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어느 종교나 신화 속에서 아주 당연하듯이 등장하는 존재인 천사와 악마.
신의 뜻을 대신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나 인간을 꼬드겨 타락시키는 사악한 존재 정도로 사람들에게 묘사되고는 했지만, 전능한 신의 지식에 따르면 이들은 그런 일반적인 이미지들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천사든 악마든, 그저 영혼 하나 더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영업사원일 뿐이지. 그것도 영혼 하나에 달라붙어서 골수 하나까지 쪽쪽 빨아먹는 찰거머리 같은 기생충 같은 독한 놈들.”
수많은 시공간과 차원으로 나누어진 이 드넓은 대우주에서 영혼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주체는 오직 3곳밖에 되지 않았다.
선악의 업(業)을 관리하는 천계와 마계.
그리고 위대한 순환의 고리를 작동시키고 관리하는 명계.
이들은 저마다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고 거대한 규모를 가진 세력이었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대우주 전체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물질계에 개입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지. 자신들과의 채널링이 성공한 이 현대의 영혼을 꼬드기고 유혹해서 계약(契約)을 체결하는 것. 지금 이 악마 새끼가 제이크의 몸에 들러붙어 깽판을 치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영혼에 달라붙지 않는 이상, 기본적으로 이들은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조금도 발휘할 수 없지.”
이 대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강제적인 제약에 묶여 있는 이들.
그렇기에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 때문이든, 이들은 일단 자신들과 채널링이 성공한 영혼들을 끈질기게 꼬드기고 유혹해서 계약을 맺고 이들을 통해서 현세의 개입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어 갔다.
바로 지금 내 함정에 제대로 빠져 버린 이 분노에 찬 악마처럼 말이다.
[ 감히!!!!!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진심으로 분노한 듯, 핏발이 잔뜩 오르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새빨간 안광을 빛내며 음산한 마기를 전력으로 뿜어내는 제이크……. 아니, 최상급 마족 레지마.
최강의 생명체라고 불리는 드래곤들조차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강대한 공격이었지만, 이 강대한 힘을 직면하고 있는 인간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공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헉! 이번에는 또 이상한 광역 공격이다!”
“이런, 망할. 저건 어떻게 피하라는 건데?”
“에라이. 또 코인 날아가는 건가?”
“방금 살아났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지! 무한 실드 간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수백 명의 초보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낸 중첩 방어막.
얇은 나뭇가지도 수십, 수백 개가 모이면 안 부러진다는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처럼, 힘을 합쳐 만들어 낸 그 1 서클의 그 방어막은 탱크 포탄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무식한 수준으로 두터워졌지만, 그렇다고 수억 명의 영혼을 흡수한 최상급 마족이 전력으로 뿜어내는 마기를 막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콰드드드드드득.
조금도 버텨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서져 버리는 방어막.
그리고 맹렬하게 쏟아지는 마기의 폭풍에 휩쓸린 우로보로스의 마법사들은 이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다.
앞으로 인류 미래를 책임질 마법사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허망하게 죽어 버린 상황.
하지만 그 순간, 이 우로보로스를 지탱하고 있는 마법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초월 마법. 크로노스 시스템(The System of Cronus).
이미 지나 버린 시간을 되돌려 이미 벌어진 모든 일을 부정(不定)하는 이 마법이 발동되자, 방금 그 강력한 마기로 인해서 죽어 버린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죽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말이다.
“아오! 진짜 더럽게 강하네!”
“에라! 이 망할 악마 새끼야! 이거나 먹어라!”
“너 때문에 벌써 120코인 썼잖아! 이 힘만 쎈 무식한 야구 빠따 새끼야!”
“제이크 이 새끼! 나중에 정신 돌아오면 보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리며 온갖 저급한 마법을 쏟아 내는 마법사들.
방어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주어도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만으로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무의미한 공격이었지만, 레지마는 이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들을 상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 봐도, 그가 들어가 있는 이 육신이 우로보로스라고 불리는 이 영역을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크아아아아아아!! 이 같잖지도 않은 인간이 감히! 감히!!!!!!!! ]
쿠구구구구구구궁.
“헉! 이 새끼 진심으로 열 받았는데?”
“이런. 일단 전부 빠져! 저거 또 그 광역 공격이다.”
“자, 힘 법사들! 이번에는 저 새끼 면상 한 대라도 제대로 갈겨 봅시다.”
“자자. 디멘션 학파 여러분. 1초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아시겠죠? 긴급 상황에서 블링크를 시전하는 그 1초를 단축하는 것이 여러분의 목숨을 좌우합니다.”
“야, 이 새끼들아! 좀 공격 하나하나에 마력을 꽉꽉 집어넣으라고! 마력 응축법 강의 시간에 잠만 잤냐!”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며 무차별적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인지, 마치 게임 공략하듯이 각자의 포지션을 잡고 공격을 시도하는 마법사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온갖 과제를 연습하고 실습하면서 빠르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아하! 이제 좀 알겠다.”
“뭘 알아?”
“마력 주입할 때, 원소를 회전하면서 넣으니까 관통력이 상승하는데?”
“오……. 그게 설마 파이어 애로우야……?”
“파이어 애로우(Fire arrow)라기보다는……. 파이어 드릴(Fire Drill) 아니냐?”
“우하하하하!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방에 모든 걸 건다! 풀 마력 카운터 펀치!”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알았다! 이렇게 하니까 3연속 블링크가 가능해!”
“와, 씨. 저거 뭐냐? 진짜 미쳤네. 어떻게 했냐?”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히 달라지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장 경악한 것은 다름 아닌 용용이였다.
