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처음 조약이 만들어진 지 60년 만에 현실적인 조항들로 새롭게 개정되어 재탄생한 우주 조약.
하지만 이 조약은 아직 서명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미 조약 자체가 파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인구수에 비례해서 화성을 나누어서 국가별로 배정하도록 하죠. 인구수가 많은 국가일수록 더 많은 영토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논리 아니겠소?”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그런 제안을 하는 거요? 절대 용납할 수 없소.”
“맞소. 영토는 넓으나 인구수가 적은 국가들도 많지 않소? 그러지 말고 현 국가별 영토 크기와 인구수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서 서로의 관할권을 나누도록 하지요.”
“그러면, 영토도 좁고 인구수도 적은 국가들은 코딱지만큼의 땅만 먹고 떨어지라는 말이요?”
“그냥 공평하게 국가별로 똑같은 비율로 할당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조약을 이끌기 위해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 평소에도 여러 민감한 안건들에서는 격한 대립이 오가기도 했었지만, 이번 UN 회의에서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돌아 버리겠군…….’
정말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회의에 참석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여러 국가의 대표부들을 지켜보고 있는 미국 대사. 그리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점점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는 회의장 안의 분위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안건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는 건 아마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 신기록이겠군.’
너무 오랜 시간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만을 달리는 협상.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회의에 놓인 안건은 그 어떤 민감한 사안과도 다르게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지도 모르는 아주 중대한 사안이었기에 그 어느 나라도 조금의 양보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타협과 협상도 없이 모두가 그저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우리 미국이 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야.’
회의 시작부터 화성에 대한 그 어떤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미국. 그렇기에 그는 그저 관찰자로서 이 회의의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점점 상황은 험악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국 정부가 왜 이렇게 화성 개척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아직 자국 내의 수도 복원도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인 것으로 아는데 자국 내정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조금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고 무리한 요구만을 종용하는 중국 대표부의 태도에 잔뜩 짜증이 난 러시아 대사의 발언.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베이징 참사.
수백만……. 아니, 거의 천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만들고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심장부인 베이징이 거의 반파되었던 그 사건을 언급하며 내정에나 신경 쓰라고 대놓고 꼽을 주는 그의 발언에 중국 대사의 얼굴은 일순간 험악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러시아 대사를 바라보며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핵무기까지 모조리 잃어버리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신세인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럴 때마다 러시아 정부는 아직도 자신이 과거의 망령이 되어 버린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이제는 조금 물러서야 할 때 아니겠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적나라하게 러시아의 최근의 치욕스럽고 굴욕스러운 패전을 지적하며 받아치는 중국 대사의 말에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더더욱 싸늘해졌다.
“……. 우리 러시아의 저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게 자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좋을 거요.”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군요. 중국은 조금도 러시아의 저력을 과소평가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저력’이라는 것이 우리 인민들이 볼 때는 그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러시아를 대놓고 모욕하는 중국 대사.
그리고 그 말에 러시아 대사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으르렁거렸다.
“조심하게……. 중국 대사. 자네의 말은 마치 중국의 인민들이 우리 러시아의 저력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듯이 느껴지는군.”
“호오……. 재밌군요. 만약 그렇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대사!”
잔뜩 분노한 듯, 그 두꺼운 회색빛 수염마저 파르르 떨며 고성을 내지르는 러시아의 대표부.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신경전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여러 정부의 외교관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뭐야? 중국이 정신 나간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강하게 나오지? 그것도 러시아를 상대로.’
‘이거……. 이러다가 또 다른 전쟁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에이, 설마……. 전쟁은 무슨. 이런 사소한 사건 하나 가지고?’
‘원래 전쟁은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 하나 때문에 벌어지는 거 모르냐?’
‘둘이 싸우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겠군. 누구 편에 서야 하는 거지?’
우주 조약과 관련한 협의를 하다 돌연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두 나라 사이에서의 전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아 버린 회의.
역사적으로 되돌아봐도 이런 황당하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엄청난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켜 수백, 수천만 명이 희생되는 거대한 전쟁으로 커지기도 했기에, 이러다가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표부 중 누구 하나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가 정말 당장 다음 날 서로에게 미사일을 쏴 대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이건……. 가만히 두면 안 되겠군.’
그렇기에 지금까지 침묵을 고수하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미국 대사는 이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숨을 들이마시며 첫 마디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열린 회의실 문으로 난입한 한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간 대표부 인간 여러분. 멀린입니다.”
“머……멀린?”
“어떻게 여기에……?”
“화성에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벌써 돌아왔나?”
마법의 창시자이자 세계 최초의, 그리고 유일무이한 대마법사.
전 세계에서 압도적인 시총 1위를 자랑하는 매지컬 컴퍼니의 주인이자 화성의 개척자이자 오늘 회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존재. 멀린.
