 아니라 갑자, 을축 같은 간지를 읊어대며 병을 흔들었다.

변상철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는데 한쪽 눈은 흰자위만 보였다.

여자는 작은 병을 아주 진지하게 흔들었다.

한참 흔들고 나서 병을 상위에 탁 던지며 말했다.

“대주께서는 관운이 없네요.”

변상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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