[ 이……. 이게 뭐야?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경지가 늘어날 수 있는 거지? ]
단순히 상대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강자와의 싸움에 익숙해지는 것을 넘어서 이들의 경지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수많은 깨달음의 단편들이 엿보이고 있었다.
[ 저건……. 수년……. 아니, 수십 년을 고민하고 수련하며 거의 평생을 매진해야만 얻어 낼 수 있는 비전(祕傳)과 비기(祕技)들이잖아. 이제 겨우 초보 마법사나 기사 정도밖에 안 되는 애송이들이……. 어떻게 저런 깊이 있는 마학과 무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건데? ]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용용이. 그런 그의 의문에 나는 담담한 얼굴로 그 답을 내놓았다.
“내가 말했잖아? 지금 순간은 이들에게 다시 없을 기연이자 축복이라고.”
[ 뭐……? ]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업(業)이 부여한 운명과 격의 한계를 깨부술 기회를 얻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잖아?”
명계의 위대한 순환의 고리에 따라 각자의 영혼이 가진 업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
그 운명 안에는 저마다의 재능의 한계 역시 정해져 있었기에, 본래 대부분은 그 운명이 허락해 준 한계치 이상의 성취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간혹, 그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들이 있기도 했다.
“수억 명의 영혼을 흡수한 최상급 마족을 상대로 이 지구의 수많은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맞서 싸운다……. 아무리 우로보로스의 보호 아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살면서 절대로 쌓을 수 없는 아주 강력하고 거대한 업(業)이지. 자신이 가진 운명과 격의 한계를 깨부술 만큼.”
수많은 실패와 죽음을 경험하는 마법사들.
하지만 이들이 지금 경험하는 실패와 죽음은 기존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대면할 일도 없을, 아득히도 지나친 격의 차이를 가진 최상급 마족을 상대하며 전면으로 맞붙는다는 것은……. 이들의 영혼에 어마어마한 업을 쌓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가진 기존의 격을 한 단계……. 아니, 몇 단계나 더 드높이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아까부터 뭔가 보여. 붉은 선 같은 건데 신기하게 그거 따라가면 한 대는 칠 수 있더라.”
“마나라는 것은……. 이런 거였구나.”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하는 것이구나.”
“뭔가……. 뭔가 알 것 같아.”
그렇기에…….
이들은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꽉 막혀 있던 저마다의 벽을 뚫으며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가며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조금도 쉬지 않고 득달같이 달라붙는 이 성가신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이들의 영혼을 모조리 장악하려는 레지마. 하지만, 지배의 권속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그의 강력한 권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영혼에 그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었다.
[ 이!!!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들이!!! ]
주제도 모르고 덤비는 인간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이들의 영혼을 타락시키려고 시도한 레지마. 하지만 그의 강력한 지배력에도 불구하고 우습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으로 부활해 같잖지도 않은 마법을 갈겨 대는 이들을 보며 레지마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거참.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네가 아무리 이들의 영혼을 강탈하고 싶어도, 기본적으로 이 현대 사회는 계약서가 가장 기본인 사회잖아? 이미 선순위 채권으로 잡혀 있는 계약이 있는데, 인제 와서 아무리 네가 강제로 이놈들한테 노예 계약서에 강제로 지장 찍어 봤자 그게 의미가 있겠냐고.”
입학하기 이전부터 방대한 분량으로 되어 있는 영혼 계약서에다가 본인의 의지로 서명한 우로보로스의 교직원과 학생들. 그 어떤 허점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치밀하게 이들의 영혼에 대한 소유권을 비롯해 근저당권까지 설정해 버린 이상, 레지마는 여기 있는 이 깡통 영혼들을 상대로 아무런 것도 뽑아먹을 수 없었다.
[ 네놈!!!! ]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원흉인 나를 험악한 얼굴로 바라보며 달려드는 레지마.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악의와 적의는 그저 눈빛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은 죽을 정도로 그 기세가 강력하고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그 맹렬한 기세는 바로 내 코앞에서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 도대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인간!!! ]
이미 냉정함은 잃어버리고 반쯤은 폭주한 상태로 괴성을 내지르는 레지마.
마음 같아서는 이미 일찍이 이 정신 나간 공간을 벗어나거나 이 상황을 마치 재미난 구경거리처럼 지켜보고 있는 멀린이라는 인간의 머리를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그 어느 하나도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의 그러한 의지를……. 어떤 강력한 무언가가 제약하고 구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했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네가 지금 기생하고 달라붙어 있는 녀석도 마찬가지로 깡통 영혼이라고.”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미끼로 내밀었던 제이크의 영혼.
그리고 그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리고 그의 영혼에 기생해 버린 이 레지마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로노스 시스템의 일원이자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우로보로스의 교칙이 적용되는 그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 버렸다.
“우로보로스 학칙 제1조. 졸업하거나 퇴학당하지 않으면 이 학교를 벗어날 수 없다.”
“제2조. 그 어떤 이유로도 학장과 부학장에게는 적대할 수 없다.”
제1조와 2조의 교칙에 따라 완전히 이곳에 발이 묶여 버린 레지마.
주변이 완전히 깡통 영혼에 일으킬 수 있는 시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청정한 지역이었기에 그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 동안 발이 묶인 채 무의미한 전투만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 으아아아아아! 인간! 감히 나를 속여?!!!! ]
자신이 눈 뜨고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진심으로 괴성을 지르는 레지마.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으며 시계를 힐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한 9일만 더 열심히 이 녀석들 훈련 교보재 역할만 해 주면, 말끔하게 퇴치해 줄 테니까.”
또다시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방향성 없는 힘을 뿜어내며 폭주하기 시작한 레지마.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