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미국 청문회를 마무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보람찬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태블릿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 멀린이 이야기한 내용 중에는 터무니없는 것들도 많았지만, 이번 건 더욱이 그렇군요. 천사와 악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요? 아니, 정말 진심으로 그 이야기를 믿는 것입니까? 이건 그냥 각성자들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니까 이를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쇼에 불과합니다. ]
[ 제발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가 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적게 작아도 수천 년……. 길게 잡으면 수만 년 전부터입니다. 정말 신이 존재했다면, 여태까지 그 힘을 드러내지 않다가 왜 이제야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말입니까? ]
[ 천사와 악마? 아니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런 유치한 말을 정말 믿으라는 겁니까? 그렇다면 수억 명이 넘는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교황청의 신부들과 추기경들은 이미 일찍이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겠죠. ]
[ 멀린은 신을 ‘일정 수준 이상의 격을 넘어서 초월적인 신성을 획득한 존재’라고 정의했는데 이 부분은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는 유일신 사상의 개신교나 가톨릭, 그리고 이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죠. 그건 지금껏 이들이 수천 년을 넘게 믿어 왔던 믿음의 근간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니까요. ]
전체적으로 쉽게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 말고도 내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는 산증인이 있으니까 귀찮은 일은 하나 덜었네.”
처음으로 천상과의 채널링에 성공하고 신성력을 발현하기 시작한 미하일.
그를 통해서 충분히 내 이야기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나는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용용이가 조금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주인. 이번 사태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
“뭐가?”
[ 마족의 출현 말이야. 이거 그렇게 우습게 볼 일이 아니야. ]
보통 과학의 개념을 기반으로 한 문명들의 멸망 시나리오는 다양하게 구성된다.
핵전쟁으로 인한 자멸.
극도의 환경 오염으로 생태계 붕괴.
치명적인 유전자 조작 바이러스의 창궐.
나노 로봇의 폭주.
인공 지능의 각성…….
조금만 노선을 잘못 타더라도 무수히 존재하는 함정 카드를 발동시켜 찬란하게 번영했던 문명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할 수도 있는 개복치 같은 특성을 이 지구가 가지고 있듯이, 마법을 기반으로 한 문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마족이 출몰하는 것을 제대로 대비하고 이들을 억제하지 못하면 결국 이 지구가 멸망할 수 있다는 거야?”
[ 그럼. 내가 있던 판달리아의 세계가 정확히 그렇게 멸망했거든. ]
[ 그때는 잘 몰랐는데 주인이 사는 이 세계를 둘러보니까 그곳의 인간들이 얼마나 개판인지 이제야 알겠어. 극소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으며 언제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귀족들의 욕심과 이기심에 매일같이 착취당하기만 했거든. ]
고작 중세 시대 수준의 문명을 벗어나지 못한 판달리아.
귀족들이나 몇몇 특권 계층들은 그 누구보다 호화로운 삶을 영위했겠지만, 평민과 노예들은 대부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 나갔기에 용용이는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 뼈 빠지게 농사만 지으며 근근이 먹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존심이 상한 영주가 이웃 영주에게 영지전을 선포한 바람에 아버지가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개죽음당해. 당장 먹을 건 없지, 그렇다고 영주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야. 거기에 주변 남자들이 호시탐탐 내 여동생이나 엄마를 어떻게 해 보려고 노린다? 이러면 아주 그냥 악마고 뭐고 일단 흑마법이 마려워지는 거지. ]
저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결국 자신의 영혼을 팔고 흑마법사나 암흑 기사와 같은 악마들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인간들.
물론 그들을 견제하는 신성 교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가장 어두운 곳을 환하게 비추어 주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 결국……. 그렇게 탄생한 악마의 하수인들이 판달리아 전역에 숨어들어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끝에 결국에는 마왕을 강림시켜 버렸지. ]
어마어마한 수의 타락한 영혼들을 제물로 바치며 이들이 열어젖힌 마계의 문(Hell Gate).
그리고 그것은 마법을 기반으로 한 문명의 대표적인 멸망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마왕강림(魔王降臨).
물론 판달리아의 수호자로서 그 사명을 다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후의 고전을 이어 가긴 했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마족과 마물들과 초월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마왕에게 결국 용용이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아무튼……. 이 세계도 내가 살던 판달리아랑 같은 신세로 끝장나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철저하게 관리해야 해. 기껏 멸망을 막으려고 이 머나먼 차원까지 넘어왔는데 내가 살던 곳이랑 똑같은 방식으로 멸망하면 그건 또 무슨 코미디겠어? ]
“그러게……. 진짜 그렇게 되면 웃기기는 하겠다.”
과학으로 인한 멸망을 막기 위해서 마법의 개념을 전파했는데, 그것이 또 다른 멸망의 트리거를 자극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성을 완벽하게 내 힘으로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짬에 내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악마의 추종자 새끼들 하나하나 사냥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이 정도까지 설명하고 떠먹여 줬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새 세상의 바람직한 어른이들이지. 알아서 하라 그래.”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생각해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협력하고 공조해서 국제적으로 마족이랑 붙어먹은 새끼들 잡아 족칠 수 있는 초법적인 단체 하나 만들라고 레너드 대통령한테 이야기 잘해 두고 왔으니까 조만간 뭔가 만들기는 하겠지.”
