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과거 20세기 전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이었던 러시아.
비록 소련이 붕괴하면서 그 위상과 영향력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유엔 안보리의 상임 이사국의 지위를 이용한 강력한 외교력과 더불어 막강한 군사력과 진보한 과학 기술력. 거기에 풍부한 원자재와 천연자원들을 기반으로 한 방대한 경제력은 지금까지도 건재했기에 그 어떤 국가도 함부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특히…….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함께 상호 확증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국가로서 막대한 핵전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제아무리 초강대국인 미국이라 할지라도 러시아와의 전면전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의 핵무기가 무서워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제대로 조지지 못했지. 그 결과 핵만 있으면 주둥이만 털지 아무도 못 건든다는 착각에 빠져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망할 새끼들 몇 놈 때문에 인류 전체가 멸망 엔딩을 맞이하게 된 거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 사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미진한 대응이 잘못된 착각을 불러오고 결국 그 여파가 도미노처럼 전 세계로 번져 나가며 불러온 전쟁의 폭풍.
중국과 일본, 북한과 러시아를 비롯해 한반도와 그 일대 동북아시아에서부터 시작되는 인류 최후의……. 그리고 최악의 전쟁인 제3차 세계대전. 그때의 그 광기 어린 세계사를 몸소 체험하고 왔었기에 나는 TV에서 비장한 얼굴로 연설하고 있는 러시아의 대통령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 저는 오늘 우리 위대한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며 우리 민족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나치즘에 빠진 극단적 네오나치 정권이 저지르는 패악을 저지하고 우크라이나를 해방하기 위한 목적이며, 계속해서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나토와 서방 세력의 동진을 막아서기 위해 불가피하게 내린 결단입니다. 이번 특별 군사 작전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정권으로부터 학대와 학살을 당해 온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 러시아 군대의 유일한 적은 권력을 장악해 온갖 범죄를 일삼고 있는 나치 세력입니다. ]
자그마치 한 시간에 걸친 연설을 통해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본토 침공을 정당화하는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 블라디미르 보리스. 비록 과거 소련 연방에 편입된 국가 중 하나였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주권을 가진 독립국인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넘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 것치고는 그 명분조차 너무나도 얄팍했다.
“무슨 지금이 2차 세계대전 직후도 아니고 나치즘의 척결이라니……. 하여간 이놈의 정치인들 낯짝 두꺼운 건 알고 있었지만 저건 진짜 양심도 없나. 어휴……. 차라리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고 솔직하게 밝혔으면 차라리 멋있기라도 했겠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시작된 전쟁. 그리고 그건 나만 느낀 생각이 아니었는지, 전 세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한 강도 높은 비판 성명과 함께 외교적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 미국 정부는 정당화될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우크라이나의 일방적이고 야만적인 선전포고에 동맹국들과 함께 통일된 방식으로 단호히 대응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이러한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
[ NATO는 러시아의 무모한 전쟁 개시와 수많은 생명을 위협하는 가혹하고 무차별적인 공격에 강력히 경고합니다. NATO는 회원국 중 그 어느 일부의 영토라도 무력으로 공격당하거나 명백한 침략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나토 헌장 제5조를 발동해 전력 대응할 것입니다. 러시아가 오판으로 우리의 의지를 시험하지 않기를 강력히 경고합니다. ]
[ 블라디미르 보리스 대통령은 유럽을 전쟁에 포화 속에 놓이게 한 것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 즉시 군대를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철수시키지 않는다면, 유럽 연합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러시아의 경제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
내가 경험했던 미래와는 다르게 사전에 러시아의 기습 공격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었던 미국 정부. 이미 유럽 연합과 러시아 인근 동맹국들의 관리를 철저히 해 둔 덕분인지, 큰 혼선 없이 즉각적인 대응 조치를 시행해 나가고 있었다.
“음……. 그래도 확실히 내가 경험했던 미래보다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네.”
원래의 역사적 흐름이라면 우크라이나는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에 완전히 강제 합병당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기습적인 공격에 전쟁 준비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고작 3일 만에 우크라이나의 동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수도인 키예프까지도 러시아군의 기갑전력이 쾌속으로 점령당하고 이어서 파죽지세로 밀려 고작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사이에 모든 영토를 내주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했던 그 기존의 흐름은 나라는 거대한 변수 속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으로 뒤틀렸다.
긴급 속보. 우크라이나군. 러시아의 폭격기와 전투기들의 격추 장면 공개!
전쟁 개시 직후 대대적으로 쏟아진 미사일 폭격에도 멀쩡한 우크라이나의 방공망. 러시아군은 비상사태?
시가전과 게릴라전을 벌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군에게 고전하는 러시아의 탱크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러시아군의 보급로를 정확히 기습해 차단한 우크라이나.
이미 전쟁이 일어날 것을 1년 전부터 알고 비밀리에 철저한 훈련과 물자 비축을 통해 전시 태세를 완전히 갖춘 우크라이나 정부. 거기에 미국과 유럽에서 사전에 제공된 온갖 첨단 무기와 포탄들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막지했기에 기습적으로 허를 찔렀다고 예상한 러시아 정부군은 개전 초기부터 견고한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 ??? 러시아가 진다고?
- 아니 ㅋㅋㅋㅋㅋ. 저게 세계를 주름잡던 초강대국이 맞음?
- 나 진짜 헷갈려서 그러는데 우크라이나가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우는 거냐, 아니면 러시아 저 새끼들이 내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병X인 거냐?
