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통신과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과거.
인간들은 지구 곳곳에서 각자의 독자적인 문명을 만들어가며 저마다 각양각색의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켜갔지만, 그런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도 공통적인 특성이 하나 있었다.
“그 어떤 문명도 독자적인 종교를 가지지 못한 곳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지. 하물며 독자적인 문자나 언어를 만들어 내지도 못한 원시 문명에서조차도 말이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앙(信仰).
현실에 존재하지도, 그리고 그 존재를 느낄 수도 없었지만, 인류는 분명하게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무언가를 본능적으로나마 기억하고 숭배하고 있었다.
이 세상의 영성을 일깨운 어느 ‘누군가’를 말이다.
“우습지 않아? 용용아?”
[ 뭐가……? ]
“이 세상을 만들어 낸 창조주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방향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방황하며 공허하고 헛된 신앙만을 부르짖고 있잖아. 그것도 수십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영혼들이.”
판달리아와 다르게 이 지구에는 유독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세계 4대 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수억 명이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이 커다란 종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이외에는 대다수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수백, 수천 가지의 종교들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온갖 종교들로 가득 차 있는 뷔페라고 할 수 있는 지구.
수많은 인류 역사의 흐름 동안 이 종교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갔고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하고 아둔한 비극적인 일들이 셀 수 없이 일어났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무의미한 것들일 뿐이었다.
“하느님도. 알라도. 부처도. 그저 인간이 만들어 낸 한낱 허상 속의 명칭일 뿐이고, 그 교리 또한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인데……. 모두가 같은 존재를 숭배하면서도 진정한 신명(神名)조차 모르는 상태로 서로를 이교도라고 배척하며 탄압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지.”
분명, 이 지구라는 행성에 문명의 씨앗을 심어 놓은 누군가는 존재했다. 자아를 가진 문명이 스스로 발아할 수 없는 것은 이 대우주에 새겨진 절대적인 법칙이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은 채, 이 지구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것도 아주 헤아릴 수 없는 수없이 오랜 과거부터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의 스스럼도 없이 지금의 이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주인도 없는 빈집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천벌(天罰)을 내릴 수는 없겠지. 용용아. 이제 슬슬 시간 다 됐으니까 준비해.”
[ ……. 알겠어. ]
준비하라는 내 지시에 용용이는 조금 주저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이내 마나 링크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통신 기기에 내 방송을 송출시켰다.
TV. 스마트폰. 지하철 전광판…….
심지어 비행 중인 비행기 안 승객 스크린에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수십억 명이 넘는 모든 인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이 상황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첫 마디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친애하는 인류 여러분.”
“대마법사 멀린입니다.”
평소 뮤튜브를 할 때의 정신 나간 컨셉과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기세로 말이다.
* * *
대한민국 3대 방송사 중 하나인 BMC.
이들은 생방송으로 중국 사태와 관련한 특집 뉴스를 보도하던 중 갑작스러운 송신 이상에 난리가 났다.
“뭐야?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야?”
“저……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방송 연결이 끊기면서 멀린이…….”
“아무래도 외부에서 강제로 시스템을 해킹한 것 같습니다.”
“뭐……?”
부하 직원들의 말에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보도국장.
하지만 이어지는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경악했다.
“국장님! BMC만이 아닙니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을 비롯해 심지어 마나 링크를 이용하는 모든 전자기기가 동일한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뭐라고?”
그 말에 직원들은 다급히 주머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 갑자기 왜 뮤튜브에 강제로 접속됐지?
- 뭐야? 버튼이 안 먹히잖아? 지금 이거 무슨 상황임?
- 해킹이라도 한 거냐?
- 그런 것 같은데? 접속자 수 실화냐?
- ㅋㅋㅋㅋㅋ 52억? 그냥 아주 미쳐 버렸네.
