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수십 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던 독재자. 블라디미르 보리스.
그 누구도 원한 적 없는 소련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을 일으킨 그는 터무니없는 야망과 섣부르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전 세계를 혼돈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광기 어린 지배자로 평가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러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사 속에 영원한 악인으로 남아 온갖 오명과 모욕을 받게 될 인물.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그 자그마한 나비의 날갯짓은 그 누구도 상상한 적 없는,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도 이룩해 낼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끌어내게 되었다.
[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인 구스타프 대통령이 오늘 공식적으로 멀린이 제시했던 종전 협상에 필요한 선제 조건을 일괄 수용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전량 폐기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왔는데요……. 교수님. 이게 정말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
[ 러시아 보유한 핵무기의 수만 자그마치 4,000기가 넘습니다. 그 이외에도 비밀리에 비축하고 있는 핵무기가 더 있다고 가정하면 그 이상일 것이고요. 일부도 아니고 전량을 폐기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핵보유국의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인데……. 전쟁을 일으켰던 보리스 대통령이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구스타프 대통령은 아예 정신이 나가 버린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짓입니다. 아무리 구스타프 대통령이 보리스 대통령이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하려는 광기 어린 행보를 막으면서 권력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그랬다가는 정말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내란 행위로 끌어내려질지도 모릅니다. ]
핵무기를 전부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혀 온 구스타프 신임 대통령.
수많은 전문가가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라며 입을 모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등장하자 이들은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 만약에……. 정말 만약에 러시아가 모든 핵을 포기한다는 그 약속을 이행하겠다면, 미합중국 역시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무기를 전량 폐기할 의향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은 삼가겠지만, 이러한 논의가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백악관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입니다. ]
미국의 어느 고위 관계자로부터 흘러나온 터무니없는 찌라시 같은 소문. 하지만 이것이 정말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 정치와 외교를 다루는 학계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저기 저 교수님은 참 부끄럽겠어요. 며칠 전에는 러시아가 핵을 포기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면서 만약 그런다면 학계 은퇴하겠다면서 호언장담하더니 오늘은 아주 꿀 먹은 벙어리네요.”
TV에 나와서 일전에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으려고 아주 진땀을 뻘뻘 흘려 대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한 정치 외교학과 교수. 그가 어떻게든 앞으로 벌어질 국제 정세를 예측하려고 아무 말이나 떠들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중얼거리자 아영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에게 투덜거렸다.
“여기서 한가롭게 TV나 보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뭐가요?”
“아니, 지금 TV에 나오고 있는 저 상황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일인데요? 너무 무사태평하게 한국에 죽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렇죠.”
미국과 러시아의 핵 포기 선언.
비단 두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아니, 이 지구 전체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아주 역사적이고 세기말적인 그런 사건이었기에 이미 관련 업계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조차 관심 있게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 미국이랑 러시아가 핵을 포기하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거냐?
- 그러게……? 이참에 다른 나라도 전부 핵 포기하면 안 되나.
- 북한이나 중국이 그럴 리가. 아마 이 기회에 자기가 짱 먹으려고 할 텐데?
- 아니, 그런데 미국이 핵 포기하면 안 되지. 그럴 거면 일단 북한부터 처리하든가.
지구 전체를 수십 번은 더 멸망시켜도 될 정도로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두 나라의 비핵화 선언을 두고 찬반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 전혀 관련이 없는 한국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꽤 무시 못 할 정도로 튀어나오는 수준이었기에 미국이나 러시아 내부에서의 반대 여론은 말해 봤자 입만 아플 정도로 당연히 무지막지했다.
[ 핵이 아니면 죽음을! ]
[ 압도적인 무력은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위한 수단이다! 핵은 절대적인 필요악! ]
[ 과대망상에 빠진 평화주의자 레너드 대통령은 당장 물러나라! ]
총기가 합법인 나라 아니랄까 봐 시위 하나도 화끈하게 벌이고 있는 핵 포기 반대를 외치고 있는 미국인들.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진 텍사스의 경우에는 더블 배럴 샷건으로 중무장한 무장의 시위꾼들이 도시 시청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꽤 심각했다.
“뭐라도 나서서 좀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레너드 대통령은 다음 선거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인데 이러다가 민주당 쪽에서 핵 포기 반대를 내걸면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
이지스 시스템이라는 완벽한 국가 방호 시스템을 제안하고 동시에 은근한 협박(?)을 섞어서 레너드 대통령과 구스타프 대통령을 설득한 상황. 하지만 내가 제안한 세부적인 내용이 대내외적으로 전부 공개된 것은 아니었기에 혹시라도 정치적 이유로 관련 협상이 무산되지 않을까 아영은 여간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래서 지금 도와주고 있잖아요.”
“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에밀리가 그러던데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게 도와주는 일이라고요. 세부적인 평화 협정도 저를 대신해서 알아서 잘 처리해 줄 테니까 가만히 굿만 보고 떡이나 먹으라고 하길래 지금 열심히 그러고 있죠.”
“아…….”
내 말에 무언가 이해가 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아영.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방송을 통해서 토해 낸 말 한마디가 무슨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멀린 님이 직접 입을 열기 시작하면 상황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죠.”
아마 모르긴 몰라도 미국과 러시아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핵보유국 모두에게 지금 당장 핵을 내놓지 않으면 죄다 강제로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 당장은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요.”
