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89화.
세계적으로 명망이 깊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여느 연구소가 다들 그러하듯이 매년 수많은 학자를 초대해 자신들이 연구한 성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곤 했다. 하지만 언제나 수많은 획기적인 발견과 뛰어난 연구를 이어오던 것으로 명성이 높은 연구소답게 그 규모는 일반 학술 세미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열렸으며 참석자들 역시 매우 저명한 학자들이었다.
“아, 알베르토.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저번에 연구하던 이형 성질 유전체 조작은 어떻게 됐는가?”
“아무래도 틀린 것 같네. 애초에 불가능한 주제를 잡은 것 같아.”
“저번에도 그렇게 앓는 소리만 하다가 결국 노벨상을 받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걸세.”
“그러면 다행이지. 그러는 자네는······? 저번에 코덱스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살펴보고 있다고 들었는데.”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지. 맞네. 지금은 노바맥스와 긴밀히 협력하고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 있지.”
“노바맥스라면······. 허허허 프린스턴에서 지원금은 빵빵하게 받겠군.”
“하하하. 오, 내 정신 좀 보게. 여기 이 친구를 소개하는 걸 깜빡 잊고 있었군. 여기는 앤드류 교수라고 하네. 우리랑 같은 연구 분야는 아니고 이론 물리학 쪽으로 아주 빠삭한 친구지.”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알베르토 교수님. 전부터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부터 시작해서 학계에서 거의 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 바글바글한 세미나. 이곳에서만큼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이력을 가진 앤드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예의를 갖추며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서로의 안면을 다졌다.
“오, 이론 물리학이라······. 참 신비로우면서도 난해한 학문이지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생명공학과 유전체 연구에서 그 누구도 감히 덤빌 수 없는 최고 권위자인 알베르토 교수. 이론 물리학을 연구한다는 말에 눈을 빛내며 관심을 가지며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지자 앤드류는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수님께서 물리학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줄을 몰랐습니다.”
“허허허. 알베르토 이 친구는 원래 엄청 물리학을 좋아했었던 친구네. 결국에는 진로를 생명공학으로 바꾸기는 했네만 알고 있는 지식만 해도 일반적인 물리학 교수들에 못지않지. 요즘도 아침마다 물리학 논문 읽고 그러나?”
“요즘은 바빠서 간간이 틈이 날 때마다 읽고는 있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최근에는 그렇게 흥미로운 내용의 논문을 찾지는 못해서 손이 막 가지는 않더군.”
20세기를 넘어서면서 획기적인 발견이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답보한 상태로 정체하고 있는 물리학계. 그로 인해서 딱히 볼만한 내용의 논문이 없다면서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던 알베르토는 그 순간 씁쓸한 표정을 하는 앤드류는 보고는 이내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닫고는 헛기침을 했다.
“크흐흠······. 방금 내가 한 이야기는 자네를 두고 한 말은 아니니 괘념치 말아 주게. 그저 이 노교수가 아쉬움이 섞여 잠깐 한탄한 것뿐이네.”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는 듯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건네는 알베르토.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앤드류는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하신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고 저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리학계에는 정체한 채로 죽어가고 있다.
지난 20세기에서 그렇게 큰 변화와 진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그저 지지부진하게 여러 이론만을 붙잡고 있는 상태. 양자역학과 초끈이론. 대통일이론이니 루프 양자 중력 이론이라는 수많은 이론이 쏟아져나오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완벽하게 이 우주의 법칙과 진리를 설명하고 있지 못했기에 알베르토 교수가 말하는 아쉬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앤드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1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 어떠한 혁신적인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물리학계 전체가 멈추어서고 있다면, 분명 무언가 잘못된 단추가 끼워져 있다는 말이겠죠. 기존의 이론들을 넘어서서 무언가 새로운 혁신을 위한 도전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물리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마주하는 문제점.
그것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의 실증적인 증명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거대하고 또 너무나도 작은 규모의 영역이었다.
분자와 원자를 넘어 쿼크와 소립자까지 이어지는 미시 세계와 태양계와 은하를 넘어서 드넓은 우주로까지 뻗어가는 거시 세계까지.
그저 한 사람의 힘만으로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영역이었기에 물리학자 대부분은 언제나 기존의 연구 성과들만을 가지고 어떻게든 말이 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기만 하지, 스스로 모든 이론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조차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부디······. 자네 같은 열정적인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으로 기존의 모든 난제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기원하겠네.”
“교수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끝마친 두 사람. 그리고 절묘한 타이밍 속에서 이번 학술 세미나의 다음 발표 순서에 대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 다음 발표는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이론 물리학 분야의 연구를 담당하는 Dr. 류현진 교수의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원에 대한 고찰’입니다. 10분 후 발표를 시작할 예정이오니 참석자분들께서는 그전까지 모두 지정된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론 물리학 쪽 발표가 남아있었군. 제목이······. 아주 특이하군.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원이라? 도대체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려는 거지?”
그 안내를 듣자마자 화색이 된 얼굴로 설명 책자를 꺼내 들며 이리저리 뒤적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 알베르토. 하지만 그런 그와 다르게 류현진 교수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알고 있는 앤드류의 얼굴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왜 그러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는 앤드류. 본인이 직접 발표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땀이 뻘뻘 흐르는 것을 느끼는 그와 다르게 류현진 교수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단상에 서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조용해진 회장.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그 순간, 류현진 교수는 돌연 눈을 번쩍 뜨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 안녕하십니까.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의 파견 연구원. Dr. 류현진입니다. ]
끝없는 자기 확신과 절대로 굴하지 않을 신념이 느껴지는 그의 굳건한 목소리가 방 안의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며 발표를 시작했다.
