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5화.
수십 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최고의 재벌 기업인 삼진.
하지만 이들은 그냥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6.25 전쟁을 비롯해 군부독재, 민주화 운동, 오일쇼크. IMF, 세계 경제위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기업이 탄생하고 쓰러져가는 격동과 혼란이 가득한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아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삼진 그룹.
오늘의 삼진이 있기까지 수많은 위기와 문제를 헤쳐 나갔던 이호준 회장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선 둘째 아들의 이야기에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용수야.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네 형이 뭘 어쨌다고?”
“말 그대로입니다. 회장님. 삼진 바이오의 생태 부지에 사람들을 보내 현재 재배 중인 살살이 풀 전체를 소각하려고 했습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초목들. 화재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겨진 여러 장의 증거 사진들을 올려놓으며 이용수 사장은 오늘 새벽에 벌어졌던 사고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이호준 회장에게 보고했다.
“방화를 저질렀던 범인의 신병 역시 확보했습니다. 이진수 사장과 그 수족인 김 실장이 서로 모의해서 저지른 일이라는 자백도 받아냈습니다. 또한, 바이오 내부 직원과 제 비서실 안에서도 일부러 사람을 심어둔 정황 역시 확인했으니 사실 여부는 회장님께서 직접 살펴보시면 될 겁니다.”
멀린의 말 그대로 가슴까지 땅에 파묻힌 채 반쯤 실성한 것 같은 멍하니 있던 한 정체불명의 남성. 그리고 그에게서 이용수 사장은 상세한 이번 사건의 경위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는 불신에 찬 이호준 회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이진수 사장은······. 아니, 제 형은 저와 삼진 바이오가 추진하는 신약 개발을 막아서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회장님.”
“······.”
“반드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끄응······. 이 철딱서니 없는 머저리 같은 녀석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앉은 이 자리가······. 삼진 그룹을 이끌어나갈 회장의 자리가 탐이 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삼진의 일원으로서 삼진 그룹에 해가 되는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이호준 회장은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첫째의 이 어리석은 행동에 뜨거워지는 가슴과 동시에 최고 경영자로서의 차가운 이성으로 이번 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자······. 진수 그 자식의 평소 성향을 생각해보자면 이런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는 않을 법하긴 한데······.’
비록 첫째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삼진 전자와 물산을 가져가 비교적 후계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그. 하지만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치고 올라오려는 동생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기에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비슷한 의심되는 정황들이 여럿 있었기에 이호준 회장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진수를 음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살살이 풀은 다행스럽게도 무사했다.
중앙에 자리한 재배지가 아닌 외곽에 조성한 인공 숲을 불태운 방화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전세를 역전하고자 아등바등하는 둘째 녀석이 저지른 일종의 쇼이자 모함일지도 몰랐다.
‘머리 아프군······.’
이 사건의 진위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많은 상황. 그렇기에 이호준 회장은 잠깐 이용수 사장을 바라보다 이내 피곤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증거를 하나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좋다. 네 녀석이 말한 것이 일단 사실이라고 가정하지. 그래서, 너는 네 친형이 책임을 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냐? 너는 내가 진수 녀석을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게냐?”
이번 일을 사주한 것이 만약 진수였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어떠한 처분을 내리길 바라느냐고 묻는 이호준 회장.
과연 이번 일을 가지고 자신의 친형을 상대로 어떤 대가를 바라는지를 묻는 그의 물음에 이용수 사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진지하게 답했다.
“삼진 그룹에서 내치시길 원합니다.”
“······.”
그 말에 이호준 회장은 어이가 없는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한심하다는 듯이 웃으며 완전히 달라진 기색으로 그를 무어라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크크크······. 네 녀석도 참 대단하구나. 설마하니 그런 요구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삼진 그룹의 유력한 차기 회장을 완전히 내쳐라······. 그걸 지금 내가 정말 들어줄 것이리라고 생각하고 입에서 내뱉은 말은 아니겠지?”
