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녀의 두 번째 남편-9화 (9/199)

9화 투잡 (1)

(9)

다음날 강시혁은 백석읍 전원주택으로 갔다.

집에는 웬 아줌마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노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아는 체를 했다.

“이 여사님은 나를 돌봐주는 방문 요양사요.”

“아, 그러세요?”

아줌마 얼굴을 쳐다보자 아줌마가 배시시 웃었다.

노인은 확실히 교양이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요양사 아줌마를 여사님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러니까 똑똑한 변호사 아들을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교양은 한때 장모였던 심은혜의 엄마가 없었다.

식당에 같이 가면 언제나 반찬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이 집은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 강시혁이 민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차가 중랑천 노원교 밑을 지날 때였다.

뒷좌석의 노인이 불쑥 말을 걸었다. 이제 구면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기사 양반은 고향이 어디요?”

“대전입니다.”

“오, 그래? 충청도 양반이네. 결혼은 했소?”

강시혁은 미혼이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나중에라도 뽀록난다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 번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혼자 삽니다.”

“내가 괜한 것을 물은 것 같소.”

“아, 아닙니다.”

“기사님이 인상이 좋소. 코도 잘생기고. 언젠가 성공할 것이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강시혁이 코가 잘생겼다는 말은 심은혜 한테도 들었었다.

그래서 강시혁도 심은혜에게 귀가 참 잘생겼다고 말했었다. 확실히 그때는 서로 눈에 콩깍지가 끼었던 것이 분명했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도 기사님의 인상이 좋은 것 같아 나를 수송하는데 불렀다고 말했소. 지난번엔 보호자 역할까지 해주어 고맙소.”

“별말씀을요.”

“오늘은 수술이 들어가는 날이라 보호자는 아들이 와서 해줄 거요.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서 틀림없이 보호자 서명을 하라고 할 것이요. 수술하다가 내가 죽으면 책임을 안 진다는 서명 말이요.“

“하하, 어르신이 왜 돌아가십니까. 요즘 100세 시대인데요.”

“그래도 나처럼 나이가 들면 모른다오.”

그러면서 노인은 중랑천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룸미러로 보니 노인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지고 쓸쓸한 모습이 보였다.

강시혁이 가다가 생각하니까 노인이 입원하게 되면 이 그랜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어르신! 그런데 어르신께서 입원하시면 이 차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다시 가지고 백석읍으로 와야 하나요? 오늘 대리기사를 부르지 않고 그냥 콜택시 이용하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아니요. 차는 병원주차장에 놔두면 며느리가 쓴다고 했소. 며느리가 지방대 교수인데 자기 차는 지방에 있으니까 서울에 올라와 내 차를 며칠간 쓰겠다고 했소.”

“아, 그러면 되겠군요.”

강남 성모병원에 도착했다.

강시혁이 차를 주차 후 노인을 부축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간호실 앞에 박 변호사가 나와 있었다. 그 옆에 금테 안경을 낀 흰 피부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는데 며느리인 것 같았다.

박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유, 기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불러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이때 간호사가 말했다.

“‘환자분 오셨어요? 그러면 보호자님께서 이 동의서 읽어보시고 서명 좀 해주세요.“

보호자 동의서였다.

서명을 하라고 했으니 강시혁이 혼자 모시고 왔으면 안 될 일이었다.

박 변호사가 대충 읽어보고 서명을 했다.

박 변호사가 서명 후 돌아서자 강시혁이 말했다.

“수술 들어가시면 차는 어떻게 할까요?”

“차는 제 와이프가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변호사는 안경을 낀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 자동차 키 받아!”

여자가 강시혁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강시혁이 건네주는 자동키를 두 손을 받았다. 역시 교양 있어 보였다. 안경을 꼈지만 인물도 괜찮아 보였다.

강시혁은 솔직히 박 변호사가 부러웠다. 나이도 자기 또래이지만 변호사에 대학교수에 수입도 엄청나리란 생각이 들었다.

박 변호사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참, 대리비 아직 안 드렸죠?”

“왕복이 아니니까 절반만 주세요.”

