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재벌의 딸 (1)
(13)
강시혁은 오늘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를 본 듯하였다.
말로만 들었던 삼방그룹 재벌의 딸을 여기서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제너시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있자니 잠은 안 오고 눈에 이영진 상무의 모습만 떠올랐다.
[재벌 딸이라 그런지 정말 다르네.]
누가 강시혁에게 네까짓 흙수저놈이 그런 고귀한 금수저 중의 금수저에게 사특한 마음을 품느냐? 라고 한다면 할 말은 있다.
[나도 젊은 30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강시혁은 공연히 신문재벌 장남에게 질투를 느꼈다.
신문재벌 장남에다가 삼방그룹 사위인데 질투를 느끼다니 가당찮은 이야기다. 하찮은 대리 기사 따위가 질투를 느꼈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놈이 미웠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다른 사람에게 홀라당 결혼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부 극성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가 결혼하면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강시혁은 이영진 상무의 남편이 꼭 자화전자의 박문도 과장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심은혜와 붙어버린 그놈 말이다.
본채 건물 현관문이 열리고 웬 아줌마가 나와서 소리쳤다.
“점심 식사들 하세요!”
기사들이 일어나 우르르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는 회의를 하던 사람들이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멀리 이영진 상무가 밥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망할 자식 신문사 장남이었다. 괜히 주는 것 없이 미웠다.
회의를 했던 사람들은 맥주도 한잔씩 하는 것 같았다.
한쪽에 마련된 기사들이 먹는 테이블엔 맥주가 없었다. 운전을 해야 될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 그렇게 안배를 한 것 같았다.
식사는 산채나물과 더덕구이 등 별미라 기사들은 밥을 많이 먹었다.
밥 많이 먹으면 운전할 때 졸리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도 잘도 먹었다. 트림까지 하면서 먹었다.
역시 재벌회사 운전기사들은 오야지 따라다니며 먹는 건 잘 얻어먹고 다니겠다 싶었다.
그래서 모두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기사들은 종이컵에 든 커피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파라솔 아래 모여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강시혁은 회사차 기사가 아니지만 자기도 기사는 기사인지라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커피는 마시지만 의외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대기업의 CEO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울 리는 만무하였다.
하지만 대리 기사 중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고 나올 때 기분 좋게 한 대 피운다.
또 돌아올 때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한 대 빤다. 담배 피우지 말라고 누가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다.
커피를 마시면서 회사의 과장급 기사라는 50대가 벤츠 마이바흐를 몰고 온 기사에게 말했다. 바로 이영진 상무와 신문재벌 장남을 태우고 온 기사였다.
“어이, 오늘 회의 끝나면 두 분 모시고 바로 서울 이태원 자택으로 올라갈 건가?”
“모르겠어. 상무님 낭군이신 홍 사장님이 여기 남아서 친구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실지.”
강시혁은 정보를 하나 알았다. 자기에게는 쓸데없는 정보지만 이영진 상무가 이태원에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태원은 큰길에서 남산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궁궐 같은 단독주택들이 있는 곳이 있다.
삼성그룹 회장도 여기에 산다.
언젠가 손님 한사람이 이태원에서 술을 마시고 일본인과 함께 하야트 호텔까지 가자고 하였었다. 가까운 거리이지만 술에 취해 대리를 불렀던 것이다.
그때 가다보니 대궐 같은 단독주택이 즐비한 것을 보았다.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였다.
그리고 자기에겐 저런 집은 공짜로 줘도 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큰집들은 집에 가정부나 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영진 상무가 고급 아파트에 살지 않고 그런 단독주택에 사는 걸 보니 이웃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파트에 살면 싫던 좋던 이웃과 함께 엘리베이터도 타고 또 가끔 관리사무소의 시끄러운 방송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영진 상무는 그런 곳에 사나보다 하였다.
신문사 사장이 홍 사장이라는 것도 알았다.
