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주한 러시아 대사 안드레이 페트로프.
그는 겉으로 보기에 후덕한 덩치에 서글서글하고 인자한 인상이었지만, 그런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가 가진 이력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 KGB 출신. 안드레이 페트로프. 대충 살펴봐도 어마어마한 양반인데? 전성기 시절에는 혼자서 수십 명을 맨주먹으로 모조리 다 때려눕힐 정도였네. 단독으로 수행한 비밀 작전도 60건이 넘어가고…….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라 그냥 살인 병기 그 자체야. ]
일반적인 외교관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정보기관 중 하나인 KGB의 요원이었던 페트로프. 비록 세월의 풍파를 겪은 그의 몸은 예전처럼 단련된 상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그의 눈빛과 기세는 여전히 날카로웠기에 나는 그가 그리 쉬운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처럼 분위기가 흉흉한 시기에 이렇게 직접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듣던 대로 예측 불허한 인물이군.”
나를 파악해 보겠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페트로프. 그가 먼저 침묵을 깨고 한마디 입을 열자 나는 배시시 웃으며 화답했다.
“원래 제가 좀 꼴리는 대로 하는 성격이거든요.”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가 우리 러시아와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마법 입국 선언을 통해 이미 내가 미국과 손을 잡고 아주 친밀한 사이라는 것이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밝혀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최대 안보 위협이자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를 제 발로 찾아가 만남을 요청하는 짓은 그야말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았다.
“달가워하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요? 게다가 저는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이 오로지 100% 순수한 개인의 신분으로 여기를 찾아온 거예요. 혹시라도 저를 통해서 미국이랑 협상한다거나 제가 하는 말이 한국 정부의 뜻을 대변한다느니 하는 이상한 착각을 한다면 곤란해요.”
미국과 한국 정부와는 철저히 선을 긋겠다는 내 말을 곧장 이해한 페트로프는 이내 피식 웃으며 조금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좋네. 그렇다면 나도 러시아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아닌 평범한 한 명의 개인으로서 조금은 편하게 대하도록 하지.”
국가와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의 신분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해 보자는 페트로프의 제안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보리스 대통령님과 직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네.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시죠?”
이미 내가 러시아 대사관에 등장했을 때부터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지 눈치채고 있었던 페트로프.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최근에 시작된 우크라이나에서의 특별 군사 작전 때문이라면 보리스 대통령님과의 대화는 어려울 것 같네. 자네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그건 우리 러시아의 안보와 억압받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통령님께서 어쩔 수 없이 내린 불가피한 조치…….”
러시아의 유구한 역사를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페트로프.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미소와 함께 경고했다.
“우리 괜히 귀중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본인조차도 믿지 않는 그 같잖은 명분 늘어놓고 있으면 솔직히 좀 양심에 찔리지 않으세요?”
“…….”
“기본적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미국과 유럽 연합을 비롯한 서방 세력에 기존 공산권 국가들이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느낀 위기감과 패배감. 그리고 과거 전 세계를 호령하며 미국과 더불어 가장 강력했던 소련의 옛 과거에 대한 향수 속에서 비롯된 뒤틀린 욕심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요?”
경제적으로 무너져 가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과 다르게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풍족함을 과시하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 이들이 내미는 자본에 홀린 동유럽 국가들이 하나둘씩 넘어가기 시작하자 급속도로 축소된 러시아의 영향력과 더불어 NATO의 동진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는 이번 전쟁을 통해 확실한 본보기로 삼을 속셈이었다.
“이번 전쟁을 시작한 진짜 이유는 딴생각하는 주변국들에 경고 메시지를 전해 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 어떤 이유로도 러시아를 배신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우크라이나와 같이 국가 전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꼴이 될 테니까.’라고 말이죠.”
“이 기회에 과거 옛 소련 시절의 영토도 수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게 바로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형국이 아닌가 싶은데요? 문제는 이게 러시아 국민 전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강력한 의지와 열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죠.”
러시아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독재자 블라디미르 보리스. 해외로 도주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방사능으로 독살하는 기상천외한 짓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이번 전쟁을 시작하게 된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게다가 제가 볼 때 보리스 대통령은 절대 우크라이나 하나만으로 만족할 만한 위인은 아니에요. 고작 나라 하나 먹자고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거든요. 그것보다는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겠죠. 그것은 바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묘한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일순간 그 평정심이 깨어지며 진짜 표정을 드러내며 움찔하는 페트로프. 그런 그의 반응을 잡아낸 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보리스 대통령이 꿈꾸는 진짜 계획을 말했다.
“러시아 제국……. 아니, 소비에트 연방의 부활이겠죠.”
과거, 러시아의 가장 찬란했던 그 순간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는 보리스 대통령. 하지만 그런 내 주장에 페트로프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황당하다는 눈빛을 지으며 애써 부정했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아닌가요?”
“보리스 대통령님은 그런 야욕을 가진 전쟁광이 아니네. 이건 미국과 서방 세력이 NATO를 앞세워 우리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했기에 비롯된 일이지 전혀 그런 이유로…….”
“그래요? 그러면 제가 미국 정부를 설득해서 나토의 동진을 원천 차단하고 앞으로 그 어떤 공산권 국가와의 협력도 일체 못하게 막아선다면요? 그러면 러시아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까 우크라이나를 향한 대대적인 침공도 멈추겠네요?”
“…….”
