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78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지나며 미국의 강력한 보호와 원조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친미를 표방하는 외교 노선을 걸어왔다.
하지만 야생과도 같은 국제 정치에서 영원한 적과 영원한 친위는 없는 법.
민주 시민당 출신인 윤기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외교 방침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 이제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방향의 외교 정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중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에 반드시 한반도를 비핵화 국가로 만들겠습니다. ]
[ 중국이 앞으로 북한 문제에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대국으로서의 덕을 갖춘 아시아의 동반자로서 나아가기를 그 역할을 기대합니다. ]
기존의 친미 노선을 벗어나 중국에 우호적인 행보를 나선 윤기열 정부. 그렇기에 윤기열 대통령의 임기 내내 여러모로 미국 정부를 자극할 만한 일들이 여럿 있었지만, 외교부의 피나는 노력 속에서 대부분의 사안은 커다란 외교 갈등으로 비화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만남을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장관님(Minister). 백악관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아서 이렇게 부득이하게 만남을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공사가 다 그렇듯이 갑작스럽게 일이 생기는 거야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다른 날도 아니고 한국 시각으로 토요일 새벽 4시에 긴급하게 만남을 청한 미국 대사. 일반적인 절차로는 절대 성사될 수 없는 만남이었지만, 이전과 다르게 엄청나게 강경한 어조로 보낸 요청에 외교부 장관으로서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몇 가지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그 내용이······. 아무래도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안인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은 전부 물리고 둘이서만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요.”
“······. 통역도 전부 말입니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러시기를 강력하게 권고드리는 바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잠깐 의아한 표정으로 미국 대사를 빤히 바라보던 외교부장관. 하지만 그는 이내 손을 흔들며 모두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 야심한 새벽 시간에 반강제로 불려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어눌한 발음의 영어를 하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물렸으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십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까지 만남을 요청한 겁니까?”
자기도 모르게 밀려드는 하품으로 입을 벌린 외교부 장관.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미국 대사의 답변에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게 아니라 한국정부에서 우리 미합중국의 시민을 불법적으로 강제구금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뭐······뭐요? 그건 도대체 어디서 들은 헛소리입니까?”
“그 말씀은······. 그 정보가 거짓이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하시는 겁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 그렇기에 당황한 얼굴로 외교부 장관은 답했지만, 그런 그의 대답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재차 확인하듯이 물어오는 미국 대사. 자신이 하는 발언이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서 하는 공식적인 답변이라는 것을 인지한 장관은 총력을 다해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최근에 NSC에서 보고받았던 한 사건에 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그 공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말하는 거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오는 외교부 장관. 그리고 그런 그의 직설적인 물음에 미국 대사 역시 그 특유의 외교적 수사를 전혀 섞지 않고 명료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런 미국 대사의 말에 그는 정말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 사건이라면 미국 대사께서 저에게 이러한 추궁을 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초치해서 공식적으로 항의해야 할 상황 아니오?”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그것도 수도인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인 정보기관들. 유일한 생존자로 추정되는 미국 요원을 비밀리에 붙잡아놓고 심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전에 그 사태와 관련해서 물어봤을 때, 대사께서는 해당 인물이 미국인이 아니라고 부인했소. 설마 이제야 와서 그때 그 답변을 번복하겠다는 의미요?”
그 요원에 관해서 일체의 관련성도 부인했던 미국 정부. 그렇기에 그랬던 이들이 돌연 입장을 바꾸려는 이유가 뭐냐는 장관의 물음에 미국 대사는 잠깐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장관님께서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해······?”
“······. 장관님께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시니 저도 허심탄회하게 말하도록 하죠. 최근에 질의했던 해당 미국인은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자원(Asset)이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사태의 유일한 생존자가 미국의 정보기관 요원임을 인정하는 미국 대사.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말에 외교부 장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이 사람입니다.”
“이······. 이건······?”
미국 대사가 꺼내든 사진을 확인한 외교부 장관. 그리고 그는 그 사진 속에 나와 있는 너무나도 한국인처럼 생긴 어느 한 젊은 여성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은 한국인 아니오?”