“왜요?”
“너무 과하게 무리를 했거든요. 앞으로 최소 이 주 정도는 마나를 끌어 올리면 안 되는 상태라서 저도 나름대로 조심해야 하긴 하거든요.”
고작 5 서클의 중급 마법사 수준의 경지로 8 서클의 초월 마법을 사용한 후폭풍.
다행히 마나 폭주로 심장이 터지거나 마나 회로가 완전히 파괴되어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최소 한 달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굳이 대중 앞에 나서서 위험한 상황을 만들거나 자초하지 않고 나름대로 몸을 사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건 알겠어요. 그런데 요양을 할 거면 집안 침대 이불 속에서 하시지 꼭 하필이면 제가 있는 여기에까지 와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본인의 집무실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까먹으며 TV를 시청하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눈초리로 째려보며 아영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는 팩트로 나를 두들겨 팼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지금 결재받으려고 들어온 임원들이 멀린 님 보고 당황해서 의아한 눈초리로 절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상황이 몇 번째인지 알기나 하세요?”
“게다가……. 쉴 거면 좀 얌전하게 앉아서 쉬는 거면 말을 안 해요. 무슨 인간이 대낮부터 파자마 차림으로 베개까지 들고 찾아오는 건데요? 아예 소파에 드러누워서 과자 부스러기나 잔뜩 흘리면서 먹고 있으면 저보고 일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지금 누구는 쏟아지는 일거리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매일같이 일만 하는데, 누구는 아주 태평하게 누워서 TV나 보고 있으면 이거야말로 아주 능욕…….”
나한테 쌓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는지 한숨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 내는 아영.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나도 찔리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 한 무더기를 집어 들었다.
“지……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가져가자 순간 당황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아영이 물어 오자 나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왜요. 아영이 바빠서 쉴 틈도 없이 일만 하고 있다면서요. 이왕 여기 온 김에 이참에 일이나 좀 도와주도록 하죠, 뭐.”
“멀린 님이……. 제 일을 도와준다고요?”
“왜 그런 이상한 눈으로 봐요? 명색이 저 이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지켜보기만 하는 아영.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내 업무 능력은 생각보다 출중했다.
“여기 이 보고서요. 작년 분기에 제출된 회계 자료랑 숫자가 안 맞는데요?”
“뭐라고요? 어디요?”
“여기요. 탄자니아의 광물 채굴로 들인 비용이 2400만 달러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에는 2100만 달러라고 적혀 있잖아요.”
“어머, 그렇네요. 이걸 왜 놓쳤지?”
“그리고 이거랑 이거, 그리고 요거랑 요것도 좀 다시 검토하고 확인해 보라고 하세요. 신규 사업으로 잡은 것치고는 꽤 추정 예산 요구액이 많은데요?”
비록 위에 잡히는 몇 개의 서류만을 검토한 것이 전부지만, 생각보다 신속하고 또 날카롭게 보고서의 문제를 잡아내자 아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예요……? 왜 이렇게 일을 잘하는 건데요?”
“제가 봐 본 보고서가 몇 개인데요? 이 정도야 뭐 완전 껌이죠.”
과거에 그래도 꽤 알아주던 기업의 회사원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짬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나는 처음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처음으로 나를 경외심과 존경심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아영. 그리고 그녀는 이내 코맹맹이와 비슷한 비음을 섞으며 묘하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을 해 왔다.
“그러면……. 혹시 이것들도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 한 뭉텅이를 내미는 아영.
평소라면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을 귀찮은 부탁이었겠지만,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상황 속에서 밀려드는 심심함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서류들을 집어 들며 말했다.
“얼마든지요.”
* * *
하루가 다르게 몰라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 매지컬 컴퍼니.
기존의 산업에서 마법적 개념과 기술이 가미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그 사업 구조와 특성 때문인지 아영이 처리하고 있는 보고서의 내용은 온갖 전문적인 지식이 가미되어 있는 데다가 그 업종마저도 천차만별이었다.
‘생각보다 꽤 검토하기 까다로운 내용이 많네…….’
내가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피곤했는지 완전히 곯아떨어져 달콤한 낮잠을 한껏 즐기고 있는 아영.
그런 그녀를 잠깐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나는 빠른 속도로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어느 서류에 적혀 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용 처리 항목에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10억이나 되는 돈을 기부금으로 냈다고……?”
10억.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고 할 수 있는 비용.
하지만 그 비용이 들어간 곳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초록빛 지구를 지키기 위한 환경보호에 힘쓰는 청년들의 연대……?”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괴상한 이름을 가진 시민 단체.
매일 나한테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투덜거리던 아영이 이런 곳에다가 10억이나 되는 돈이 매지컬 컴퍼니의 운영 자금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에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단잠에 빠진 아영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만날 나한테 돈을 허투루 쓴다고 잔소리하시던 분이 10억을 태우셨다……?”
우로보로스를 이전하기 위한 천공섬 하나 만들겠다는 것 하나에도 입에 게거품을 물면서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기나 하냐면서 극구 반대하고 나섰던 아영.
그런 그녀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10억이나 되는 돈을 썼는지 궁금해진 나는 그 영수증 항목이 적혀 있는 종이를 따로 빼내고는 이내 밀려드는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어디……. 얼마나 가치 있는 단체인지 알아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