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29화.
대한민국의 정치, 언론, 경제를 모두 아우르는 막대한 권력을 가진 집단인 삼진 그룹.
한국이라는 나라에 한정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기업이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한국을 벗어나 드넓은 세계 시장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막강한 힘을 가진 패권국들 사이에 끼어 수많은 견제와 방해 공작 속에서도 세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삼진이었지만, 분명 이들에게는 그 어떠한 산업에서도 압도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예측할 수 없는 수십 년 후의 미래조차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그렇기에 한시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이런 중대한 시기에 막대한 자금을 일시에 반강제로 빼앗긴 이진수 사장은 이러한 이호준 회장의 결정에 격노했다.
“회장님! 회장님이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예?”
자신이 미국 출장을 나선 사이에 기습적으로 소집된 이사회. 그리고 일사천리로 승인된 투자 계획으로 인해서 수년에 걸쳐서 추진해오던 인수 합병 프로젝트가 한순간에 완전히 백지화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이호준 회장의 집무실에 쳐들어가 한껏 소리쳤다.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삼진 전자를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건 접니다. 어떻게 회사 내에 운용 가능한 자금을 저와의 협의도 없이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이용수 그 자식이 맡은 회사에다 투자라니요!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사······. 사장님. 진정하시지요.”
비서들의 만류에도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한바탕 난리를 치는 이진수 사장. 그런 그의 행동 당황한 기색의 수행원들과 경호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하자 이호준 회장은 고갯짓을 하며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괜찮으니까 다들 나가 있어.”
“······.”
“어서.”
이호준 회장이 재차 지시하자 우르르 방을 나서는 사람들. 모두가 사라지고 조용해진 방 안에 오직 두 부자만이 남게 되자 이호준 회장은 피곤한 얼굴로 몸을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 내가 내린 결정이 아직도 불만인게냐? 저번에 분명 너에게 직접 말해줬을 텐데.”
“전 분명히 그때 그 제안에 대해서는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하시지만 이건 엄연한 월권이자 부당한 직권 남용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횡령이나 배임으로 걸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불러 삼진 바이오에 힘을 실어줘야겠다고 이야기하는 이호준 회장. 하지만 그 제안에 대해서 확실하게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일시에 기습적으로 모든 절차를 끝내버렸다는 사실에 이진수 사장은 그 분노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자그마치 2년입니다······. 삼진 반도체가 3나노 단계에 나아가는 데 필요한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 공들인 시간이······. 아니! 제가 회장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들인 시간이 2년이란 말입니다!”
자그마치 수십 조에 달하는 자금이 투입된 대규모 인수 합병 프로젝트.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미국과 독일, 일본 등 여러 첨단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을 하나하나 사들이며 마지막 조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 회사. 루멘스를 확보하기 위해 나선 그였지만 갑작스러운 자금 강탈로 인해 최종 단계에서 협상이 완전히 무산되어버렸다.
“삼진 전자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는 아십니까?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기업들은 저희와 협력 업체들을 매수해 강탈해간 기술들로 빠짝 추격해오고. 미국은 세계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갖 규제와 압력들을 통해서 저희를 압박합니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는 겁니까?”
삼진 전자를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그리고 자신의 노력을 봐주지 않는 매정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이호준 회장의 결정을 원망하고 질책하는 이진수 사장.
하지만, 그런 그의 울음과도 같은 성토에도 불구하고 이호준 회장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무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섞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할 뿐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직접 내린 결정이다. 잔말 말고 따라.”
“아버지!”
“이 멍청한 놈! 아직도 내가 이용수 그 녀석을 편애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느냐!”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원망하는 이 철없는 자식에게 답답함을 느낀 듯 벌게진 얼굴로 호통치듯이 소리치는 이호준 회장. 그리고 그는 이 삼진 그룹 전체를 총괄하는 지배자의 면모가 가득 담긴 기세로 그의 아들에게 물었다.
“삼진 전자와 반도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네 녀석이 추진하는 그 인수 합병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 삼진 전자가 최초로 3나노의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다고 가장한다면!”
“네 녀석은······. 그리고 삼진 전자는 전 세계의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자신이 있느냐?”
“······.”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맞아떨어지고 거기에 천운까지 곁들어져야 성공할 수 있는 3나노 반도체의 양산. 하지만 그건 이호준 회장이 바라보고 있는 목표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할 뿐이었다.
“자신 없겠지. 아니, 불가능한 일이겠지. 고작 3나노의 양산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중국을 비롯해 수많은 국가의 기업들이 나서서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과 같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무한한 경쟁 속에서 간신히 생존만을 도모하며 그저 살아남을 뿐이겠지.”
세계를 무대로 망하지 않고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에만 감사해야 하는 삼진 그룹의 현실. 하지만 삼진 바이오는 달랐다.
“하지만 그런 삼진 전자와 다르게 삼진 바이오는 그 꿈과도 같은 상상을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기업도, 그 어떤 국가도. 감히 우리 삼진 그룹과 경쟁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장악력으로 전 세계의 바이오 시장 전체를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다는 말이다. 고작 3조에 달하는 푼돈 수준으로.”
