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84화.
한국의 국회를 양분하는 두 개의 거대 정당인 대한국민당과 민주시민당.
표면적으로는 서로가 완전히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모든 문제에 극렬하게 대립하는 경쟁자이자 정적으로 보였지만, 그런 보여지는 모습과 달리 그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 허허허. 의원님 오늘 골프 한판 어떻습니까? ]
[ 원하시는 대로 상임의 개혁 법안 통과는 저지시켜줬습니다. 그 대신, 다음 장관 후보자는 별 탈 없이 통과시켜주기로 한 약속은 잊으시면 안 됩니다. ]
[ 에이, 카메라 앞에서 비록 우리가 싸우는 관계라 하더라도 사석에서는 똑같이 금뱃지를 단 의원님들 아닙니까? 얼굴 풀고 서로 편하게들 오늘 달려보시죠. ]
비록 소속된 정당은 달라도 같은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국회에 입성한 이들은 사실 그 관계들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상 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이라도 정치적 정쟁을 일삼으며 대립하는 이들.
물론,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이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으로 경쟁하며 서로를 공격하고 물어뜯으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번 대선을 논의하기 위해서 모인 두 당은 이전의 대선 때와는 다르게 서로 긴밀하게 손을 잡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허. 늦었지만 이거 신임 대표로 선출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새롭게 당 대표로 선출된 양원철 의원에게 손을 내밀며 축하의 메시지를 건네는 대한국민당의 이재식 의원. 그런 그의 손을 맞잡으며 원철은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비록 저희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의원님과 함께 진정한 협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같이 노력해보시죠.”
협치를 위해 노력하자는 원철의 대답. 그런 그의 대답에 이재식 의원은 묘한 눈빛을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협치라······. 그거 정말 듣기 좋은 말이군요.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서로가 협치하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니겠습니까?”
몇 가지 서류를 꺼내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이재식 의원. 그리고 그는 이내 살짝 비꼬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꺼내놨다.
“저희가 확인한 것들인데 우리 민주시민당 의원님들······. 참 많이도 해 드셨습니다. 국토위 쪽에서 입수한 기밀 정보들 빼돌려서 친인척 명의로 투자받고 건설사들로부터 뒷돈 얻어먹으시고, 은행권에서 불법 대출로 아파트 사재기해서 시세 차익으로 수십억도 넘게 번 의원분도 있더군요. 아들 명의로 하면 모를 줄 알았습니까?”
부동산 폭등기와 맞물려 어마어마한 이익을 본 민주시민당 의원들. 그들이 저지른 부정부패의 증거들을 몇 가지 꺼내 드는 이재식 의원의 가시 돋친 물음에도 양원철 의원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동요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똑같이 몇 가지 서류를 꺼낼 뿐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신다면 대한국민당 의원님들도 만만치 않더군요.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한국민당의 의원님들도 저희랑 비슷한 방식으로 많이 해 드시지 않았습니까? 그 양이······. 하하하. 어째 저희보다 훨씬 더 많으신 것 같습니다.”
투웅.
겉으로 보기에도 이재식 의원이 꺼낸 것과 비교해 두께가 거의 2배는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들. 이 둘은 서로의 서류뭉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 안에 적혀져 있을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각 정당에 소속된 의원들이 저지르고 다녔을 더럽고 부정한 비리의 증거물들.
그것을 터트려봤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정치적 자폭이나 다름없는 행위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둘은 서로 묘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거······. 생각보다 민주시민당이 들고 있는 패가 더 좋으셨군요.”
“과찬이십니다.”