첫째 녀석이 한 짓이 잘한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가진 모든 지위와 권한을 박탈하는 것을 넘어 그룹에서 완전히 내치는 것은 과중한 처사임이 분명했기에 이호준 회장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이용수 사장을 질책하듯이 말했다.
“정신 차려라. 이 멍청한 녀석. 협상할 때에는 최소한 상대가 들어줄 수 있는 조건 안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외람됩니다만 회장님. 이건 협상이 아닙니다.”
“뭐······?”
“통보······. 아니, 최후통첩이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용수 사장.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입을 여닫으며 잠깐 우물거리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이호준 회장에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은 혹시 마법을 믿으십니까?”
“마법······?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 특별한 일정 없으시면 오늘 저랑 잠깐 생태 부지에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가서 설명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이용수 사장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말로는 도무지 그를 이해시킬 수 없는 그런 내용이었다.
*
푸르른 생명력이 맥동하는 삼진 바이오의 생태 연구 단지.
그곳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고 있는 나의 주변으로 막대한 양의 마나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마치 블랙홀처럼 빠르게 나에게 몸속으로 밀려드는 마나. 본래 그 자체가 강력한 에너지원 그 자체이기에 조금만 통제에 벗어나는 순간 연약한 육신을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맹렬하고 거친 에너지의 흐름이었지만 나의 완벽한 컨트롤 속에서 그 마나들은 모두 나의 심장에 자리한 서클에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리고······. 또다시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분열하는 마력의 띠.
2개에서 이제 3개로 늘어나 맹렬하게 회전하는 마나 서클이 뿜어내는 보다 강력한 마력의 출력을 한껏 느끼며 나는 비로소 눈을 떴다.
“후······. 이제야 3서클······.”
이제 판달리에서도 어엿한 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경지인 3서클. 이제야 겨우 걸음마를 뗀 상태였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용용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연신 투덜거렸다.
[ 하여간 사기라니까······. 무슨 인간이 저렇게 비정형화된 마나를 자유자재로 통제해? ]
자신의 육신에 구속해 오롯이 자신이 통제권을 가진 마나를 운용하는 것을 넘어 대자연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비정형화된 마나를 자유롭게 다스리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지배력.
소위 마나의 축복을 받은 지고의 종족인 드래곤이나 종족의 한계를 초월해 만물동조(萬物同調)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들이나 가능한 경지를 아직 서클도 완전하지 않은 내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주무르고 있는 것을 보며 용용이는 뭔가 잔뜩 불만인 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니, 그냥 하면 되잖아. 이게 그렇게 어려워?”
의문을 품는 순간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방법.
그렇기에 나는 왜 용용이가 매번 내가 하는 것을 보며 경악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지만, 그런 나의 말에 그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면박을 주었다.
[ 주인, 혹시나 해서 내가 하는 말인데······. 다른 인간들한테 주인이 하는 수준으로 기대하거나 요구하면 안 된다.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주인이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하다가는 마법을 배우자마자 한 열흘도 못 가서 죄다 마나 폭주에 빠져서 심장 터져서 죽을 거다. ]
“에이, 또 호들갑 떤다. 솔직히 조금 어려울 수는 있어도 그 정도는 아닐걸?”
[ ······. 해보던가. 그게 되나. ]
인간의 저력을 너무 무시하는 듯한 용용이의 발언. 하지만 아직 마법이 공식적으로 이 세상에 그 존재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직 그의 호언장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휴대폰에 온 문자 하나를 확인하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뭐야? 또 왜 그 복장으로 갑자기 갈아입어? 뭐 여기서 방송이라도 찍으려고? ]
뮤튜브를 찍을 때마다 입는 그 괴상망측하고 기괴한 복장. 그것을 갑자기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씨크릿 쮸쮸 요술봉까지 가방에서 꺼내 드는 것을 보며 용용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런 용용이의 물음에 나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아니.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손님이 찾아왔는데 복장은 갖춰줘야지. 그게 예의거든.”
[ ······? ]
뭔가 뒤틀린 황천 어딘가에서나 차릴 법한 예의.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그 정신 나간 복장을 한 채로 기다리던 나에게 찾아온 것은 오늘 아침에 만나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용수 사장과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느 한 노인이었다.
