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재벌가 혼사 뉴스 (1)
(3)
후배는 백수라도 언제나 명랑했다.
부자는 아니지만 중산층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서 그런 것 같았다.
아버지는 지방에서 침대 공장을 운영하고 엄마와 함께 이문동 아파트에 살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버지 공장은 큰 공장은 아니고 종업원 몇 명 데리고 일하는 영세 공장이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살만한지 이문동의 30평짜리 이편한세상 아파트에 살고 있다.
"형, 운전 중 아니지?“
“아니야. 나와라. 밥이나 같이 먹자.”
“지금 못 나가. 그리고 형! 일요일 등산가는 거 취소하고 캠핑을 갈까? 1박2일로 어때? 한탄강 강변에 차박하고 괴기나 구어먹지?”
“나, 일해야 해. 당일치기는 해도 1박2일은 곤란해.”
“악착같이 돈 벌어 다 뭐해?”
강시혁은 빚 갚아야지!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기어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후배는 아직 강시혁이 철저하게 망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와이프와 이혼을 했어도 돈 때문에 헤어졌다는 말을 못하고 그냥 성격차이로 헤어졌다는 말만 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끊고 강시혁이 시간을 보았다. 대리 일감이 들어오려면 두어 시간 더 있어야 했다.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갔다. 대리 일을 하려면 밥이나 든든히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강시혁은 뼈다귀를 발라먹으면서 소주나 한잔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하지 못하니 좀 우울했다.
대리 일을 한 후 저녁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 저녁에 마음 놓고 술 한 잔 할 수 있는 처지가 이렇게 부러울 줄은 몰랐다.
식당의 대형 스크린에서 뉴스가 진행되었다.
삼방그룹 외동딸 이영진 상무가 언론 재벌로 유명한 A일보 장남과 결혼을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잠깐 이영진 상무의 얼굴이 스크린에서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말했다.
“삼방그룹 딸이 누구와 결혼을 하나했더니 A일보와 결혼하네. 흥! 끼리끼리 하는군.”
이영진 상무는 인물도 좋지만 머리도 좋았다. 서울대를 다닐 때 서울대생들이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여왕벌이란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언젠가 서울대 모 동호회 커뮤니티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공부 필요 없다. 매판자본가 삼방그룹 두목의 딸만 잘 잡아봐라. 벌써 재산이 수조원이라더라.]
역시 공부 잘하는 놈들도 자본 앞에는 삼가 옷깃을 여미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삼방그룹 회장이 매판자본가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혹시 돌아가신 그의 할아버지라면 이 말이 맞을지는 몰랐다.
옆에서 소주를 마시던 중년 남자들이 다시 말했다.
“상무지만 회장 딸이라 사장이나 부사장들이 꼼짝 못하겠지?”
“그러겠지. 회장이 나이어린 자기 딸을 바로 사장시키면 이상하니까 상무 정도 직함주고 경영을 배우라고 했겠지.”
“주식을 가지고 있다면 배당금만 해도 어마어마할 걸.”
“그렇겠지.”
“보수 언론재벌도 삼방그룹 후광을 입었으니 더 잘나가겠네.”
“나는 삼방의 딸이 서울대에서 인기라 거기서 연애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런데 삼방 회장은 딸을 후계자로 삼으려나 아들 이야기는 없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강시혁은 밥을 먹었다.
재벌들 결혼 뉴스를 듣다보니 또 헤어진 아내 심은혜가 생각났다.
같이 살 때는 자기도 부부 사이가 나빠 이혼하고 싶었다.
날마다 심은혜가 돈, 돈 하는 것도 질렸고 또 대전에 있는 부모님을 개무시하는 데는 열불이 났다.
심은혜는 명절 때 한사코 대전엘 내려가지 않았다.
언젠가는 강시혁을 무시하더니 대전의 부모님까지 비웃는 발언을 했다.
“젊었을 때 뭐하고 아들 전셋집도 못 얻어줘?”
“대학교육 시켜주었잖아. 그것으로 고마워해야지.”
“헹, 웃기네. 어느 집은 대학교육 안시키나? 혼자만 대학 다닌 것처럼 이야기하네. 우리 회사 박 과장은 부모님이 아파트를 사주었다는데 전세도 못 얻어줘? 젊었을 때 정말 뭐한 거야?”
“너, 말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곤 뭘 그렇게 나한테 요구하는 게 많아? 명절이면 꼭 내려가야 하나? 가면 또 이것저것 참견이나 하고, 해준 건 없이 대접만 받으려고 하니 그게 말이 돼? 요즘 누가 시집살이를 해?”