박 변호사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주며 말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강시혁도 대리비를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전화로 문의한 법률 상담도 고마웠습니다.”

“아, 채권자 소송 말이죠? 채무조정 하셨다니 열심히 일만 하시면 됩니다. 강시혁 씨의 열심히 사는 모습이 건강해 보여 참 보기 좋습니다.”

기사님이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니 더 친밀감은 있어보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강시혁이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어르신! 그럼 수술 잘 받으세요. 퇴원을 하고 가실 때는 또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들어주었다.

변호사 부부가 똑같이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며칠이 지났다.

강시혁은 대리 일을 하면 생존은 하겠지만 저축을 못하는 것이 늘 걱정 되었다.

이렇게 되면 금방 40세가 되고 50세가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번 생은 조지는 것이다,

구인 사이트를 열심히 보았다.

기업의 신입사원은 나이가 많아 불가능하고 경력사원 모집 광고를 보았지만 적당한 것이 없었다.

대부분 이공계 모집광고만 올라왔다.

그중에서 눈에 띠는 것이 하나 있었다.

노원구의 어르신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전기사를 모집하는 광고였다.

“하루 4시간 30분 근무에 월 120만원? 괜찮은데?”

파트타임 근무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이 돈은 저축이 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주 6일 근무였다. 하지만 소정 근로인 주 26시간은 근무해야만 했다.

자격은 경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1종 면허만 있으면 되었다.

강시혁은 지원서를 제출했다.

면접하는 날 센터장인지 원장인지 하는 사람이 물었다.

“오래 하실 수 있지요?”

“그럼요. 밤에 다른 일을 하니까 하루 4시간 정도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강시혁은 즉각 합격되었다.

합격사실을 문자로 통보받고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대기업도 이렇게 즉각 합격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삼방그룹 같은 재벌사에 합격만 한다면 내가 자란 대전 둔산동에서 용이 나오는 건데.”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시혁은 삼방그룹 같은 데는 원서를 내보지도 못했다.

워낙 스카이 출신들만 지원하고 또 자기가 나온 어문계열은 뽑지도 않았다. 인적성 검사에서도 탈락될 것이 뻔했다.

강시혁은 자기가 영문과를 나왔지만 다른 학과 출신들도 영어는 잘했다.

상대나 공대 다니는 놈들도 해외 어학 연수를 갔다 온 놈들이 많아 발음이 강시혁과 달랐다.

특히 조기 유학을 갔다 온 놈들은 발음이 환상적이었다. 그러니 강시혁이 영어가지고 명함을 내밀 입장이 못 되었다.

학부 성적도 학교 다닐 때 알바를 많이 하느라 공부를 못해 엉망이었다.

또 삼방같은 대기업에서는 스카이 대학 상경계 출신이나 해외에서 MBA라도 받고 온 놈을 뽑지 자기를 뽑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대리 일 열심히 하고 주간에 어르신 보호센터에서 일한다면 대기업 사원들의 초봉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간보호센터 일은 오전에 잠깐, 그리고 나머지는 오후에 일을 해야 했다.

특히 오전에 하는 일은 아침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데 집에서 늦어도 6시 40분 쯤이면 나와야 한다.

밤에 대리 기사 일을 하고 오지에 들어갔다가 지하철 새벽 첫차라도 타고 오면 잠잘 시간도 없었다.

바로 아침밥 물에 뚝딱 말아먹고 어르신 보호센터로 달려가야 했다.

그런데 어르신 보호센터 일도 만만치 않았다.

수송차량이 스타렉스인데 연식이 오래되어 털털거렸다.

그리고 어르신들 중에는 보행이 어려운 분들도 있어 케어를 해야 하며 특히 상하차시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대리 일보다도 결코 쉽지 않았다.

또 노인들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몸에서 심하게 냄새가 나는 분들도 있었다. 백석읍에 살고 있는 변호사 아버지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이 일을 악착같이 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이 어르신 주간보호센터 일을 한지 보름 정도 되었다.

노인 한분을 상계동 주공아파트에 모셔드리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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