뮤튜브에서 다시는 경신할 수 없을 정신 나간 수치를 기록한 실시간 접속자 수.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방법으로 네트워크 전체를 장악한 듯한 멀린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전 세계인을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 이렇게 갑작스럽게 납치해서 죄송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네요. 다들 고단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느라 바쁘실 테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죠. ]
[ 일단, 저는 이번 중국 사태에서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뭐……? 뭐라고?”
“저게 무슨 소리야? 개입하지 않겠다니!”
“이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각성자잖아. 대마법사라면서 왜……?”
멀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 단순히 BMC뿐만 아니라 채팅창을 통해서 미친 듯이 달리는 물음표는 도무지 어떤 글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속도와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 어떤 시스템보다 압도적이고 안정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마나 링크가 아주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질 정도로 말이다.
[ 아, 오해하지 마세요. 개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니까요. ]
착각하지 말라는 듯이 방금 했던 말을 정정하는 멀린. 그리고 그의 자신이 놓인 구체적인 처지를 설명하며 왜 지금도 실시간으로 죽어 나가는 중국의 수많은 희생자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밝혔다.
- 그러니까……. 화성에서 너무 무리한 나머지 앞으로 40일 정도는 마법을 쓸 수 없다고?
- 하긴, 행성 하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는데 후폭풍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
- 다시는 마법을 못 쓰는 게 아니라 조금만 요양하면 멀쩡해진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데?
- ㄹㅇ……. 진짜 나는 멀린이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가끔 의문이 들어.
멀린이 화성에서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에 그의 해명을 듣고 곧장 수긍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웅성거렸다.
“잠깐만. 그러면 중국의 저 언데드 군단은 누가 막으라는 거지?”
“중국은 그렇다고 치겠는데 다음은 북한이랑 우리잖아.”
“40일이라니……. 그때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희생자가 생겨날 텐데……?”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기에 조금의 휴식도 취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 언데드.
당연하게 있어야 할 생존의 본능조차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살육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이들의 군세를 40일이나 막아서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현대 병기가 조금도 먹히지 않는 몇몇 강력한 언데드들이 움직이고 있는 전장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 중국군은 이제 한계에 부딪혀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40일?
- ㅋㅋㅋ. 그때 되면 중국을 넘어서 다른 주변국들까지도 전부 언데드 군단으로 변해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 이거 진짜 큰일 난 거 아닌가……?
이 세상의 인류가 가장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이 나설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동요하고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주 좋은 대비책이 남아 있거든요.”
“대비책……?”
“그게 뭐지……?”
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을 방책이 있다는 듯한 멀린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멀린은 말했다.
[ 바로 기도하는 겁니다. ]
“……?”
기도. Praise.
두 손을 맞대고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와 소통하는 종교적인 행위.
인간의 힘으로 감히 해결할 수 없는 고난에 부딪혔을 때 정신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나 하는 그 기도를 인류가 맞닥뜨린 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해결책으로 내놓는 멀린의 말에 모두가 황당함에 말을 잃었다.
- 기도……? 기도오오오?
- ㅋㅋㅋㅋ 갑자기?
- 장난하나 진짜……. 기도하면 뭐 됨?
- ??? : 모조리 죽게 될 중국인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여러분.
온갖 조롱 섞인 성토가 쏟아지는 댓글 창.
말도 안 되는 대안을 내놓는 멀린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역겨운 장난을 치거나 능욕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BMC의 보도국장을 비롯해 수많은 직원이 그러한 것처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도 멀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놓을지어다. ]
[ 살생하지 말아라. 모든 중생들을 긍휼히 여기어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실천하라. ]
[ 남을 부정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부정치 못하게 하라. 한 시간의 정의로움은 일백 시간의 회개보다 나으리라. ]
[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가라. 그 어떤 길도 잘못된 길은 없으니,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위대한 진리로 향하는 길일지어다.]
뜬금없이 수많은 종교의 구절들을 나지막하게 읊조리기 시작한 멀린.
그리고 그는 조용해진 채팅창을 잠깐 바라보다 이내 말을 이어 갔다.