그런 그의 등장을 보며 모두가 격렬한 반응 속에서 이내 소란스럽게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이어지는 멀린의 말에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자니까 너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서 이렇게 먼~~길을 급하게 되돌아왔죠. 듣자 하니 제가 힘들게 바꿔 놓은 화성에 숟가락 올리려고 말도 안 되는 수작질을 부리는 X간 새끼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게 누구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
“…….”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멀린의 그 미소에서 식은땀이 절로 흘러나오게 만드는 지독한 불길함과 공포를 느낀 외교관들은 모두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로의 눈치만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죠. 안 그런가요? 화성 하나만 저한테 넘겨주면 나머지는 안 건들겠다고 했을 때는 전부 다 동의하고 조약에 서명할 때는 언제고, 막상 화성이 너무 탐스러운 행성으로 변하니까 절반을 넘겨줘라? 이게 인간이면 할 수 있는 소리일까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 인간 대표부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 X간이 많다고는 하지만, 설마 소위 엘리트인 여러분들마저 그런 X간 같은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죠?”
“크흐흠…….”
“흐흠…….”
멀린의 물음에 정곡이 제대로 찍힌 이들은 그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멀린의 등장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전환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중국과 러시아 대사. 그리고 그 둘은 이내 서로의 눈치를 보다 이내 조용히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미국 대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장하는 타이밍이 아주 주인공 수준이군.’
완전히 해결된 것 아니지만, 이 이상 관계가 나빠지는 것은 막은 상황.
그렇게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골칫거리를 앞에 두고 복잡한 심경으로 고민하던 미국 대사는 이어지는 멀린의 말에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 두겠지만……. 앞으로 화성에 얼씬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돈을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화성의 영토는 단 한 평이라도 넘겨주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아, 그리고 그건 설사 미국이나 한국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을 테니까 너무 불만 품지 마세요. 애초에 인간 같은 열등하고 미개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니까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성 전체를 독식하겠다고 공표하는 멀린.
그리고 그건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예외가 없을 거라는 말에 내심 자신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일부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미국 대사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그러면 도대체 화성은 무슨 용도로 활용하려는 겁니까?”
그 누구에게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거기서 뭘 할 생각이냐고 묻는 미국 대사의 질문에 멀린은 잠깐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우로보로스의 학생들을 비롯해 일부 인원들에게 아주 제한적으로 화성에 잠깐 방문하는 걸 허용할지는 아직 고민 중이에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화성을 가져다가 뭘 할 생각은 특별히 없어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둬야죠.”
“행성 전체를……. 말입니까?”
감히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그 어떤 재화로도 매길 수 없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화성. 단순히 자원적 가치를 넘어서 어마어마한 전략적, 상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이 화성을 독식해 놓고 아무것도 안 할 거라는 멀린의 말에 미국 대사의 얼굴은 복잡하게 변했다.
“네. 애초에 그곳은 저도, 그리고 여러분의 것도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화성의 주인은 따로 있어요.”
“???”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죠.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공간을 넘어서 화성에 새롭게 정착하게 된, 우리의 이웃이 될 이주민들이죠.”
따악.
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튕기자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한 인영.
두꺼운 후드를 쓴 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내 천천히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격양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크흡……!!!”
“이럴 수가……. 저건 도대체…….”
“말도 안 돼…….”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과는 분명 다른 종족.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뾰족한 귀가 솟아 있는 그녀를 보며 모두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아세요? 모든 창생의 순간은, 하나의 나무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요?”
위그드라실, 세계수, 가이아, 세피로트의 나무……. 수많은 신화 속에서 우리도 그 존재를 분명하게 인지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수.
영맥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는 분명 허락되지 않은 ‘개념’이었기에 어렴풋한 신화 속의 이야기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화 속의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나무는 언제나 숭고한 수호자들의 보살핌을 받죠. 특히 허락도 없이 불법적으로 침입해서 뭐 먹을 거 없나 괜히 이곳저곳 찔러 보는 개념 없는 X간 새끼들의 대가리에 바람구멍을 무자비하게 뚫어 버리는 데 아주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 말이에요.”
세계수의 수호자이자 숲의 일족인 엘프.
그 엘프의 일원 중 하나를 데려와 전 세계의 대표부들 앞에 만천하에 내놓은 멀린이었다.
“반갑습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여. 위대한 어머니의 뜻을 전달하는 숭고한 임무를 받은 푸르른 잎사귀 일족의 일곱 번째 가지. 아스테리아입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아스테리아.
내가 미리 전달해 준 마법 통역기 덕분에 그녀의 말을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똑똑히 전달될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리 이웃 주민이 된 엘프들을 환영하는 건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화성에 새롭게 탄생한 국가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이들을 우리 UN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논의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엘프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신생 국가. 엘븐 킹덤(Elven Kingdom)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