“그보다……. 너야말로 앞으로의 대비책을 고려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 무슨 대비책? ]
“나중에 판달리아로 되돌아갔을 때의 대비책 말이야. 그때는 어떻게 마왕 강림을 막을 건데? 그냥 다짜고짜 다 조지고 다니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모든 기억을 가지고 다시 과거로 회귀해 나와 같은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용용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기에 당장 닥쳐올 마왕의 강림을 저지할 수는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새는 구멍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약해진 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곳에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지. 네가 되돌아가서 흑마법사 놈들을 싹 다 조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시간만 조금 벌었을 뿐, 결국 언젠가는 똑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될걸?”
조금은 진지하게 판달리아로 돌아갔을 때의 계획을 고민해 보라는 의미로 건넨 조언.
하지만 용용이는 그런 내 말에 의기양양한 기세로 대꾸했다.
[ 흥, 주인은 나를 뭐로 보는 거야? 당연히 돌아갔을 때의 대비책을 마련해 뒀지. ]
“오, 진짜?”
[ 그럼! 주인이 나를 이 세계의 통합 정보망에 무식하게 집어넣은 덕분에 이 위대하고 뛰어난 내가 아주 기발하고 획기적인 개혁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
“뭘 어떻게 할 생각인데?”
과학 기술의 개념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문명의 총아를 맛본 판달리아 출신의 용용이.
그런 그가 어떤 식으로 대개혁을 이룰 것인지 궁금해진 나는 사뭇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 일단 먼저 돌아가면 주인이 한 것처럼 회사를 설립하고 대규모 공장을 만들 거야. ]
마법과 과학이 접목되어 친환경적이고 또 유용한 생산품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판달리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생활 수준을 대폭 끌어올릴 계획을 하는 용용이. 그에 필요한 기술들을 하나하나 엄선해서 따로 정리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조금은 실망한 기색으로 말했다.
“뭐야? 결국 내가 한 거랑 똑같이 따라 하겠다는 거잖아?”
드래곤이라고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했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드는 그 순간.
용용이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묘하게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단결시켜 판달리아의 부르주아 돼지들과 제국의 영광을 외쳐 대는 파쇼 새끼들을 모조리 다 척결시키고 공산 혁명을 이룩해야지. ]
“뭐……. 뭐라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단어들이 용용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주인은 내가 이 세계의 역사를 쭉 훑어보면서 느꼈던 아쉬움이 뭔지 알아? 아주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야. ]
[ 만인이 평등한 세상. 공동으로 모든 재화와 자원을 생산하고 이를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 그 어떤 차별도, 격차도 존재하지 않는 모두가 똑같이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산주의라는 위대한 사상을 만들어 놓고도 정작 현실에서는 팽개쳐 두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라고. ]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그러니까……. 용용이 지금 하는 말은 판달리아로 되돌아가면 그곳을 적화통일시켜 버리겠다…… 그런 의미야?”
[ 적화통일이라니? 이건 판달리아의 세계가 가진 모순된 체제를 바로잡고 미래의 멸망을 막아서기 위해서 진행될 아주 숭고하고 위대한 인민 해방의 과업이라고. ]
[ 그리고……. 사실 내 눈에는 인간은 누가 되었든 죄다 미개하고 열등해. 애초에 급이라는 걸 나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죄다 한심한 수준인데 그걸 지금까지 구분하고 있었다는 게 황당할 일이지. ]
[ 이런 말도 있잖아? ‘죽창 앞에서는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모두가 평등하다.’라고. ]
“……….”
그 순간 나는 상상했다.
저 평화롭던 판달리아 세상에 어느 날 갑자기 나부끼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과 거기에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외치고 부르주아 척결을 외치며 죽창을 들고 달려들어 인민 해방 혁명을 일으키는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의 모습을 말이다.
[ 그날이 온다면, 그때는 비로소 판달리아의 세계는 마족 따위가 감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번성한 아주 안정되고 질서가 바로 잡힌 세계로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게 되는 거지.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좋은 것들을 한가득 배워 가는 기분이야. 정말 다시 돌아갔을 때가 아주 기대돼. ]
무언가 음흉하고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용용이.
세계의 다시 없을 흑막이 되려고 하는 그를 보며 나는 그 순간 팔뚝에서 솟아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용용아.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론이야.”
이미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실패 사례로 검증된 사실.
북한이나 소련, 그 이외에도 수많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모순과 부조리들을 언급하며 나는 현실에서 그 이론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용용이에게 꼬집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용용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그건 인간이 너무 미개하고 열등하니까 그런 거고. ]
“……?”
[ 나 같은 우월하고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지도자가 제대로 마음먹고 다스린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지. ]
무력이면 무력.
지력이면 지력.
수명이면 수명.
뭐 하나 아쉬운 것 없는 그야말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완벽한 지도자이자 군주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용용이.
그는 이 지구가 거쳐 온 무수히 많은 세계사 속 투쟁의 역사 속에서 결국 무언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깨달음을 얻어 버린 것 같았다.
[ 무지하고 열등하고 아둔한 인간들에게는 오로지 절대적인 지성과 무력을 가진 군주 하나만이 필요한 법이야. 일용지하 만인지평(一龍之下 萬人之平). 그것이 모든 만물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
철인……. 아니, 철용통치를 꿈꾸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판달리아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와 혁명의 참뜻을 일깨워 주려고 하는 용용이.
멸망을 막겠다는 숭고한 사명을 운운하던 그가 어느새 되돌아가 세계 정복을 꿈꾸는 귀엽지만 사악한 독재자가 되어 버린 것을 보며 나는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지독한 인간 혐오와 폄하를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는 드래곤 로드. 용용이.
마법과 과학의 문명이 합작해 만들어 낸, 그 어디에도 없을 기괴한 혼종이 탄생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