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멀린이 소환한 세계수에 의해서 하루하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어마어마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화성. 본래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죽음만이 가득한 황량한 행성이었지만, 그러한 세상이 세계수의 막강한 권능에 의해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자 전 세계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 최근 화성과 관련해서 떠돌던 소문이 모두 사실인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정부가 공개한 화성의 사진을 보면, 여기 보이는 이 초록색이 전부 엄청난 규모로 돌연 자라난 나무들로 인해서 형성된 숲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규모만 무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
[ 또한, 이런 화성의 변화를 만들어 낸 구체적인 경위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처럼 멀린이 극비리에 홀로 화성으로 향한 것이 사실이며, 그로 인해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
[ 화성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뒤바꾸겠다고 공언하던 엘런 더스크. 3년 이내로 행성 개조를 이루겠다는 그의 말을 전 세계가 비웃었지만, 불과 3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말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마법이 가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 화성.
그곳을 고작 3년 동안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엘런 더스크의 공언에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생태학자들과 우주 관련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단언했지만, 이들의 말에 대한 신뢰도는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무참히 깨어졌다.
- 혼자서 화성의 테라포밍을 마무리했다고……?
- 진짜……. 어케 했누…….
- ㅋㅋㅋㅋㅋㅋ. 전문가들 모조리 꿀 먹은 벙어리 행.
- 그렇게 절대 불가능하고 입에 거품 물면서 뭐라고 하더니 진짜 더럽게도 쪽팔리겠다.
- 이건 인류애적으로 봐줘야지. 솔직히 어떤 미친놈이 그 말을 진지하게 들었겠음?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새 하루아침에 이웃 행성인 화성이 지구와 비교해 봐도 조금도 꿀릴 것 없는……. 아니, 어쩌면 더욱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의 정착 가능한 행성으로 변화해 버린 상황.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어떻게 됐나……?”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오는 국무장관을 힐끔 바라보며 일이 잘 안 풀렸다는 것을 직감한 레너드 대통령이 먼저 물어 오자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며 답했다.
“매우 난감한 상황입니다. 대통령님. 새롭게 개정된 우주 조약의 협약국 114개국 중 저희와 한국을 제외한 112개국 모두가 조약의 재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멀린의 강력한 의지 속에서 미국과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최근 새롭게 개정된 우주 조약. 하지만 조약이 개정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이 상황을 보며 미국을 향해 전 세계에서 엄청난 항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 화성을 완전히 테라포밍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멀린과 미국 정부는 기존 우주 조약의 개정을 밀어붙였습니다. 이건 자신들이 화성 전체를 모조리 독식하기 위해 이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인 거대한 사기극입니다! ]
[ 일개 한 개인이 가장 전략적인 가치가 높았던 하나의 행성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우리 인류의 첫 번째 식민지 행성으로 유력한 후보였던 화성을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어느 특정인에게 빼앗기는 일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그리고 보편적인 인류 공공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당장 불의에 결연히 맞서야 합니다. ]
[ 우주 조약의 즉각적인 새로운 개정과 동시에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분쟁에 대비해서 화성의 관리와 활용에 있어서 초국가적인 국제적 합의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보입니다. 이러한 논의를 미국 정부가 반대하거나 무산시키려고 한다면, 우리 정부는 필요하다면 조약의 탈퇴까지도 고려할 것입니다. ]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 심지어 캐나다와 호주까지.
미국의 적성국이나 동맹국 할 것 없이 모두가 새롭게 개정한 우주 조약을 문제 삼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러한 전 세계의 정부 지도자들이 바라고 있는 요구 사항을 들으며 레너드 대통령은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한 개인이나 국가가 한 행성에서 소유하거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의 최대치를 설정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조약에서는 점유권과 소유권의 기준인 ‘행성의 개척 및 생명체 생존의 필요한 환경 구축’만을 명시했을 뿐, 그 어떠한 제한도 두고 있지 않았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자는 데에 여러 국가가 뜻을 모은 상황입니다.”
공정한 경쟁. 평등한 분배. 독식 반대.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였지만, 이들이 원하는 요구 사항은 간단명료했다.
‘치사하게 너네만 다 먹지 말고 나도 좀 숟가락 좀 얹게 해 줘라.’
“50%라……. 다시 말해서 행성의 절반은 자기들한테 양보하라는 말이군.”
“그런 셈이죠.”
자기들 딴에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제시한 제안.
하지만, 그 제안을 듣는 레너드 대통령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화성의 변화와 관련해서 자기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서 행성의 절반을 자기들 몫으로 내놓으라니……. 이거 도둑놈 날강도들이 따로 없군.”
“게다가……. 설사 우리가 그 조건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멀린 그 녀석이 받아들일 리가 없을 텐데? 이미 우리에게도 화성은 자기 것이니까 조금도 넘보지 말라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상황인데 인제 와서 저렇게 터무니없는 생떼를 부려서 또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너무나도 확고하고 강력한 멀린의 태도에 미국 정부조차도 감히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화성. 물론, 미국이라고 솔직하게 저 방대한 주인 없는 새로운 식민지 행성에 욕심이 안 난다고 말하면 그건 분명한 거짓말이겠지만, 지금까지 멀린이 보여 주었던 수많은 행보를 보며 레너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 각료들의 머릿속에는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고작 20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라고 얕보고 무시하면서 그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심각한 후폭풍이 불어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나라를 망하게 하고 싶으면 멀린의 면전에다 대놓고 엿을 날려라. ]
[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백배, 천배로 되갚아 주는 치졸하고 쪼잔한 성격의 소유자. ]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지. 그게 바로 멀린이야. 차라리 핵미사일 스위치를 누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를걸?]
