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86화.
“으으으······.”
“의······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뜬 양원철 의원. 그는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보좌관의 질문을 무시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내가 왜 병실에 누워 있는 거지?”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통령님과 독대 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대통령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깨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 하지만 그는 보좌관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아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가장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아······. 그래······. 그랬었지.”
자신과 상의도 없이 검찰을 움직여 삼진 그룹을 공격한 것에 대해 크게 격분한 윤기열 대통령. 그와 나누었던 앞으로의 계획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원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전에는 이런 일이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건강상의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당황한 기색으로 물어오는 보좌관. 하지만 그런 그의 질문에도 원철은 자신이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순간만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게······. 나도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모르겠군.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확실하게 다시 검진을 받아보긴 해야겠어.”
“가능한 빠른 일자로 잡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오후로 예정되어 있던 기자회견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다른 날로 연기하는 게 나을까요?”
대한국민당의 대표인 이재식 의원과 함께 삼진 바이오의 부동산 투기 사태와 관련해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기로 한 원철.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린 탓에 사전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이미 기자회견을 열기로 예정된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대한국민당 쪽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설명한 상태입니다. 이재식 의원 쪽도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이니 이해한다며 부디 의원님의 쾌유를 바라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기자회견을 연기했으면 하는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는 보좌관.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원철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아니, 그러기에는 오늘 윤기열 대통령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어. 혹시라도 기자회견을 연기시켰다가 중간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서 이번 일을 무마시키기 시작했다가는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네. 게다가 이미 기자들도 여럿 지금 돌아가는 상황과 관련해서 냄새를 맡은 모양새고.”
단 하루라도 미루다가 그동안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렇기에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일어나서는 굳게 다짐한 듯한 눈빛으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내 양복 가지고 오게. 지금 바로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지.”
그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
삼진 그룹의 부동산 비리 의혹과 관련한 민주시민당과 대한국민당의 합동 기자회견.
회견이 예정되었던 오후 4시에 가까워지자 이호준 회장과 이용수 사장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고 자택으로 돌아와 잔뜩 굳은 얼굴로 TV 앞에 앉았다.
“끄응······. 일이 골치 아프게 흘러가게 될 것 같구나. 용수야.”
“아버지께서 뭐 알아내신 정보가 있으십니까?”
이번 문제와 관련해서 삼진 그룹의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막아보고자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이호준 회장. 하지만 대통령의 의사마저도 무시한 채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모두 힘을 합치자 이건 아무리 재계 1순위의 삼진 그룹이라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생태 부지들을 조성하기 위해 자금을 움직인 것들을 전부 부동산 투기 쪽으로 엮을 심산인 것 같다. 대한국민당이나 민주시민당이나 당 내부에서 우리랑 우호적이었던 의원들조차도 발을 떼고 있어.”
일개 국회의원 한둘이 아니라 두 당의 핵심 지도부들의 합의 속에서 내려진 결정. 그렇기에 그 누구도 삼진 그룹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고 있었다.
“저놈들이 우리를 상대로 특검을 진행할 생각인 것 같다.”
“특검······. 말입니까?”
“그래. 이왕 공격할 거면, 바이오를 비롯해 그룹 전체를 아주 제대로 헤집어보겠다. 이런 심산인 거겠지.”
생각만 해도 분하다는 듯이 살벌한 눈빛을 빛내며 무어라 연신 자신을 배신한 여러 의원에 대한 욕을 늘어놓는 이호준 회장.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이용수 사장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그저 말없이 가만히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나나 아버지를 감옥에 넣으려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무리 불법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삼진 그룹의 회장과 그 후계자를 동시에 감옥에 처넣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투자 위축과 주가 하락, 거기에 수출 부진과 같은 악재까지 겹치면 경기 침체로 인해서 본인들의 지지율만 깎아 먹게 될 공산이 컸다.
따라서······. 이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그 답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결국 곧 있을 대선과 살살이 풀에 대한 이권 때문이겠군······.’