[ 그럼 지금부터, 제가 1년 동안 연구한 성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오게 될 세기의 발표를 말이다.
*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우주.
인간의 인지와 이해를 넘어서는 미지의 형용할 수 없는 드넓은 무한의 세계에 대해서 류현진 교수는 자신이 봤던 뮤튜브 영상을 통해서 깨닫게 된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 자연에 존재하는 힘인 중력과 전자기력, 그리고 약력과 강력이 같은 근원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은 이전부터 수없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론도 제대로 이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지 못했죠. ]
[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또 이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전에 저는 하나의 가정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마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만들어낸 시뮬레이션이나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근원인 에너지가 따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
근본적으로 수많은 가정과 가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저 한 사람의 망상 속에서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무가치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수많은 철학가와 학자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이 우주를 비롯해 무한의 차원으로 나누어진 대우주 전체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자 진정한 진리였다.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니까······.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물리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철학이나 종교 이야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이들의 혼란이 가중되자 술렁거리기 시작했음에도 류현진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폭탄선언을 시작하고야 말았다.
[ 저는 작년에 우연히 뮤튜브를 통해서 어느 한 인터넷 영상을 보았습니다. 본인 스스로 마법사라고 자처하는 어느 한 소년의 영상이었죠. ]
“······?”
갑작스럽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상한 복장을 한 유치찬란한 동양인 소년의 사진을 대형 스크린에 띄우는 류현진 교수. 그리고 그는 모두가 그저 비웃으며 지나쳐간 그 영상들 속에 숨겨져 있던 비현실적인, 그리고 또 너무나도 초월적인 내용의 이야기들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의 연구자라는 공신력과 명성을 업고 모두에게 대신 말해주었다.
[ 그가 제시한 여기 수식들을 보시죠. 양자역학에서 그토록 고민하고 있던 입자들의 전이와 파동 현상에 대한 증명을 수학적으로 개량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한 차원 좌표가 상대적 좌표계만을 설명할 뿐, 고정적인 절대 좌표계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
현대 물리학을 아우르는 수많은 위대한 연구가들의 업적과 이론의 파편들을 언급하며 한계점과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는 류현진 교수. 그리고 그는 모두가 기겁할 만한 발언을 이어갔다.
[ 아인슈타인은 틀렸습니다. 아니, 지금껏 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 우주의 진리를 찾아왔던 우리는 모두는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
“저······저게 무슨······.”
“맙소사. 저 인간 지금 제정신인 건가? 혹시 술이라도 먹은 거 아냐?”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설명했지만, 결론적으로 물리학의 모든 기반이 잘못되었다고 주정하는 류현진 교수. 그야말로 동종 업계인 물리학자만이 아니더라도 과학계 전체에 광역 도발을 시전하며 그는 이번 발표의 정점을 하이라이트로 치달아가기 시작했다.
[ 따라서, 저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에너지의 존재를 제안합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아니, 드넓은 대우주를 넘어서 무한으로 갈라진 다중 차원 전체를 구성하는 상위의 힘이자 근원. 마나(Mana)의 존재를 말입니다. ]
“마나······?”
“내가 아는 그 마나를 말하는 건가?”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거나 판타지 설정의 게임을 해 봤다면 누구든 한 번은 들어봤을 친숙한 단어. 그 마나라는 단어를 이런 학술 세미나에서 들을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이들은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류현진 교수는 인정한다는 듯이 말했다.
[ 마나는 그 어떤 에너지로도 자유자재로 전환될 수 있으며 적절한 방식을 통해서 이 우주의 법칙을 능히 뒤틀어낼 수 있는 전능(全能)한 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나라는 에너지를 적절하게 다루게 된다면, 인류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의 저변을 확장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것이 바로······. ]
[ 우리가 익히 마법(魔法)이라고 부르는 학문이죠. ]
결국 류현진 교수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가 나와버렸다.
과학계에서 감히 그 누구도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권위자들만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감히 마법이라는 단어를 뱉어버린 그. 그리고 그 순간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마법?”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바쁜 사람들 불러다 장난하자는 건가?”
“어지간하면 참고 들으려고 했는데 이 이상은 못 참겠군. 언제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코미디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흉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
하지만 앤드류 교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어떤 발표를 할 것인지 철저하게 비밀로 숨기고 있었기에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의 관계자들조차도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거 참······. 저 친구는 이제 완전히 끝이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밀려드는 착잡한 마음에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앤드류 교수.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알베르토 교수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보게···. 아까 내가 말했던 이야기는 취소하도록 하지.”
물리학계에는 혁신이 없다면서 비판적인 논조로 잔뜩 투덜거렸던 알베르토.
하지만 그런 알베르토조차도 류현진 교수의 발표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마디 툭 내던졌다.
“저건 혁신이 아니라 아예 혁명 수준 아닌가.”
물리학의 새로운 저변을 열어달라니까 아예 밥상을 뒤엎어버리는 류현진 교수.
하지만 수많은 비난과 조롱 속에서 그의 발표는 초라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이 순간은 세계사적으로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최초로 마나와 마법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학계에 발표된 순간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