- 둘 다인 듯 ㅋㅋㅋㅋㅋ. 러시아 저거 물량만 많았지 냉전 시대 고철 덩어리들만 운용하는 늙어 빠진 틀딱 호랑이였누.
- 오늘부터 밀덕 새끼들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빨아야 할 듯;;
- 핵만 있지 군사력은 뭐 아무것도 아니었네.
- ㄹㅇ ㅋㅋ. 역시 천조국이 세계 원탑이 맞는 듯.
- 군사력으로는 세계 2위인 러시아와 세계 22위의 우크라이나.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는 듯한 이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모두가 경악한 반응을 내놓으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이 배후에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대비한 미국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부탁한 대로 전쟁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해 줬으니……”
애초에 정신이 반쯤 나간 러시아의 대통령 하나 때문에 시작됐다고 해도 무방한 전쟁. 러시아의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서야 미국이 무슨 수를 썼더라도 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지금 우크라이나가 비등하게 대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역시 이런 거 보면 미국하고 손잡기를 잘했다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죽어라 싸우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어 손은 잡기도 하고, 수십 년을 이어 온 동맹이 하루아침에 원수로 돌변하기도 하는 비정하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국제 정치. 그곳에서 진정한 동맹이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국은 거래 관계에서는 아주 확실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는 아주 최적의 국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혼잣말을 들은 용용이는 조금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 흠……. 주인이 생각할 때는 정말 그 미국이라는 나라가 최고의 선택이 맞아? ]
“왜 또 갑자기 그러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그야말로 전 세계의 군사 첩보망을 하나하나 주도면밀하게 훔쳐보고 다니는 용용이. 또 뭘 주워 보고 온 것인지 쪼르르 나에게 달려와 은근히 자랑하듯이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 내가 지금 살펴본 바로는 주인이 말하는 그 미국은 이 전쟁을 주도적으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던데? 여기 오늘 NSC 회의인가 뭔가 하는 데서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
이제는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미국의 최고 군사 기밀까지도 자기 멋대로 훔쳐보고 다니는 용용이. 물론 마나 링크의 핵심 코어이자 정보 집약 네트워크를 이루는 통합사념망의 주체인 그에게는 연결된 네트워크 안의 정보를 관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위였지만, 미국 정부가 안다면 당장에라도 국가 반역죄를 운운하며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용용이 네 말은 미국이 직접 군사적 개입은 하지 않고 뒤에서 물자 지원만 하면서 최대한 전쟁에서 거리를 둘 생각이라는 말이지?”
[ 그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이 없다면 비록 우크라이나는 최대한 항전하겠지만 결국에는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에 패배하게 될 거라고 그 자식들도 다 알고 있던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이더라. ]
비록 지금 당장은 잘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 이미 정해진 이들의 최후를 알고 있음에도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듯한 용용이에게 나는 되물었다.
“그럼 미국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 뭐……? ]
“러시아를 상대로 항공 모함이라도 끌고 가서 본토 침공이라도 감행할까? 아니면 뭐 NATO 동맹국들 죄다 이끌고 가서 대규모로 전쟁 참전이라도 시작해?”
[ ……. ]
비록 이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판달리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본질은 지혜와 지성의 상징인 드래곤인 용용이. 그렇기에 그는 내 물음에 빠르게 현 상황을 이해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가는 그냥 단순한 두 국가 간의 전쟁을 넘어서 전 세계로 전장이 확대된다고. 거기에 미국이든 러시아든 둘 중 하나가 궁지에 몰려 봐. 안 그래도 20년 뒤에는 대놓고 핵 쏘기 시작하는 미친놈들인데 지금이라고 뭐 핵 안 쏘고 얌전히 백기 투항이라도 할 것 같아?”
농담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전황이 불리해지면 주저 없이 핵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를 준비가 되어 있는 러시아의 현 대통령. 미국으로서는 이 전쟁을 끝낼 능력이나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용용아.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야.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가 되네……. ]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조금 더 찾아보고 온 것인지 아까의 그 의기양양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조금은 의기소침해진 용용이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우리 20년 후에 벌어질 세계 3차 대전을 오늘로 앞당기는 짓은 하지 말자고.”
[ 그래서…….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 ]
[ 이대로 내버려 두면 결국 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미래는 결국 바꿀 수 없게 되는 거 아냐? ]
러시아의 승리와 우크라이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그 모든 부당한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세계. 그 모습을 보며 뒤틀린 야망과 욕심을 품게 된 이들로 인해서 벌어지게 될 이 세계의 멸망을 막아서기 위해서는 이 전쟁의 양상을 뒤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맞아.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여기까지 왔잖아.”
[ 여기가 어딘데……? ]
“러시아 대사관.”
[ 뭐……? ]
덕수궁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건물.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제한된, 러시아의 상징인 쌍두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러시아 대사관에 나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제 발로 찾아들었다.
“누구……?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
정문의 보안 요원과 한국 경찰들을 피해 러시아 대사관 내부로 비밀리에 들어온 나는 갑작스러운 등장에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러시아 대사관 직원을 향해 히죽 웃으며 내 정체를 밝혔다.
“아, 저는 멀린이라고 해요.”
“……?”
여전히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대사관 직원. 그런 그에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내 요구 조건을 말했다.
“당신네 대통령이랑 긴밀하게 논의하고 싶은 사항들이 몇 개 있는데 혹시 잠깐 시간 좀 내달라고 전해 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