뭐든 분명히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려고 하는 목적이 있을 이들. 어떻게 하면 두 당을 만족시키며 조용하게 이번 사태를 무마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을 고심하던 이용수 사장은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 두 분 모두 여기 모여있었네요? 집무실에 놀러 가봤는데 아무도 없어서 혹시나 해서 와 본 건데. 어떻게 말도 안 했는데 재미난 구경거리 잘 찾아서 미리 대기하고 계셨네요?”
“머······멀린님? 언제 오셨습니까······?”
최첨단 보안 설비를 모조리 뚫고 삼진 일가의 서재를 마치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이 하는 멀린. 그리고 그는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듯한 팝콘 봉지 하나를 흔들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요. 그보다 여기 두분 다 있는 줄 알았으면 팝콘이나 좀 더 사 올 걸 그랬네요. 저 혼자 먹을 줄 알고 한 봉지 밖에 안 사 왔는데. 어떻게······. 좀 나눠 드릴까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말고요.”
한번 거절하자 흔쾌하게 수긍하면서 팝콘을 우적우적 퍼먹기 시작한 멀린.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이호준 회장은 약간 짜증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도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건가? 오늘도 여러 번 전화했었는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논의하려고 계속해서 멀린과의 연락을 시도했던 이호준 회장. 대통령조차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자신의 전화를 너무나도 가볍게 씹고 답장조차 주지 않았던 그가 자신의 서재 소파에 앉아 팝콘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호준 회장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아, 아침에 잠깐 청와대 좀 다녀왔거든요.”
“······?”
“뭐······. 뭐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일순간 얼어붙은 두 사람.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이호준 회장은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대통령님을 만나보고 온 건가?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그러면 이미 알고 계신 건가? 아니, 그렇다면 설마······.”
흥분해서 자기도 모르게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이호준 회장.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끊으며 투덜대는 멀린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질문은 한 번에 하나만 해주시겠어요? 그리고 괜한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세요. 대통령님을 보러 간 게 아니라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정치인을 보러 간 거거든요.”
“뭐······뭐라고······?”
“어, 저기 나오네요.”
“저 사람은······? 전에 자네랑 안 좋게 엮였던 그 의원 아닌가······?”
“에이, 옛날 일은 이미 좋게 해결한 지가 언젠데요. 전 이제 신경도 안 써요.”
새롭게 민주시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된 4선의 중진 의원인 양원철. 그를 보며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싱글거리며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멀린을 황당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이호준 회장. 그리고 그는 이제 막 시작된 여야의 합동 기자회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최근,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인해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한 서민들과 청년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을 반드시 잡겠다던 윤기열 정부의 야심 찼던 목표와 다르게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만 갔습니다. 대한국민당과 민주시민당은 이러한 가격 상승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동산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 세력들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삼진 바이오의 80만 평 토지 매입은 이러한 투기 세력들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이며······. ]
삼진 그룹을 언급하며 부동산 문제에 대해 맹렬한 어조로 공격적인 발언을 쉬지 않고 쏟아내는 대한국민당의 대표인 이재식 의원. 그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이호준 회장과 이용수 사장은 생각 이상으로 강한 그의 발언 수위에 점점 심각하게 얼굴을 굳혀갔지만, 한 사람만큼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야······. 아주 적나라하게 삼진 그룹을 욕하고 있네요. 나중에 저 아저씨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이건 무조건 유죄 뜨겠는데요?”
“······. 지금 농담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지. 그럴 기분은 아니네.”
“농담하는 거 아닌데요? 따지고 보면 그렇잖아요? 저 인간들, 지금 저기 카메라 앞에서 쇼하고 있는 게 정말 삼진 그룹의 불법을 파헤치고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저 최대한 자극적인 문구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삼진 그룹에 모든 시선을 돌리겠다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투기 세력의 실체로 삼진을 지목하고 있는 거죠. 저건 무조건 허위 사실 유포에 명예훼손이랑 모욕죄. 거기에 잘하면 영업 방해까지도 엮어 넣을 수 있죠.”