살살이 풀의 존재와 그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효과와 성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이호준 회장. 그렇기에 그는 철저하게 경영자의 시각으로 이 결정을 내린 것이었지만, 이진수 사장은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동생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과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어그러졌다는 사실에 분개해 이 모든 결정을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 정말로 그 터무니없는 상상이 가능하리라고 믿으십니까?”
“가능할지 말지는 일단 시도를 해봐야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느냐.”
“FDA 심사도 아직 받지 못한, 그저 추정에 지나지 않는 그 약효를 맹신했다가 만약 인간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라도 발견되어 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럼 그때는 이 모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실 겁니까?”
“······. 실패한다면 마치 네 동생이 후계 경쟁에서 패배한 걸로 인정하라는 말로 들리는구나.”
“그 정도의 판돈은 걸어야 저 역시 이러한 위험한 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못난 놈. 이런 상황에서도 내 자리가 그리도 탐나느냐.”
어떻게든 이 상황 속에서도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아들. 그런 그를 보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이호준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내 삼진 바이오가 만약 이번 투자로 인해 삼진 전자에 손해를 끼치게 된다면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약속하지. 그게 네 녀석이 회장이 된다고 보장해주지는 않겠지만, 분명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는 있을게다.”
비록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의 소득이라도 얻었기에 나름대로 만족한 것인지, 이진수 사장은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추태를 부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그럼 이만 다시 업무에 복귀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떠나가고 조용해진 집무실.
홀로 남은 이호준 회장은 잠깐 상념에 잠기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클클······. 한심한 녀석. 아직도 자기 아비를 잘 모르는구먼. 실패할 것 같은 내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거늘.”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으로 지금껏 수없이 많은 성공적인 투자와 사업을 진행해온 이호준 회장.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내린 결정이 분명히 이 삼진 그룹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명한 권위를 가진 바이오 회사. 파이자.
발기부전 치료제를 최초로 개발한 회사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고 수많은 신약을 성공적으로 개발하며 압도적이고 그야말로 강대한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국제 우편이 날아들었다.
“이게 뭐지······?”
작은 아이스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처음 보는 괴상한 빛깔의 식물.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유리병 안에 마치 혈액처럼 보이는 액체가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며 파이자의 연구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삼진 바이오······? 여긴 또 어디지?”
“들어봤어. 그 한국에 있는 제약 회사 아냐?”
“아, 그 바이오시밀러 전문 회사?”
“도대체 뭘 보낸 거지? 여기 무슨 서류도 같이 첨부되어 있는데?”
삼진 바이오를 특허권이 만료된 의약품을 가져다가 베껴 파는 곳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파이자의 연구진들. 기술력도, 인력도 한참이나 뒤떨어지기 짝이 없는 그런 곳에서 자신들에게 갑자기 아무런 연유 없이 뭔가를 보냈다는 사실도 이상했지만, 그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에서 우연히 학계에서 아직 보고되지 않은 미발견 식물을 발견했습니다······. 확인되지 않는 신물질을 함유한 것으로 파악되나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아 귀사에 조언을 요청하고자 해당 샘플을 보냅니다······?”
“이건 또 뭔······.”
“미발견 식물? 확인되지 않은 신물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디 아마존 오지도 아니고, 그깟 코딱지 많은 작은 나라에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라니? 우리 집 강아지도 웃겠다.”
지금껏 미발견된 식물이 가지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신물질.
그리고 상세 설명에 나와 있는 확인된 효능을 확인한 이들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로 삼진 전자의 요청서를 돌려보며 한참을 웃어댔다.
“크크큭······. 나 참 어이가 없어. 급격한 세포 재생 효과? 신경과 모든 생체 조직의 복원? 이런 말도 안 되는 효과가 어딨어?”
“무슨 판타지 소설을 보고 썼나? 그냥 어디서 미친놈이 보낸 만우절 장난 같은 거 아냐?”
전혀 그 안에 적혀져 있는 내용을 믿지 않는 파이자의 연구원들. 하지만 마치 사람의 피와도 같은 너무나도 진한 붉은색으로 유리병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그 액체와 처음 보는 특이한 외형의 식물을 보며 이들은 묘하게 밀려오는 호기심에 실험 쥐를 꺼내 들었다.
“어디 한번 실험이라도 해 보자고.”
“크크크······. 그래. 어······?”
메스로 길게 쥐의 등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그 붉은빛 액체를 발라본 연구원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보며 방금까지의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는 상처.
분명 깊게 낸 칼집에 잔뜩 벌어져 있던 그 살갗이 액체를 바르자마자 순식간에 붙으며 흉터도 없이 완전히 깔끔하게 복원되는 것을 보며 누군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다······다시 해봐!”
“예······? 아······. 예!”
한 번······. 두 번······. 수 십 번의 반복적인 실험 끝에서.
그들은 완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한국의 어느 존재감 없는 바이오 회사에서 장난처럼 보내진 소포.
파이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선도하는 수많은 제약 회사와 연구소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뿌려진 이 소포들은 일순간에 모두의 뇌리에 한 회사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삼진 바이오라는 이름을 말이다.