비록 직접 만나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미 여러 차례 TV와 신문 등을 통해서 봐 왔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사람이기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이호준 회장님. 저는 이 세계의 유일한 대마법사. 멀린입니다.”
“······.”
“크흐흠······. 저 멀린님······? 복장이 그게······?”
아침에는 파자마 차림으로, 이번에는 정신 나간 마법사 차림으로 등장한 나를 마치 앞에 두고 매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용수 사장.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호준 회장은 마치 나를 미친놈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제 방송 복장이거든요. 그래도 삼진 그룹의 회장님이 직접 오셔서 공식적으로 협상을 하는 자리인데 그냥 평범하게 입고 오기는 그렇잖아요.”
“······.”
제발 그냥 평범하게 입고 왔으면 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용수 사장. 하지만 그런 그의 시선을 시원하게 무시하고 나는 이호준 회장에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회장님은 아직도 마법의 존재를 믿지 못하시겠다고요?”
이미 나와의 만남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하나도 믿지 않는 이호준 회장. 그래서 난처한 상황에 놓인 이용수 사장은 그를 기어코 이곳까지 데리고 왔다.
“그렇네. 마법이라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그러시군요. 뭐 생각은 자유니까요. 안 믿고 싶으면 믿지 마세요.”
“뭐라······?”
“멀린님. 그게 무슨······?”
“핵심만 놓고 보자는 말이에요. 회장님이 마법을 믿든 말든 그건 하나도 상관없어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네 첫째 아들내미는 제가 애써 가꿔놓은 숲 하나를 불태워 먹었어요. 그리고 저는 그에 대한 대가로 응당한 처벌을 받기를 원하고 있고요. 맞죠?”
“······.”
중앙의 위치한 살살이 풀 재배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4개의 인공 숲. 이번에 타버린 하나를 제외하고 3개가 남아 있기에 그렇게 심각한 손실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들에게 그 불타버린 숲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를 분명하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후두두두둑.
“여기, 그 숲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식물들 몇 가지를 가지고 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 이것들이 다 뭔가······?”
내 앞에 늘어진 수십 개의 말린 식물들과 곤충들.
하지만 하나같이 처음 보는 특이한 외형과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이호준 회장은 무언가 호기심을 느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직 정확하게 이름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용용이가 살던 판달리아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건 헤르데시 허브라고 해요. 5일간 푹 끓여서 나온 진액을 머리에 바르면 이미 죽어버린 모공마저도 다시 되살려 머리털이 풍성하게 자라날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죠. 요건 구름버섯. 푹신푹신한 식감이 제격인데 이걸 먹기만 해도 최소 10일 이상은 아무것도 안 먹고 싶게 만들어버리죠. 식욕이 넘쳐 흐르는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시작하기에는 아주 제격이죠. 또 이건······.”
하나하나 그 이름과 성질을 늘어놓는 나.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평범한 효능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내 말을 듣는 이호준 회장과 이용수 사장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갔다.
“이제······. 당신네 머저리 같은 작자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아시겠죠? 하나만 이 세상에 공개되어도 그야말로 난리가 날 수십······. 아니, 수백 조의 가치를 지닌 수많은 생명이 한순간에 모조리 다 잿더미가 되어버렸다는 말이에요.”
“······.”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굳게 입을 다문 이호준 회장.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연신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그는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제 말이 농담 같아 보이시면 여기 놓여 있는 샘플들은 가져가서 알아서 한번 신나게 씹고 뜯고 맛보세요. 제가 했던 말이 무슨 하찮은 사기나 수작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될 테니까요.”
한 손에는 씨크릿 쮸쮸 요술봉을, 다른 한 손으로는 용용이를 든 채로 나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여유만만하게 물었다.
“일주일. 일주일 내로 제가 요구한 조건들을 모두 처리하고 찾아오세요.”
“그 이후에······. 앞으로 삼진 그룹과 제가 나아갈 미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