이 모든 것이 앞으로 있을 대선을 준비하기 위한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호준 회장. 그리고 그는 이어지는 멀린의 의미심장한 말에 일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삼진 그룹의 부동산 투기 의혹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고의 정치쇼가 이제 곧 펼쳐질 거니까요.”
“그게 도대체 무슨······.”
정확히 무슨 소리냐고 캐물으려던 이호준 회장. 하지만 그 순간 텔레비전의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한 문구를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방금 이재식 의원이 했던 이야기는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
“······?”
이재식 의원의 성명 발표가 끝나고 연이어 차례를 넘겨받은 양원철 의원.
그의 믿을 수 없는 첫마디를 시작으로 연이어 쏟아지는 그의 발언에 방금까지는 간간이 터져 나오던 카메라 플래시는 단 1초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사실은 다음 대선에서 지지율을 높이고 싶은 대한국민당이 부동산 문제를 통해서 저희 당과 대통령을 공격하고 싶어서 꾸민 짓입니다. 하지만 저희 당을 직접 공격하자니 그건 너무 부담되어서 만만한 대상이 없나 찾으며 고민하던 와중에 삼진을 희생양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투기 세력의 실체가 있는지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
[ 뭐······. 저나 이재식 의원이나 다 부동산으로 재미 본 건 사실입니다. 저희 둘만 그런 건 아니고 현직 의원 대부분은 그렇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건설사들로부터 리베이트 받기도 하고, 국토위 의원들한테 얻은 개발 정보를 사전 입수해서 차명으로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금융사나 은행이랑 함께 PF 쪽으로 불법 대출받아서 총알 땡긴 의원들도 몇 있고요. 아무튼······. 그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손해 본 사람은 없죠. ]
수많은 방송사와 정치부 기자들이 전부 모여있는 기자회견.
최대한 자극적으로 쇼를 벌이자고 판을 크게 벌여 놓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그리고 다른 동료 의원들과 상대 정당의 비리들을 마치 양심선언을 하는 듯이 가감 없이 토해내기 시작한 양원철 의원. 그런 그의 말을 잠깐 무언가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두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
[ 의원님. 자······잠깐만요. 지금 이게 무슨······. ]
대한국민당이나 민주시민당이나 모두가 이제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 순간. 원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핵폭탄의 스위치를 눌러버리고야 말았다.
[ 그래도 현직 의원 중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본 건 흑전동 개발 쪽에 손댄 사람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흑전동 지역을 재개발 명목으로 전부 강제 수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차익만 해도 최소 수천억 원 나왔는데. 그 이익금의 일부를 나눠 먹은 의원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이재식 의원이랑 최한수 의원. 그리고······. ]
[ 그 입 안 닥쳐!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자네 미쳤어? ]
[ 카······카메라들 치우세요! 기자회견은 이걸로 끝냅니다! ]
[ 의······의원님! 잠시만 진정하시고······. 꺄아악! ]
흑전동이 언급되자마자 이성을 잃고 양원철 의원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은 이재식 의원. 그리고 이 둘을 말리며 수십 대가 넘는 카메라들을 향해서 손을 들이밀며 기자회견이 끝났다며 무어라 소리치는 보좌관들과 어떻게든 이 희대의 명장면을 찍으려고 안달이 난 기자들까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 되어버린 이 상황을 그저 말없이 지켜보던 이호준 회장과 이용수 사장은 문득 고개를 돌려 너무나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연신 팝콘을 집어 먹고 있는 멀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팝콘 좀 드려요?”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팝콘 봉지를 내미는 멀린.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호준 회장은 갑자기 밀려오는 시장기에 팝콘을 한 주먹 집어 들고는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건······.
이호준 회장이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떠한 팝콘보다도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