심은혜는 잠자리까지 거부했다.
“건너 방에 가서 자. 나 피곤해.”
“우리 부부잖아.”
“흥, 부부 좋아하네.”
“또 그놈 생각인가?”
“아휴, 저질! 정말 강 씨 집안은 위나 아래나 다 똑같아!”
“뭐가 어째?”
이러면 이날 밤은 다정하게 같이 자는 게 아니라 난투극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것은 강시혁이 다니는 회사가 월급이 밀리고 부터였다.
결국 회사는 부도가 났고 강시혁은 재취업이 안 되어 건대입구역 골목에서 15평 짜리 식당을 차렸다. 월급쟁이는 하기 싫었다.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강시혁은 식당을 차릴 때만 해도 꿈에 젖었다.
하루에 100명이 밥을 먹으러오면 빚도 갚고 머지않아 집도 사리란 환상이 들었다.
그런데 이놈의 식당이 개업 며칠간만 반짝하고 장사가 안 되었다.
주방아줌마도 속을 썩였다.
또 건국대학생 하나가 이 식당은 냉동식품이나 나오고 머리카락 나오는 집이라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손님이 팍 줄어들었다.
장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의욕만 가지고 덤볐으니 망하는 건 뻔한 순서였다.
집에 가면 돈도 못 벌고 몸에서 음식 냄새만 풍기니 아내인 심은혜는 자기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심은혜는 이때 자기 회사의 박문도 과장이라는 사람과 수상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였다.
심은혜는 회식이 잦았고 어느 날은 외박도 했다.
불륜의 맛은 언제나 짜릿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강시혁은 밤늦게 장사하느라 이런 사실도 몰랐다.
강시혁은 생각 끝에 손해보고 가게를 정리했다.
남은 돈은 빚을 갚을까 하다가 주식이라도 해서 튀겨볼까 했다. 그런데 이것도 안 되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 말만 듣고 투자했다가 반 토막 나고 빚만 남았다.
심은혜의 국민은행 카드까지 빌려 쓰다가 메우지 못하니 날마다 부부 싸움만 했다.
결국 강시혁은 돈 잃고 아내를 잃었다.
강시혁은 밥을 먹고 뼈다귀 해장국집을 나왔다.
그리고 편의점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도 한잔 빼먹었다.
회현동에서 부천까지 가는 콜이 잡혔다.
손님은 시끄러운 아줌마 두 사람이었다. 그래도 손님은 강시혁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좋았다. 자기들끼리만 계속 떠들었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진상 손님이 아니라서 좋았다.
운 좋게 부천에서 바로 신길동까지 오는 콜을 잡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강시혁은 대학 동창을 만난 것이다.
마스크도 하고 술이 취해 자기를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놈은 대뜸 강시혁을 알아보았다.
“어? 너? 시혁이 아니냐?”
“오래간만이다.”
“너 대리 뛰냐?”
“투잡이야. 낮에 직장 다니면서 저녁시간에 알바로 해. 그래야 빨리 집을 사지.”
강시혁은 기죽고 싶지 않았다.
투잡이라고 사기를 쳤다. 번듯한 직장에 다녀도 대리운전은 투잡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투잡이면 떼돈 벌겠는데? 나도 같이 하자.”
“하하, 늦게 끝나는 직장은 안 돼. 월급 많이 받으면 그대로 다녀. 넌 제약회사 다닌다고 했지?”
“맞아. 넌 어디 다닌다고 했지?”
“난 조그만 중소기업에 다녀. 너처럼 유명 제약회사 다니면 나도 대리 안 해.”
다행히 동창 녀석은 많이 취해 있었다. 뒷좌석에 올라타더니 바로 목이 옆으로 꺾어졌다.
동창은 계속 코를 골고 잠을 잤다.
강시혁은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이제 내가 대리한다는 소문이 동창들 세계에 다 퍼지게 생겼네.]
목동아파트 부근에서 신호에 걸렸다,
뒷좌석의 동창이 깨어났다.
“어? 여기가 어디야?”
“목동 아파트 부근이야.”
“빨리도 왔네. 그런데 너 운전 참 잘한다.”
“내가 운전병 출신이 아니냐? 나 스틱 운전도 잘해. 수송부 있을 때 트럭 몰고 다녔잖아.”
“참, 너는 운전병이었었지.”
그러면서 친구는 다시 코를 골았다.
다행히 친구는 직장에 대하여 꼬치꼬치 묻지 않았고 와이프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운전을 하고 가면서 이놈에게 대리비를 받아야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고민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