서로가 웃는 낯으로 한방씩 공방을 주고받은 상황. 지금까지는 이재식 의원이 밀린 것으로 보였지만, 그가 내뱉은 한 마디로 순식간에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그래도······. 흑전동 문제까지 제대로 터트리면 아마 우리를 상대로 이기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흑전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싸늘하게 냉각되는 방 안의 분위기. 그리고 이내 양원철 의원은 완전히 딱딱해진 낯빛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를 꺼내 들겠다면······. 그건 비단 대선의 승패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비단 사소한 비리 하나 폭로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 초대형 개발 비리로 얼룩질지 모르는 그 사건을 꺼내 드는 순간 서로를 끝장내야만 하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정치적 전쟁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이재식 의원은 그런 원철의 격렬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농담이요. 농담. 내가 고작 대선 하나 이겨 먹겠다고 설마 그걸 터트리겠소? 민주시민당이나 우리 대한국민당이나 그 사업으로 재미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터트리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정치적 핵폭탄이나 다름없는 무기. 그렇기에 이재석 의원은 농담이라는 듯이 능청스럽게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도로 물리고는 이내 진짜 용건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부동산 문제는 서로의 치부를 괜히 들추는 흑색선전이나 여론 플레이는 하지 않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나 그쪽이나 피차 더러운 건 똑같은 상황이니 괜히 서로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지 말고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자 이 말입니다.”
“그게 삼진 그룹이 매입한 경기 지역의 공공부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내가 그 생태 부지를 삼진 바이오가 매입하게 된 경위를 확인해봤는데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기더군. 경기도가 민주시민당 지역구이다 보니 시의원들 몇 명이 연루된 것 같은데 그렇게 거물급은 없는 상태이던데 피라미 몇 놈만 포기하고 넘기지.”
어떻게든 이번 대선을 위해서 부동산 문제를 가지고 맹공을 퍼붓고 싶은 대한국민당. 어떻게든 공격할 빌미를 찾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이들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삼진 바이오의 생태 부지는 그야말로 탐스러운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우리가 얻는 것은 뭡니까?”
하지만 그런 공격을 받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민주시민당. 아무리 잔챙이라 하더라도 민주시민당 소속의 의원들이 부동산 비리로 수사를 받게 된다면 그에 따른 이미지 훼손은 피할 수 없었기에 원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최소한 민주시민당이 주구장창 이야기하던 기존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줄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투기 세력들의 방해 공작 때문이라고 하던 그 주장 말입니다.”
“······.”
머릿속에서 잠깐 계산기를 굴리며 생각에 잠긴 양원철 의원. 하지만 그의 생각이 길어지자 조급해졌는지 이재식 의원은 여유로운 태도를 연기하며 나지막하게 협박했다.
“아니면, 죽을 때 죽더라도 흑전동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서 우리와 개싸움을 벌여보던지요. 뭐가 되었든 그건 의원님 선택이십니다.”
어느 정도 일정 손실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한국민당에게 살을 내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서로의 뼈를 취하기 위해서 극렬한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양원철 의원. 그리고 그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이 문제는······. 의원님 의견대로 하시죠. 저희가 양보하겠습니다.”
백기를 내걸고 원하는 대로 맞춰주겠다는 원철의 수락에 이재식 의원은 반색이 된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이게 바로 진정한 협치 아니겠습니까.”
*
마법이 지배하는 문명인 판달리아에서 넘어온 드래곤 로드 용용이.
그에게 과학을 기반으로 탄생한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새롭고 또 생소한 것들이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였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은 정말 이상해. 도대체 어떻게 모든 인간이 전부 평등할 수 있다는 거야? 왕이나 귀족이 있어야 나라가 굴러가는 건 아주 당연한 이야기 아냐? ]
중세 정도의 문명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판달리아의 세계.
왕이나 영주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영주민들이 저마다 주어진 일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봉건 사회의 체제로 운영되던 곳이었기에 용용이는 도무지 이 지구가 돌아가는 세련되고 복잡한 시스템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우리도 귀족이니 왕이니 하는 신분제도가 있기는 했어.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거의 사라지는 추세야. 영국이나 몇몇 나라들에서는 아직 그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 있기는 한데 예전 같지는 않지. 그냥 허울뿐인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해버린 곳이 대부분이야.”
[ 하······. 도대체 이 세상은 왕이랑 귀족들이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그렇게 변해버린 거래? ]
“그런 게 있어. 뭐 말로 하나하나 다 설명하려면 너무 길고, 대충 혁명 마려운 상황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봤다는 게 문제라고 할까?”
[ 혁명······? 그게 뭔데······. ]
아직 혁명의 맛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용용이.