“그렇습니다. 한국 이름으로 이아영. 한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쭉 한국에서 살아온 인물이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 미국의 적법한 시민권을 보유한 미국인이기도 합니다.”
“그······그게 무슨······?”
그녀가 미국인이라는 말에 정말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외교부 장관. 그도 그럴 것이 이미 NSC 회의에 참여해 국가정보원의 보고를 들은 그는 아영의 신상 정보를 그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출입국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 바로는 미국에 여행조차 해 본 적 없는 데다 양가 부모조차도 천연 한국인인 아영. 이번 공원 참사로 인해서 그녀와 관련한 모든 뒷배경을 전부 조사한 결과, 미국과의 그 어떠한 연결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녀가 어떻게 미국인이라는 말이오? 아니, 그보다 도대체······.”
“일반적인 절차를 통해 진행된 귀화가 아니니까요. 물론, 행정상의 오류로 한국정부에 관련 내용이 전달되지 않은 것은 양해드립니다. 저희로서도 꽤 독특한(Unorthodox) 방식으로 처리된 사항이거든요. 하지만, 분명히 적법하게 시민권을 획득한 것은 사실입니다.”
독수리의 인장이 반짝거리는 하나의 문서를 내보이는 미국 대사. 그리고 그 문서를 받아든 외교부 장관은 떨리는 눈으로 그 내용을 확인했다.
“끄응······.”
미국의 대통령이 가진 강력한 권한 중 하나인 행정명령(Executive Order).
이제 임기를 막 시작한 레너드 대통령이 내린 6번째 행정명령에 적혀져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외국인의 귀화와 관련한 조항이었다.
“Executive Order 13989. 미국 영토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외국인 중, 그 능력이 명백히 뛰어나거나 현저하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국무부 장관의 직권으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할 수 있다. 이 행정명령에 따라서 한국인 이아영에게는 이미 당사국인 한국시간으로 오늘 00시를 기점으로 미국 국적이 부여된 상태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그 이아영이라는 여자가 미국의 국익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살살이 풀과 레드 포션의 개발자라고 한다면 충분히 미국의 국익과 관련이 있죠. 장관님.”
“······.”
“설마 우리 정부가 그러한 것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리라 생각했습니까? 삼진 바이오와 이미 정부 계약까지 맺은 상황에?”
의심만 하고 있었지 아직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했던 상황.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삼진 그룹의 이호준 회장이나 이아영이나 당사자들에게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내심 의심하고 있던 이야기가 미국 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외교부 장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미국 정부도 할 말은 많았습니다. 국방부에서 추진하는 개발 사업의 핵심 연구원이라서 신변의 안전을 고려해 일부러 비밀 경호까지 붙여둔 상태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국의 정보요원들이 납치를 시도하다니······. 도대체 한국 내의 방첩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건 맞습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미국 대사. 도대체 이게 지금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외교부 장관은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외교적 횡포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따라서······. 현재 한국정부는 모든 미합중국의 국민이 가지는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그 어떤 법적 절차를 회피한 채 비밀리에 강제구금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말하는 게 잘못됐습니까?”
“······.”
이미 이번 협상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여유로운 자세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미국 대사. 그런 그의 물음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챈 외교부 장관은 정말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이 상황을······. 외교 문제로 비화시키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건 앞으로 한국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죠.”
“미쳤군.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수는 없소.”
“터무니없는 짓이라면 한국정부도 셀 수 없이 많이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뭐요?”
“이번에 새롭게 취임한 레너드 대통령님께서는 한국의 의중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하고 계십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주장하며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보다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으면서 반대로 일본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그리고 우리 미국에는······.”
“마치 당연히 지켜주는 Doormat······. 아니, 한국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호구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고 있죠.”