워싱턴 정가에서 은밀하게 퍼지고 있는 멀린과 관련한 여러 우스갯소리 같은 농담들. 하지만 레너드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그러한 농담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이미 자기들끼리 김칫국을 잔뜩 들이켜며 아주 대환장 파티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보며 그는 말했다.
“이 사실이 그 녀석 귀에 들어가면 또 한바탕 소란스러워지겠군.”
“아무래도 그럴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레너드 대통령의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국무장관.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설득하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새롭게 변모한 화성에 조금이라도 숟가락을 얹어 보려고 다 차려진 잔칫상을 기웃거리는 다른 나라들을 보며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이상은 없었다.
그저…….
“우리 미합중국 정부는 화성에서의 그 어떠한 영유권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새롭게 개정된 우주 조약을 존중하고 이를 지킬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게. 이왕이면 화성을 새로운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행성으로 만들어 낸 멀린에 대한 찬사를 담은 내용도 잔뜩 넣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괜히 미국 정부에게도 이상한 불똥이 안 튀도록 다른 국가들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 * *
판타지 세계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종족. 엘프.
숲의 일족이라고 불리며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고, 평생을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분명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지만, 인간들과는 분명히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외모 자체는 저세상 외모네.’
남자고 여자고,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종족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저마다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는 이들.
진지하게 지구의 연예계에 데뷔한다고 한다면 농담이 아니라 전 세계를 씹어 먹을 정도로 엄청난 분위기를 풍기는 페이스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도 하이 엘프인 엘리시아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저한테 뭐 하실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 오는 엘프 여왕 엘리시아.
그저 나에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도, 미친 듯이 심장을 뛰게 만들고 무언가 묘하게 설레는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상황.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이 상황에 그저 헤벌쭉 웃으며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나는 전지의 권능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을 가라앉히며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아, 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했네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던 말을 이어서 하는 엘리시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사방에 뿜어 대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자연의 축복을 받고 탄생하는 엘프들의 기본적인 특성이 매혹이라 이건가……?’
단순한 외모에서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체라면 당연할 정도로 본능적인 영역에서 호감을 느끼고 반하게 만드는 매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엘프. 일반적인 동식물들은 자연스럽게 이들을 따르고 도와주는 것은 그저 외형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생명체라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매력을 보유한 엘프. 그렇기에 인간들 사이에서 괜히 엘프를 두 눈으로 직접 만나 보게 되면 다시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진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면 팬덤은 장난 아니겠네.’
농담이 아니라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팬을 보유하는 전 지구적인 대스타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저 고귀한 숲의 일족이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특히나…….
“인간들 때문에 일족 전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었다고요?”
“네. 제가 이끄는 일족 모두가 그랬었죠.”
인간에게 제대로 당한 전적이 있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보통 우리 잎사귀들의 일족들은 철저하게 은둔하는 생활을 고수하죠. 하지만, 간혹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들을 비롯해 다른 이 종족과 교류하는 때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있는 일족이 그랬었죠. 하지만 그건……. 우리 일족이 내린 정말 어리석은 결정이었죠.”
배신.
나름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교류하고 있던 인간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자신들이 터전으로 삼은 마을의 위치 정보를 알아내 어느 날 갑자기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다는 엘리시아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강렬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지 않았어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노예로 삼아서, 비싼 값에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팔아넘겼죠. 마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늙지 않고 일평생 아름다운 외모로 살아가는 엘프.
그렇기에 그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쇠사슬에 묶여 노예이자 노리개로 전락한 신분으로 인간들의 손아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럽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녀와 그녀의 일족이었지만, 이들 모두는 지금 이 화성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사실 저를 비롯해 일족의 일원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혼란스러워하고 있어요. 어떻게 죽어서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간 우리가 다시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께서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지. 그 어느 하나 이해되는 것이 없죠.”
도대체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수히 많은 판달리아의 시간선 중에서 어디서 굴러다니는 세계수 하나를 뽑아다가 이곳 화성에다가 심어 버린 듯한 이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미 죽어 버린 이들까지도 시간선을 되돌리며 부활시켜 버린 모양새였다.
‘하여간 사기적이라니까…….’
새삼 이브가 가진 초월적인 힘을 뼈저리게 느끼며 속으로 투덜거리는 순간, 엘리시아는 나를 바라보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우리 일족 모두에게 어머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 있어요.”
“그 무엇이든, 당신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르라고 했죠. 당신은…….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우리 일족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인간이라고 하셨죠.”
인간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런데도 그런 이들에게 인간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린 세계수.
하지만 엘리시아는 이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를 표하며 말했다.
“만물의 어머니의 뜻을 대신하는 숲의 생명의 사도시여. 푸르른 잎사귀 일족은 마지막 숨결을 내뱉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곁에서 함께할 것이며, 그대의 뜻에 언제나 순종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부디……. 우리 일족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그렇게…….
나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화성을 든든하게 지켜 줄 충성스러운 문지기들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