[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한테 하나 물어볼게요. 혹시 이런 생각 한 적 없어요? ]
[ 나는 분명……. 신실한 신앙심을 갖고, 여러 덕목을 잘 갖추고 있는데 아무런 계시나 은총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
[ 선행을 베풀며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어마어마한 시련이 나에게 불어닥치고. 온갖 시험에 빠져들게 하면서도 신은 나에게 그 어떠한 구원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고 말이죠. ]
“…….”
멀린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묵묵히 방송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 이 세상에 무신론자가 많을 수밖에 없어요. 수많은 이들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심을 보여 줬음에도, 어떤 이적도 제대로 목격하거나 경험한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요. 물론……. 최근에 그러한 이적을 경험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고는 있지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죠. ]
[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은 잘못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아주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지극히도 당연한 선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죠. ]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 사랑. 자비. 정의. 명예…….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선(善)의 덕목(Virtue).
그리고 그것을 진실로 행해오고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미 일찍이 그 힘을 각성했어야 했다.
그 순수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격을 완성한 영혼이…….
드높은 천상과의 연결(Channeling)에 성공하고 그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대우주의 순리이자 섭리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를 믿고, 누구를 찬양해야 하는지 그 주체를 알지 못한 채 버림받은 이 세계의 기구한 영혼들은 구원받을 기회조차도 철저하게 박탈당해야만 했다.
바로 오늘까지는 말이다.
[ 진심으로 믿고 간절하게 기도하세요. ]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멀린의 한마디.
우우웅.
그리고 그 순간, 전 세계의 인류는 비로소 무언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여러분의 신은 배고픔에 굶주리는 이에게는 빵을 건네줄 것이고, 슬픔에 흐느끼는 이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이며……. ]
[ 도움을 원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 것이며, 용서를 구하는 자를 따듯하게 안아 줄 것입니다. ]
[ 그것이 바로……. 신이 가진 의무이자 권리이니까요. ]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에게 그에 합당한 힘을 내려 주는 것.
영성을 가진 자의 신앙을 통해 신성(神聖)을 유지하며, 그들을 통해 현세에 개입하는 것이 기본적인 신격들의 메커니즘이기에……. 나는 자그마치 80억에 다다르고 있는 이 무수히 많은 영성이 가득한 이 세상을 통째로 넘겨주었다.
[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빛의 성위(聖位). 다리엘(Dariel)을 위해 기도하세요. 여러분. ]
“다리엘……?”
“그게……. 신의 이름인가?”
멀린의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이들.
하지만 BMC의 보도국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수십 년도 넘게 차고 있던 목에 걸린 십자가를 미친 듯이 떨리는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 불러라. ]
어딘가에서 순간적으로 들려온 목소리.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이리라 생각하며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그는 점점 선명하게, 그리고 똑똑하게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나의 이름을 불러라. ]
“아니야……. 아니라고…….”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휘젓는 보도국장.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그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내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듯이 중얼거렸다.
“하……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主) 다리엘 님이시여…….”
수백, 수천 번을 기도하며 읊었던 기도문.
하지만 이번에 그는 그 기도의 주체를 바꾸었다.
“부디……. 이 비천한 저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그토록 애달프게 외쳤던 기도.
하지만 그동안 한 번도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던 하늘이……. 이번에는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그의 기도에 응답했다.
우우우우웅.
“뭐……뭐야?”
“구……국장님?”
“세상에 맙소사…….”
새하얀 빛이 감도는 광휘.
스튜디오를 제외한 모든 조명을 꺼 놓은 상태였지만, 그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은 스튜디오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아아…….”
분명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느껴지는 신의 힘. 신성력.
그 진정한 힘을 비로소 깨달은 보도국장은 자기 눈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기도했다.
“거룩하신 아버지. 다리엘 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렇게…….
주인이 없는 이 버려진 세상에…….
80억에 달하는 길 잃은 어린 양들을 이끌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