신문사 사장인지, 아니면 삼방그룹 계열사를 하나 맡아 사장을 하는지는 몰라도 사장이라고 부르는걸 보니 회사 하나는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들과 여기서 칵테일을 마신다니 좀 수상했다.
예쁜 와이프도 있겠다, 산정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경치 죽이는 곳에 있겠다. 부부가 함께 칵테일을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자기라면 이영진 상무의 손을 꼭 잡고 결코 놓아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말이 또 수상했다.
과장급 기사가 벤츠 마이바흐 기사에게 물은 말 때문이었다.
“홍 사장님이 여기서 친구들과 함께 칵테일 마시는 걸 회장님이 모르시지?”
“모르지. 알면 난리 나게?”
강시혁은 삼방그룹 회장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위가 친구들과 함께 칵테일 마시는 것도 못한단 소리인가? 그렇다면 자기는 숨이 막혀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회장이란 사람이 가끔 언론에 비칠 땐 유비 현덕같이 덕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았다. 보통 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삼방그룹 임원들은 회장한테 매일 갈굼을 당할 것으로 보았다.
회장과 직접 마주칠 일이 없는 부장이하 사원들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임원들은 마음고생깨나 하리라고 보았다.
[직업은 대리 기사가 최고야. 돈을 많이 못 벌고 남들한테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쟈유스럽잖아? 프리랜서 아닌가? 자기가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쉬고 싶으면 쉴 수 있는 직업이 아닌가?]
그러다가 강시혁은 내일이 신용회복위원회 채무 조정된 금액을 입금하는 날이란 것을 알았다.
[아니야! 대리 기사를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돼. 삼방그룹 회장님 같은 분이 구두라도 핥으라고 하면 핥아야 돼. 최근 정치권은 물론 공무원이나 사기업이나 힘 있는 사람을 빨아대느라 다들 정신이 없잖아.]
[우리 아버지도 그런 걸 못해서 출세를 못했지. 만날 성실하기만 했지. 성실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 지방도시의 낡은 아파트 한 채밖에 벌어놓은 것이 없잖은가? 그것 팔면 서울 전세도 못 얻지. 그런데 빌어먹을 내가 자꾸 우리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어!]
강시혁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금방 잠이 왔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밖에서 자동차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박 변호사가 서 있었다.
강시혁은 화들짝 놀라 의자를 얼른 원위치대로 했다.
“가, 가시는 겁니까?”
“법무법인 대표님과 나는 다른 차를 타고 갈 겁니다.”
“예?”
“대신 서울까지 모시고 가야할 분이 계십니다.”
“예? 어느 분을요?”
“삼방그룹 상무님 한분을 모시고 가면 됩니다.”
“예? 뭐라고요?”
그러자 현관 앞에 서있던 이영진 상무가 강시혁이 앉아있는 제너시스 앞으로 왔다.
강시혁은 순간 현기증이 들었다. 숨도 막혔다. 하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오실 때 보니까 벤츠 마이바흐를 타고 오신 것 같던데요.......”
“오실 때 한화리조트 앞에서 악성 파파라치가 따라 붙었답니다. 그래서 차를 바꾸어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그 자리에서 서울까지의 대리비를 계산해 주었다. 현금 결제를 해주었다.
강시혁은 얼른 차에서 튀어나와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영진 상무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며 차에 타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보통 대리 일을 할 때는 안하던 짓을 했다.
유명인이나 높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야 팁이라도 생기니까.
이영진 상무가 뒷좌석에 타자 박 변호사가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차가 국산차라 좀 불편하실 겁니다.”
“좋은데요. 뭐.”
박 변호사가 강시혁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시혁이 운전석 유리문을 열고 말했다.
“저.... 오실 때 일행이 있으셨던 것 같던데요?”
“그분은 나중에 가십니다. 먼저 출발하세요.”
차내에서 은은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이영진 상무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