예상치 못한 내 제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페트로프.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무슨 이유를 대더라도 애초에 그만둘 생각조차 없었죠?”
“……. 그래서 정확히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뭐지?”
내 말에 별다른 반박은 하지 못하고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내 말의 요지가 무엇이냐고 물어 오는 페트로프. 그런 그에게 나는 내가 밝히지 않은 속내를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저는 말이죠……. 사실 이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아요.”
“……?”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서 비롯되게 될 결과물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거든요. 대사님은 모르시겠지만, 러시아가……. 아니지, 정확히는 보리스 대통령이 핵무기를 들먹이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고 날뛰게 내버려 둔다면 그 후폭풍은 비단 동유럽만으로 끝나지 않거든요.”
앞으로 벌어지게 될 미래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러시아 대사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나를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 줄 생각이 없던 나는 그저 고개를 작게 흔들며 말했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저로서는 가능하면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서 미국이랑 한국이 거품 물고 지랄하게 될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찾아온 거거든요. 그래서 가능하면 굳이 쉬운 길을 내버려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번 전쟁을 최대한 조속히, 그리고 어느 쪽에도 큰 손실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페트로프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의 제안은 보리스 대통령이 자진해서 정권을 후임자에게 이양하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설득하라는 말인가?”
“네. 정 말을 안 들으면 쿠데타로 보리스 대통령을 제거하거나 축출하셔도 무방하고요. 아무튼 정권만 탈환한다면 그 대가로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나토와 서방 세력은 제가 직접 나서서 확실하게 처리해 주죠. 그거 말고도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일정 부분 협의를 통해서 얼마든지 제공해 드릴 용의도 있고요.”
이번 전쟁만이 아니더라도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대한 야욕을 가진 독재자. 블라디미르 보리스 대통령. 그가 가진 모든 권력을 빼앗아야만 그 후환을 제거할 수 있었기에 나는 이번 거래를 통해서 확실하게 러시아 문제를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 지금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지금 제가 생각할 때는 이거 말고는 최선의 선택지는 딱히 없는 것 같거든요.”
러시아로서는 존재감조차 없는 아시아 대륙 변방에 자리한 작은 나라인 한국의……. 그것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에게 듣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제안. 하지만 그 터무니없고 허황스럽기까지한 이 제안에 페트로프는 코웃음을 치며 단칼에 거절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그는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겠죠.”
“설마 한국이 우리 러시아와 감히 전쟁이라도 하려는 생각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려운 길을 운운하자 스산한 눈빛을 빛내며 물어 오는 페트로프. 미국과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자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완전히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이 이번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순식간에 병력이 양분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반응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상황은 나로서도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미쳤어요?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하나 때문에 한국이 전쟁에 참여해요?”
“…….”
오히려 내가 펄쩍 뛰며 격양된 반응을 보이자 뭔가 당황한 기색의 러시아 대사. 그에게 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국은 모르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한국이 개입하거나 참전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그리고 애초에 어떻게 공격하는데요? 국경선은 이미 그 망할 북한 놈들로 막혀 있는데 배 타고 그 춥고 아무것도 없는 연해주로 진격이라도 하겠어요?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그럼 어려운 길이 도대체 무슨 의미…….”
“저요. 저.”
의아한 눈빛으로 물어 오는 페트로프.
그런 그에게 나는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세계의 질서를 수호하는 위대한 대마법사. 이 멀린이 직접 세계 평화를 위해서 나설 수밖에 없겠죠.”
“…….”
내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멍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페트로프.
그리고 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마법사로서 남들과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우리 러시아의 정보부에서도 사실 자네의 힘과 관련한 정보를 다방면으로 입수하고 분석한 상태지.”
“그러세요?”
이미 내 능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증한 것 같은 러시아 정부.
그리고 이들은 이미 이번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마법이라는 변수가 끼치게 될 영향에 대한 모든 예상 가능한 상황들을 짚어 본 상태였다.
“그 어떤 분석가나 전쟁의 전문가도 마법이 일부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전쟁의 판도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 정말 자네 하나가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뭐…….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별다른 생각 없이 답하는 내 태도에 무언가 자존심이 상한 듯한 페트로프. KGB 요원으로서의 그 특유의 살기까지 풍겨 대며 그는 싸늘한 어조로 경고했다.
“우리 러시아의 군대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게.”
상비군만 90만에 달하는 대군을 보유한 러시아.
비록 노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마어마한 물량의 전차와 탱크, 전투기와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군이 일개 마법사 하나를 상대로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페트로프에게 나는 자리에서 피식 일어나며 말했다.
“뭐……. 생각은 자유니까요. 대사님 마음대로 알아서 생각하시죠. 아무튼 제가 이야기할 내용은 전부 전달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계속 노닥거리고 있으면 미국이랑 한국에서도 엄청 난리 칠 것 같거든요.”
내 이야기를 보리스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달할 것 같지 않은 페트로프. 하지만 이미 내 뜻은 분명하게 러시아 정부에 밝혔기에 모든 용건을 끝마친 나는 씨크릿 쮸쮸 요술봉을 휘두르며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며 히죽 웃어 보였다.
“모쪼록 대사님이나 러시아 정부가 마법의 위대함과 제가 가진 힘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혹시라도 저한테 꼬투리 잡힐 만한 짓은 하지 마세요.”
“전쟁은……. 결국 명분 싸움이라고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