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근교 도시.
그곳에 살고 있던 왕징은 시끄럽지만,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보. 나 밥 한 공기 더 줘.”
“잠깐만요. 아기 기저귀만 마저 갈아 주고요.”
이제 막 2살이 된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 주느라 분주해 보이는 아내. 그런 그녀를 보며 왕징은 이내 피식 웃으며 밥솥에 있는 밥을 스스로 덜었다.
[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자이 엔 주석께서 당 간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반체제 테러 집단들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최근 들어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테러 사건들 때문으로 보이며, 베이징에서의 참사와 더불어……. ]
[ 공안 당국이 사이버 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쿠데타 모의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오랜 시간의 수사 끝에 신장 지역에서 320명의 대규모 테러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테러 조직 중 가장 최대 규모이며 이들의 신원을 철저히 조사하여……. ]
[ 베이징 참사 2주년. 우리 중국은 그때의 그 참상을 잊지 못했지만, 아주 슬기롭게 극복해 가고 있습니다. 위대한 주석의 영도 아래에 우리 중화 인민들이 언제나 근면 성실하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
아침밥을 먹으며 연신 채널을 돌리던 왕징. 하지만 그는 이내 죄다 엇비슷한 주제의 뉴스들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후우…….”
“왜 아침부터 그렇게 한숨이에요?”
기저귀를 다 갈아 줬는지,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돌아와 식탁에 앉는 아내. 그런 그녀의 물음에 왕징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냥…….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너무 흉흉한 것 같아서.”
마법의 등장과 함께 도무지 예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왕징은 묘한 두려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회사 다닌 지 이제 겨우 5년도 안 됐는데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짤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거든.”
“왜 갑자기 그런 걱정이에요? 설마 최근에 손실을 크게 입었다는 그 일 때문에 그래요?”
“뭐……. 그것도 있고. 이래저래 변화의 흐름에 따라가는 게 너무 버거워서…….”
꽤 건실한 무역 상사에서 일하고 있는 왕징. 최근 원유 가격의 급락 때문에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은 회사가 휘청거리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어느 한 세력이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각성자(Awaken).
이 각성자들을 대놓고 우대하고 어떻게든 자기네 쪽으로 영입하려는 것이 전 세계의 정부, 회사의 주요 흐름이었고, 심지어 학교나 아파트 단지 내에서조차 차별이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평범한 일반인 신분인 왕징은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도 다 크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마법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혁하기 시작한 세계.
그리고 그 변화에 뒤처지며 따라가지 못하는 패배자가 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의 왕징은 큰 근심에 빠져 있었지만, 그의 아내는 달랐다.
“또 쓸데없이 너무 먼 미래까지 고민한다.”
“……?”
“전에도 말했죠? 당신은 계획적이라서 좋은 것도 있는데 가끔은 너무 걱정이 많다고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를 보며 왕징은 순간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던 그 불안감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얼마 못 버티고 잘릴 수도 있죠. 그래도 아무 일이나 찾아서 해도 되고, 아이만 조금 더 크면 저도 일하면서 살림에 보탤 수는 있으니까 우리 셋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는 문제없을 거예요. 물론, 이곳보다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고 아껴 써야 하겠지만 말이죠.”
“지금 일만 고민해요.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당신…….”
잔뜩 감동한 표정을 짓는 왕징에게 아내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당신……. 출근 안 해요?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앗! 언제 시간이……! 다……. 다녀올게!”
문득 시계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식탁에서 일어난 왕징은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이날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조금 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 * *
“헉……. 헉……. 아슬아슬하게 세이프네.”
지하철에 탑승한 왕징.
그는 턱 밑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득 시계를 보았다.
“이 지하철 놓쳤으면 진짜 무조건 지각했겠어.”
안 그래도 흉흉한 회사 분위기에 지각까지 했다가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부장의 불호령 같은 호통을 모면했다는 생각에 왕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꽉 들어차 있는 지하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미어터지는구먼…….’
비집을 틈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창가 쪽에 딱 붙어 서서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답답함을 해소하는 왕징. 그리고 그렇게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는, 문득 들려오는 당혹감 가득한 차량 내 방송 소리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승객 여러분들에게 안내합니다. 원인 미상의 소요 사태로 인해서 열차는 다음 정거장에서 정차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원인 미상의 소요 사태로 인해……. ]
“뭐야……?”
“소요 사태……? 저게 무슨 소리지?”
“아, 장난하나. 나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뭐 테러라도 일어났나?”
갑작스러운 방송에 당황한 승객들의 웅성거림. 모두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그때, 왕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거장의 모습을 창문을 통해서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헉!!!”
새빨간 피와 죽은 이들의 시체로 가득한 정거장. 그리고 그곳엔 두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흉측한 형태로 뒤틀려 있는 무언가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한 사람의 몸을 게걸스럽게 뜯어 먹으며 포식하고 있는 그런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왕징만이 본 장면이 아니었다.
“히……히이이익! 바……방금 봤어?”
“씨……씨발! 아까 저거 뭐야? 도대체 뭐냐고?”
순식간에 패닉에 빠져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사람들. 무슨 일이냐고 상황을 묻는 사람들과 더불어 겁에 질린 이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안 그래도 비좁은 지하철 안은 그야말로 완전히 난리가 났다.