하지만 그런 그의 귀여운 질문에 나는 히죽 웃으며 봉건 제도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을 꼬집었다.
“너도 가끔 판달리아에서 본 적 없어? 왕이라고 권좌에 앉아있는데 너무 한심하고 멍청해서 나라를 통치하기는커녕 말아먹고 있는 놈들. 결국 어떻게든 밑에 신하들이 그 똥을 치우려고 노력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똥을 여기저기 싸질러대서 잘 나가던 나라도 한순간에 망하고는 하잖아.”
[ 가끔이겠어? 거의 대다수가 그렇지. 예전에 꽤 마음에 드는 인간 놈 하나 있어서 좀 도와줬더니 내 이름을 딴 나라 하나 만들더라고? 그런데 잠 한번 자고 한 500년 뒤에 일어나서 놀러 가봤더니 이미 망했더라고. 알아보니 그 밑에 후손이라는 놈들 여럿이서 왕위 가지고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싸우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하더라. 내가 그거 듣고 너무 황당해서 진짜······. ]
“그래. 딱 그게 혁명 마려워지는 상황이야.”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혈통만을 통해서 신분이 정해지는 사회.
그 사회 구조와 정치 시스템이 가지는 구조적 모순과 수 세기조차도 제대로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설명해주자 용용이는 비로소 조금은 알겠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한 인간이 대대손손 오래오래 왕을 해 먹으면 여러 문제가 생기니까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간이 돌아가면서 왕을 해 먹는다는 말이잖아. ]
“그렇지. 물론 왕이랑 조금 다르긴 해. 그 밑에 귀족이라고 해야 하나? 견제할 수 있는 이들이 여럿 있거든.”
[ 국회의원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
“빙고. 정확히 알고 있네?”
[ 주인이 하고 있는 일에 딴지를 걸고 있는 인간들이라며. 그래서 알고 있지. ]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낮말 밤말 가리지 않고 전부 다 주워듣고 있는 용용이. 그런 그는 확신한 피아식별에 나는 그의 초록빛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아. 내가 조성한 정원에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나쁜 인간들이지. 평소에는 반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하필이면 선거가 코앞이라 그런지 안 하던 짓까지 해가면서 일치단결하는 바람에 더욱 골치가 아프긴 해.”
대선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삼진 그룹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조용하게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대한국민당이나 민주시민당이나 이번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끌고 가려는 듯한 의도가 명확했기에 이들은 발언의 수위와 강도를 연일 높혀갔고, 그에 따라 언론들 역시 삼진 그룹의 부동산 매입과 관련한 의혹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 충격! 삼진 바이오가 경기 일대의 부동산 불법 매입 의혹 폭로.
- 대규모 정경유착 정황 발견? 경기도 의회에서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 부동산 시세 폭등과 얽힌 삼진 게이트. 투기 세력의 실체는 바로 삼진이었다!
- 국민의 재산을 멋대로 헐값에 팔아버린 경기도. 신속하고 투명한 조사 필요!
이호준 회장이 문제가 될 거라고 이야기한 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쉴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 그리고 그에 따라 급작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정황들을 보면 분명 가만히 있다가는 눈 뜨고 코 베일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 긴급 속보! 삼진 바이오. 긴급 압수수색 실시!
“이야······. 삼진 그룹을 상대로 압수수색까지 하겠다고? 진짜 진심으로 들어오네.”
[ 어떻게 할 거야? 주인? ]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개입해야지.”
이호준 회장의 재력이나 영향력으로도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 저 위에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이들에 의해서 짜인 이 구도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타개할 수 없을 것이 만무했기에 나는 요술봉을 집어 들고는 용용이의 물음에 답했다.
[ 죽이게? ]
“······. 내가 무슨 야만인이냐? 무식하게 뭐 그런 방식으로 처리해?”
[ 왜, 그게 가장 깔끔하고 확실하잖아. 그럼 어떻게 할 건데? ]
“음······. 글쎄······.”
아직 정확한 해결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던 나. 하지만 TV 화면에서 심각하고 진중한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는 원석이의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우리 원석이 아버님 면담부터 하고 결정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