양국의 정부를 대표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박해지고 적나라해지는 대화. 설마 이 만남이 기록되지 않는 비공식 접촉이라고 하지만 미국 대사로부터 호구라는 단어를 한국말로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외교부 장관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묘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따라서, 다시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특명전권대사로서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 정부는 미국의 적법한 국민을 강제적으로 불법 구금하고 있으며, 심각한 미국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각적으로 해당 인원과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경호 요원 역시 풀어주기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러한 요청을 거부할 시에는 미합중국은 윤기열 정부의 불법적인 행위를 비롯해 최근 벌어진 사태와 관련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대중에게 공개할 것이며, 최근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과 기조를 비롯해 종합적인 모든 사안을 고려하여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을 친중 국가로 분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 따라서 미합중국 정부는 대한민국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외교 관계를 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의 동맹이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
그 말에 외교부 장관의 얼굴은 말 그대로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이번에 공원에서 벌어진 대참극과 관련해서 모든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것. 일단 중국의 간첩이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인을 납치하려고 했다는 사실만 해도 윤기열 정권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재앙 수준이었다.
전 세계의 초강대국이자 서방 세계의 리더인 미국.
그런 미국이 공인하는 친중 국가인 대한민국.
거기에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끌어준, 언제나 굳건할 것만 같았던 한미동맹의 근간을 뒤흔들어버리겠다는 이 미국 대사의 협박이 정말로 현실로 이행된다면, 그것은 비단 정권 교체만으로 끝날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그랬다가는 역사의 역적이 되어버릴 거야······.’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최악의 상황.
어쩌면 대한민국의 안보 전체를 완전히 밑바닥부터 흔들어버릴 수 있는 이 외교적 대참사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가득했지만, 외교부 장관은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미합중국의 의지는······. 제가 반드시 대통령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늦은 시간에 이렇게 찾아뵈어서 정말 실례했습니다. 부디 한미 양국이 앞으로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껏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며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미국 대사. 그가 떠나가고 난 이후 텅 빈 접견실 안에 가만히 앉아있던 외교부 장관은 이내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붙들어매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급하게 보고할 사안이 생겼다. 대통령님 당장 깨워!”
모두가 잠들어 있는 토요일 새벽 6시. 대한민국의 안보를 수호하기 위해서 오늘도 외교부 장관은 바쁘게 청와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
구금된 지 6일 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새볔녁에 아영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흔드는 기척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일어났다.
“우웅······. 도대체 몇신데 벌써부터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아직 창살 너머로 어둑어둑한 풍경. 새벽의 찬 공기가 가득한 상태에서 일어난 아영은 또 똑같은 이야기를 물어보며 앵무새처럼 자신을 들볶을 이 험상궃은 아저씨들을 보며 잔뜩 짜증을 내며 물었지만, 이어지는 그들의 반응에 당황한 채로 얼어붙었다.
“저······. 죄송했습니다.”
“예······?”
“그······. 저······. 그게······. 강제로 붙잡아두고 똑같은 질문만 계속하고 소리지르고······. 아무튼 정말 죄송했습니다. 불쾌하시겠지만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
평소에는 고함을 빽빽 질러대고 책상을 엎으며 공포 분위기는 잔뜩 조성하며 온갖 행패는 다 부려놨던 이들. 하지만 갑자기 어느 때보다도 순한 양이 되어 친절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사과하며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며 아영은 정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들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저기······. 혹시 다들 미치셨어요?”
“아니, 하하하. 아닙니다. 미친 건 아니고······. 저희가 뭔가 엄청 오해한 것 같더라고요. 그······. 이제 아무 문제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가도······. 된다고요······?”
“어떻게······. 집으로 직접 모셔다드릴까요?”
정말 일그러지듯이 작위적인 억지 미소를 지으며 너무나도 친절하게 아영을 응대하는 국정원 직원들. 우디르도 울고 갈 법한 이들의 완벽한 태세 변환을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이내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멀린님은 도대체 밖에서 뭔 짓을 벌이고 다닌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 악랄하기 짝이 없던 국정원 요원들이 저렇게 순한 양이 되어 벌벌 떨게 만드는지 참 의문인 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