“인터넷에는 아무것도 없어!”
“경찰! 경찰한테 전화해야지!”
“무슨 좀비 영화도 아니고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
현실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야말로 비(非)현실적인 상황.
만약 수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두 눈으로 보고도 아마 조금도 믿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법(魔法)이 개화한 지금의 이 세상에서는…….
이제 그 어떠한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세상이 뒤집혔다.
쿠콰콰콰콰콰콰콰.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왕징을 비롯한 모두를 휩쓸었다.
갑작스러운 탈선과 함께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무참하게 찌그러진 열차.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감히 버텨 내기 힘든 거대한 물리적 충격에 수많은 사람이 한순간에 고깃덩이가 되어 버렸지만, 왕징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아니, 지독하게도 뒤틀린 운명 속에서 살아남아 버렸다.
“쿨럭…….”
어딘가가 단단히 잘못된 듯, 피를 토해 내며 완전히 뒤집힌 지하철 안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왕징은 온 힘을 다해서 기었다.
누군지도 모를 이들의 시체를 넘으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갈라진 차체의 틈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온 그는 문득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발 하나를 발견했다.
“끄으으윽…….”
맨발로 서 있는 어느 작은 체구의 소년.
도와 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아 고통에 신음하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왕징은 너무나도 섬뜩한, 그리고 불길한 그 소년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다 죽어 가는 그 와중에서도 살아 보겠다고 어떻게든 발악하고 또 발버둥을 친다니. 너무나도 가련하게 그 비천한 삶을 갈망하는 인간이구나.”
경멸. 혐오. 증오. 분노. 멸시…….
그 어린 소년의 미소에서 왕징은 수많은 음의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리고 그 동시에 하나의 모순적인 감정마저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쾌락. 그리고 환희. 기쁨.
그는……. 분명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참으로 즐거운 순간이군.”
우우우웅.
작게 미소 지으며 손을 튕기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색의 불길한 안개. 그리고 그 안개가 사고로 죽은 이들로 가득한 지하철 내부를 휩쓸자 그는 명했다.
“일어나라. 나의 권속들이여.”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며 왕징은 핏발이 가득 선 눈을 크게 뜨며 기묘한 괴성을 질렀다.
“끄으으으윽!! 크흡!!!”
처참하게 죽은 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시체도 여럿 있었지만, 팔이나 다리 같은 어느 신체 부위가 하나씩 뜯겨 나가고, 피투성이의 보기만 해도 비명이 저절로 나올 것 모습을 한, 공포 영화 속의 좀비 그 자체와 같은 모습의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이 망가진 지하철 속을 나와 일사불란하게 도열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어느 한 소년을 향해서 말이다.
“크크크크크……. 그래. 바로 그 표정이야.”
이제는 앳된 소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존재. 그리고 그는 광기 가득한 웃음을 터트리며 왕징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그거야. 절망. 그리고 그 공포! 너의 그 비천한 목숨을 구해 주고, 너의 하찮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나설 자는 아무도 없으니. 비탄과 공포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라. 바로 그렇게 말이지. 그래야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왕징을 바라보며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
그리고 그는 이내 손을 들며 중얼거렸다.
“나를 위해 충성을 맹세할 극상의 도구로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푸욱.
“끄어어어…….”
어둠 속에서 자라난 가시.
그 가시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하자 왕징은 자그마한 단말마를 내뱉으며 알 수 없는 의미의 피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내버려 두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왕징.
하지만, 그는 모든 필멸자에게 허락되는 죽음의 안식조차 얻을 수 없었다.
“일어나라.”
우우우우웅.
그의 영혼을 강제로 옭아매고 현세에 붙들어 매는 검은색의 안개.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왕징은 전혀 다른 존재로 새롭게 재탄생했다.
칠흑의 갑옷. 묵빛의 대검. 그리고 투구 사이로 보이는 불길한 새빨간 안광.
최상위 언데드이자 혼자서 수백, 수천 명의 병사를 학살할 수 있는 공포의 기사.
데스나이트(Death Knight).
데스나이트로 변해 버린 것을 보며 소년은 이채를 띤 눈으로 중얼거렸다.
“호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한이 깊은 영혼이었나 보군? 이렇게 쓸 만한 도구로 만들어지다니 말이야.”
지금까지 자신의 권속으로 받아들인 영혼이라고는 고작 해 봐야 수백……. 아니, 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상황. 하지만 벌써 데스나이트가 탄생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소년은 말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임무를 달성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고 충성을 맹세하듯이 서 있는 데스나이트 하나와 그 뒤에 늘어서 있는 수백 마리의 좀비와 구울들을 보며 소년은 말했다.
“나의 충성스러운 권속들이여. 드디어 때가 되었다.”
철컥.
“그으으으으…….”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죽음의 무리에게 그는 명령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나를 가로막는 모든 존재를 부수어 이 세상을 온전한 공포로 물들여라.”
“죽여라. 그리고 또 죽여라. 모든 산 자에게 너희들의 끝없는 한과 분노를 보여 주어라.”
“위대하신 어둠의 군주께서 이 세상에 강림하시는 그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